주제 :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책임

본문 : 누가복음 10장 1~16절

설교자 : 최종혁

예수님의 사역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눅 4:43).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사명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처음 하셨던 말씀에 그것이 나타나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누구든 회개하면 그 나라의 백성이 되고, 다른 말로 하면 누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엇일까요? 어느 방향으로 가다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왜 회개하라고 하셨을까요? 우리 모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지만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죄악된 삶을 사는 사람이든, 혹은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도움을 구하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내가 죽으면 갈 수 있는 곳” 정도로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 전파하셨던 하나님 나라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세례 요한, 예수님, 제자들이 선포했던 메시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해야 죽으면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이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왔고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우리가 죽든 살아있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 온전한 실체는 나중에 드러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삶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없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회개한 자들, 믿고 구원 받은 자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저 나를 믿으면 너희는 죽어서 좋은 곳에 가게 될 것이라는 게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부분도 말씀하셨고 그런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 신앙을 갖는 것은 내 삶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삶 전체를 뒤바꾸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에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가서 그곳에서 오래 있다면 나도 모르게 내가 이곳 사람인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 나라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 삶의 일부에만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고 계속 그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의 창조자, 주권자,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킵니다. 누구도 가볍게 넘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복음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이 무엇인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워보겠습니다.

1. 전하는 자의 책임

먼저 전하는 자의 책임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이미 된 자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자들의 책임입니다. 9장 57~62절에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을 기꺼이 하겠다고 말하는 자들의 책임입니다.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전에 12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이번에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한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던 사람들 중에는 잘못된 동기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로 세우시고 두 사람씩 보내셨습니다. 마치 왕의 행차를 알리는 사자와 같은 역할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두 사람씩 보내신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둘이 가는 것이 사역하는데 있어 서로 의지도 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실제적인 사역의 결과로도 이어졌을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최소한 두 명의 증인이 있어야 증언의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파송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첫째는 추수할 것이 많다는 것, 둘째는 일꾼이 적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많은 일꾼을 밭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들의 밭을 보셨고 긍휼한 마음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셨습니다. 그 일을 제자들을 통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12 제자들을 통하여 그렇게 일하셨었고,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 지상대명령을 주셔서 제자들과 그들을 통해 또한 제자가 될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계속 이 추수하는 일을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추수할 때고 지금도 일꾼은 필요합니다.

이 일꾼들에게 주시는 책임과 관련된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하라, 일꾼을 위해

가라, 세상 속으로

의지하라, 오직 하나님을

전하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A. 구하라, 일꾼을 위해(2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 추수하는 자들이 해야 하는 일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은, 더 많은 일꾼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추수는 때가 정해져있습니다. 추수 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일꾼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남아 있는 제자들이 아니라 파송하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70명을 세우시고 그들을 보내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둘째로 일꾼을 보내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인이 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일꾼을 보내는 것은 주인이 할 일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일꾼이 다른 일꾼을 주인에게 요청해야 할까요?

이 상황을 진짜 추수하는 상황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은 다른 때처럼 적정 수의 일꾼을 보냅니다. 그런데 정작 일꾼들이 나가보니 자신들이 감당하기에는 추수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일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 일꾼을 찾아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주인에게 지금 상황을 보고하고 일꾼을 더 보내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일꾼이 일꾼을 보내달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말씀하고 계신 추수하는 주인은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실 이 상황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어차피 일꾼을 보내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기도할까요?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모르고 계시거나 혹시 잘못 생각하고 계실까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해 내가 속한 곳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일꾼을 보내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처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교회의 장로들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도 포함되겠지만, 누구든 어느 곳에서든 주의 복음을 전할 자가 일꾼입니다. 나의 가정에 복음을 전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나의 직장에, 학교에도 일꾼이 필요합니다. 내가 속한 사회, 나라에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 구원 받은 자의 책임입니다.

