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의 택한 종
본문 : 이사야 42장 1~9절
설교자 : 조정의
1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5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8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9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우리는 지난 주일 마태가 기록한 족보를 통해 긴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마태는 그 긴 시간을 14라는 숫자로 나누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포로 시기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입니다. 저는 오늘, 그 중 마지막 14대에서 3대를 더 거슬러 올라간 시기, 히스기야 왕 때 기록된 예언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마태가 족보를 기록한 시점(AD 50-60)에서 750년 전인 BC 690년, 히스기야 왕의 말년에 선지자 이사야에게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서는 참 흥미로운 책입니다. 흔히 이사야서는 성경의 축소판이라고들 하는데, 그 이유는 이사야가 66권이고(성경 역시 66권), 이사야의 앞 39장과 뒤 27장이 서로 상이하기 때문입니다(성경의 구약 39권, 신약 27권). 성경의 신구약과 같이 이사야서도 앞부분은 심판의 내용을, 뒷부분은 위로와 소망, 구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의 이름은 ‘마헬살랄하스바스’로, 그 의미가, ‘노략이 속히 임하고 약탈이 빠를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심판을 의미하는 이름인 것입니다. 또 한 아들의 이름은 ‘스알야숩’으로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역시 이 이름은 소망과 희망의 이름인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름의 뜻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인데, 그는 모든 선지서들이 전하고 있는 ‘임박한 심판과 신실한 남은자의 미래’와 더불어,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처럼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라는 이름만 신약에 21번 나오고, 이사야 53장은 직간접적으로 85회 이상 신약에 인용되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이사야는 남 유다 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를 거쳐 히스기야 시대까지 5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파하였고, 탈무드 전통에 따르면 히스기야 왕 다음으로 왕이 된 악한 므낫세 치하에서 톱으로 켜는 것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는 히브리서 11:37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고난을 가리켜 “톱으로 켜는 것”으로 표현했던 그 믿음의 선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서는 예언서입니다. 역사서는 역사를 기록한 것이고 시는 그 역사 속에서 경험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라면, 예언서는 그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에서 시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이사야 42장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을 보면, 분열왕국 북이스라엘은 이미 잇따른 영적 타락과 배교의 결과로 앗수르의 손에 의해 30여년 전 멸망당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앗수르라는 큰 제국은 남유다 왕국을 역시 압박해왔습니다. 주전 701년에는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남유다를 치러 옵니다.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에 반대하는 동맹국에 가입하였기 때문입니다. 산헤립은 유다의 고을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합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외부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히스기야라는 왕이 육체적으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로인해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히스기야는 바벨론에서 사자가 와서 축하할 때 궁궐의 보물을 보여주면서 자랑합니다. 하나님은 장차 바벨론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밖으로는 제국의 압박, 안으로는 연약한 왕의 지도력으로 유다 왕국은 점점 쇠퇴와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42장은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등불’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종의 노래’라고 하는데,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여러 종의 노래 중 순서상 첫째입니다. 여기서 ‘종’은 하나님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인물을 말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왕’이거나 ‘선지자’, ‘제사장’, 또는 ‘택한 백성’,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어떤 나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시 이사야가 기록할 때는 앗수르, 바벨론, 애굽의 왕 등이 하나님이 택한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내 백성 애굽이여(사 19:25),” “처녀 딸 바벨론이여(사 47:1)”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한 다윗의 왕들도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나 므낫세도 하나님이 다윗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 왕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역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나의 백성”이라고 하셨고, “제사장 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왕들이나 다윗의 왕조,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제국의 왕들은 연약한 나라를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림하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약탈하였습니다. 므낫세 왕은 바알과 아세라 성전을 세우고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스라엘은 연약한 자들을 착취했고 범죄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사 3:15),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1:4). 그들은 모두 타락하고 행악했으며 교만했습니다. 연약한 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했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멀어졌습니다.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41:29). 이러한 시점에서 하나님은 42장 1절에 “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직접 택한 종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42장 1-4절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그 택하신 종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5-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종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부분으로 그의 임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1절). 하나님은 “나의 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직접 “붙드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붙든다는 것은 왕이 그의 권세를 상징하는 패를 굳게 붙들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세울 이 종을 하나님이 가진 모든 권세와 권능으로 붙들어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 종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진 권세로 말하는 것이고, 그가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1절). 하나님이 택하신 종은,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 중 제일 나은 사람을 택하거나 어쩔 수 없이 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히 기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만족시키는 성품을 지닌 자입니다(행 13:22).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1절). 그는 하나님의 영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는 것을 확증하고,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을 주셔서 도울 뿐 아니라 영을 주셔서 도우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1절). 여기서 “정의”는 ‘바른 뜻’, ‘올바른 도리’라는 의미인데 성경에서 이 말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3절). 이 말씀에 대한 더 정확한 번역은, “진리에 이르기까지 정의를 시행할 것이다”이고, 흠정역에서는 “판단의 공의를 베풀어 진리에 이르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진리의 말씀에 이르기까지 정의를 선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교훈”은 토라, 즉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종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온전히 이행될 때까지 정의를 실행하고 선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택하신 종의 역할입니다. 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권세와 권능을 더하실 것이고 자신의 영을 주어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2절). 