B. 가라, 세상 속으로(3절)

“갈지어다” 첫번째 책임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이 두 번째 책임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추수할 일꾼이 필요한 것을 보고 있고 하나님과 같은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가장 먼저 내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있으면서 계속 일꾼을 위해 기도만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기도하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매우 중요한 일이고 필수적인 일이지만, 기도가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 뒤에 숨어서 정작 내가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여기 말씀에서는 제한이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이 있는 곳으로 제자들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제한을 두시지 않았기에, 어쩌면 유대인들에게, 어쩌면 사마리아, 이방인들에게 갔을지 모릅니다. 세상 속으로 간 것입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 한 마디로 내 편인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로 가야 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죄의 길을 걸으며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에게,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둠의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 가야 합니다. 그들이 알아서 찾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다 잘될 것만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생각만큼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 받아들이지 않고 끝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실제로 사도들은 후에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길을 가셨기 때문에 그 제자들도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미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연히 이럴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서 은혜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예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주님, 그래도 이건 너무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겠지만, 예수님은 그런 일들이 있을 것을 이미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러니 일단 기도하는 일에 전념해라”고 하지 않으시고 “갈지어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책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그저 사지로 내몰고 계신 것일까요? 어떻게 이리 가운데서 어린 양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어린양이 이리들 가운데 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이 세거나 사나워도 이리를 이길 수 있는 어린양은 없습니다. 목자와 함께 있으면 됩니다. 목자의 보호를 받으면 됩니다. 따라서 양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머리가 단단하고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고 얼마나 이가 튼튼하느냐가 아닙니다. 자기들끼리야 그것이 의미가 있겠지만 포식자들 가운데 있을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하고 능한 목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고 그 목자를 믿고 목자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양 같은 일꾼들이 어떻게 목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C. 의지하라, 오직 하나님을(4~7절)

이 부분은 열두 제자에게 하셨던 말씀과 유사합니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전대나 배낭은 그 목적이 무언가를 넣어서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앞으로 먹을 것, 여벌의 옷 등을 가방에 넣고 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필요들을 채울 수 있을까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야할까요?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오히려 예수님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먹고 자고 할까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다른 믿는 자들을 통해서 그들의 필요는 공급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평안을 받을 사람” 문자적으로는 “평안의 아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 그 집에 하나님의 평안을 선포하고 그 집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혼이 있다면 그가 그 평안의 복음에 응답할 것이고 그를 통해서 물질적인 필요가 채워질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한편으로 이들이 어느 집에 거하면서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이것은 ‘평안을 받을 사람’이 생각해야할 부분입니다. 일꾼들의 물질적 필요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먹을 것이 내려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사람들을 통해서 채우십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받을 사람”, 다른 믿는 자의 수고와 봉사를 통해 필요를 공급하실 것입니다. 일꾼들을 영접한 사람은 그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꾼들이 그런 것을 요구하거나 계속해서 더 나은 대우를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그 집에 거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먹고 마시면 됩니다(“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집, 더 부자인 사람을 찾아 다녀서는 안 됩니다(“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면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도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 없이 들릴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들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행하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파송 받는 제자들에게 한시적으로 적용되었던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훈련의 목적으로 교훈의 목적으로 이렇게 하라고 하셨지, 앞으로 계속해서 이렇게 다니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배워야할 교훈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필요들은 채워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배울 교훈도 그것과 같습니다. 아무 준비없이 다니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D. 전하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8~11절)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제자들을 영접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이들이 선포해야할 메시지는 동일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영접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왔고 거절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왔습니다. 특별히 영접하는 자들에 대해 앞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이 주는 음식을 먹으라고 하시고 또한 병자들을 고치라고 말씀하십니다(8-9). 영접하는 자들이 후에 경험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그들에게 조금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메시지를 함께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거절하는 것이 가벼운 일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하는 자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큽니다. 하지만 “전하는 것”이 전하는 자의 책임입니다. 그것에 대한 반응은 전하는 자의 몫이 아니라, 듣는 자의 몫이요 책임입니다.

듣는 자의 책임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전하는 자의 책임에 대해서 우리가 배울 교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꾼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가야 합니다. 추수할 밭이 따로 어디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옆에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내가 가야할 추수밭입니다. 가정, 학교, 직장, 심지어 교회도 추수가 필요합니다. 누군가 복음을 전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못할 이유가 있나?”라는 생각도 해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미 그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교회의 장로들이, 전도에 은사 있는 자들이 당신 직장에 있는 김모씨를 찾아가 전도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린이집의 다른 엄마를 찾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미 그곳에 보내셨음을 생각하십시오.