이 말씀에는 종의 성품이 드러나는데 온유함과 겸손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 제국의 왕들과 이스라엘의 왕들은 목소리를 높여 외치던 사람들입니다. 연약한 사람을 학대하고 그 위에 군림하기 위해 소리 높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종은 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겸손하고 온유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3절). 택하신 종은 자비롭고 은혜롭다고 말합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약하고 멸시받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4절). 그는 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사용한 ‘쇠하다’는 말은 앞에서 말한 ‘꺼져간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또한 그는 낙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여기 ‘낙담하다’는 앞에서 말한 ‘상하다’와 같은 말입니다. 그 종 역시 외부적인 압박과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꺾이거나 꺼져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룰 것입니다. 어떠한 압박에도 정의를 이루는데 신실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날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제 42장 5-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종에게 직접적으로 임무를 주십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5절).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이렇게 길게 표현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만물을 붙드시고 지탱하고 계시며 양육하시는 분입니다.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신다는 것은 이 땅에 있는 생명체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사 38:16; 눅 12:20).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양육자이며 만물을 지탱하는 자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 모든 영혼의 주인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롬 11:3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6절). 하나님은 종에게 “너를 의로 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온전한 의를 가지고 태어나야 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보호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으로 친히 그를 견고하게 붙드시는 것입니다(“네 손을 잡아”). 이 말씀에는 그 종의 임무가 드러납니다. 바로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이 율법이고, 그 안에 포함된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 종은 과거의 율법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의 중보와 보증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조문을 통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택하신 종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죄가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물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감금한 것입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7절). 하나님의 택하신 종은 이와 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그는 죄 안에 갇힌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건지실 것이고 어둠에 속한 이방인들을 어둠에서 기이한 빛으로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언약의 중보가 될 것이고 이방인의 빛이 될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8절). 이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과 이방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모든 영광을 취하실 것입니다. 바알도 아세라도, 인간의 어떤 왕도, 선지자나 제사장도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택하신 종만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9절). 이 말씀의 시작인 “보라”는 왕의 모든 어명의 확증이 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언약의 백성과 이방인들을 구원하여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암흑의 시대를 살던 당시 사람들은 이 ‘택하신 종’이 과연 누구일까, 언제 나타날까 간절히 기다리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제국의 왕, 고레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레스 왕 원년에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다윗의 왕조 중 요시야 왕은 어떻습니까. 그는 우상을 불태우고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의 계명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율법책을 발견하여 그것을 가르쳤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남겨진 백성들도 ‘택하신 종’의 후보였을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나와서 회개하고 예배하던 사람들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을 때 그들은 다 일어서서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정의가 세상에 선포되었는가,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는가, 이방인에게까지 구원이 선포되었는가, 인간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 돌려드렸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항목들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에서 그리스와 로마 대제국으로 이어지는 강대국들의 압제와 침략이 있었고, 이스라엘 내부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야 할 종교적 지도자들의 외식과 율법주의 등의 종교적인 짐을 지우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의 택하신 종’을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더구나 400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나님은 아무런 계시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는 내가 가리키는 사람이 바로 이사야가 말한 ‘택한 종’이라고 말하면서 책을 기록합니다.
그분은 왕의 족보를 타고 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마 1:1-17). 그러나 그분은 30세가 되기까지는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3장에서 그분은 침례를 받으시러 요한을 찾아가십니다. 그분이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며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광야로 가셔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실패했던 모든 유혹의 시험을 주님은 이겨내십니다. 그리고 5장부터는 산에 올라가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계명을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하시는 것에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7:28)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8-9장에서는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셔서 연약한 자들을 만나십니다. 수많은 병자들, 사회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나약한 자들, 꺼져가는 심지와 상한 갈대같은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치십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9:8).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11장에 이르러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물으러 사람을 보냈을 때 예수님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5)고 말씀하십니다. 11:28-29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것으로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신 후에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2:17-21).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에게 약속하신 ‘택하신 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나오게 되었고 우리에게까지 그 길이 열렸습니다. 그분은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잔을 돌리시면서 이것이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부터 마태까지 800년의 시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언제 오시려나 간절히 기다리고 부지런히 연구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우리는 ‘오신 메시아’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곧 있을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기념하는 분이 바로 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계 22:7). 우리는 오신 메시아를 기념하고 기뻐하면서 동시에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우리에게 오신 메시아를 기념하고 또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