그 때 여러 가지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그 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일하십시오. 그리고 그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꼭 논리정연하게 복음의 시작부터 끝을 다 잘 풀어서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회개해야 함을, 심판이 다가 오고 있음을, 그 심판주가 또한 구원의 주이심을 전하십시오.

여기까지가 전하는 자가 할 일입니다. 결과는 좋을 수도 있고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보낸 주인은 결과까지 우리에게 책임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위의 명령에 얼마나 성실하게 순종했느냐가 중요합니다.

2. 듣는 자의 책임 –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는 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두 가지로 반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조금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희망의 메시지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들에게 매우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2). “그 날”은 최후 심판의 날입니다. 심판의 때에 지금 제자들을 거절한 사람들은 소돔의 사람들보다 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소돔”은 가장 타락한, 죄악의 상징과 같은 도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사건의 하나로서 그들의 죄로 인한 멸망은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에 대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절한 마을의 사람들이 더욱 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더 중한 심판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런 심판을 향해 가고 있는 세 도시를 직접 언급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가버나움”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실 때 중심이 되었던 도시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고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겸손히 회개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하늘까지 높아질 것 같았겠지만 실제로는 음부, 가장 낮은 곳까지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벳세다” 벳세다는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으로 가버나움 근처의 마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이 마을 근처에서 행해졌었습니다. “고라신” 역시 가버나움 근방의 작은 마을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하셨던 일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그곳에서도 많은 권능을 행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의 일부만을 기록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자주 봤습니다. 사람들을 고치는 것을 봤고 그 말씀도 직접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 교만에 빠져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이라는 이방 도시를 언급하십니다.

“두로와 시돈” 이들은 이방신을 섬긴 도시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사야 23장과 에스겔 28장 등에서 이들에게 임할 직접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두 도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불의한 도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져 심판 받은 도시로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때에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지금 행하시는 권능을 목격했다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는 것은 진정한 참회와 탄식의 표현입니다. 그들조차도 회개하기에 충분한 일을 예수님은 가버나움과 고라신, 벳새다에서 행하셨는데, 그들은 여전히 회개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그들의 죄는 심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임할 심판도 심각할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이라도 지금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의 왕인 예수님을 거절한다면 동일한, 아니 더 중한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들에게 더 심한 심판이 있을까요? 그들이 더 많이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더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를 들었기 때문이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경고를 가볍게 듣지 않기 바랍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이런 심판을 선포하는 예수님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신 예수님은 다른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 그분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도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들을 저주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지금 한탄하고 애통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직은 기회가 있기 때문에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심판의 메시지를 ‘저주’처럼 여기지 마십시오. 심판은 ‘사실’이고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것은 아직 그 확실한 심판을 피할 기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 심판이 시작될 때는 이미 늦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추수하는 일꾼으로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이 때는 아직 늦지 않은 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일꾼으로 사람들이 아니라 천사들을 보내실 때가 옵니다. 그 때 천사들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습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할 것입니다. 참된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을 구분할 것입니다. 그 때가 되기 전에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답하십시오. 그 놀라운 보물의 가치를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결코 하나님께서 모른 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6).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는 힘이 되는 말씀이고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대사관들입니다. 우리가 거절당할 때 주님은 주님이 거절당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시고, 우리가 핍박당할 때 주님이 핍박당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 은혜에 감사하며 기쁘게 이 일을 감당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분들은 이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결코 가볍게 흘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그 복음을 전하는 한 사람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내서 당신에게 복음을 전하신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휴대폰이나 보험 가입 전화를 거절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보험사를 거절하고 다른 보험사를 선택해서 동일한 혹은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거절하고 다른 무엇을 선택한다면 절대 더 나은 것을 바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거절한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개인의 취향의 문제나 선호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라고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에 내 목숨이 걸려 있는,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지금도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서 오라고 하시는 그 예수님을 지금 거절한다면, 후에 당신이 만나게 될 예수님은 공의로 당신이 행한 대로 갚으실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어떤 예수님을 만나길 원하십니까? 우리 중에 누구도 심판하시는 예수님 앞에 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제를 위한 질문들

  1.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왜 오늘날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2.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주신 명령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떤 면에서 더욱 순종하기 원하십니까?
  3. 예수님께서 거절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는 어떤 교훈을 줍니까?
  4. 주변에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가족, 친척, 친구, 직장 동료 등이 있습니까? 그들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