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인사청문회
본문: 누가복음 16장 10~13절
설교자: 조정의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국가의 중요한 직책, 총리, 장관 등을 선출할 때 청문회를 합니다. 큰 직임을 맡을 만한 사람인지 검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 사람이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 그곳에서 보인 능력과 자질과 성품은 무엇인지 철저히 조사합니다. 청문회를 하다보면 불법적인 일들, 부정한 일을 한 것이 밝혀지거나 현재 불법으로 가지고 있는 재물이 있는 경우 지탄을 받고,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이 정도의 문제는 있다고 생각되는 결점도 그가 큰 일을 맡을 사람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청문회는 큰 직책을 맡기 전에 했던 작은 일들에 얼마나 충성스러웠는지를 보고 앞으로 큰 일을 맡길만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들 인생에 대한 청문회가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재물에 대한 말씀 중에 이 땅의 재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평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번 불의한 청지기에게 배운 지혜를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재물에 우리가 지혜롭고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거기서 더 나아가 이 땅에서 충성스러운 자에게 다가올 영원한 세상에서 더 큰일이 맡겨진다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10-12절에는 3개의 아포리즘(aphorism)이 등장합니다. 경구라고도 하는데, 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나 글입니다. 격언, 금언, 잠언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청문회에서 우리에게 하실 세 가지 기준입니다. 13절에서는 그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기준1: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인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10)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기준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인가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 “큰 것”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작은 것에 대한 충성도가 큰 것을 맡기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고, 작은 것에 불의한 자가 큰 것에도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큰 것을 누구에게 맡기시겠는가?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작은 것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성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을 ‘다 드리라’, ‘더 많이 드리라’는 말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충성’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9절). 하나님이 맡겨주신 재물을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웃의 필요를 돌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도록,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내게 맡기신 것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웃 말고도 가족, 국가, 교회의 필요를 돌보는 일에 재물을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 특별히 재정적 수입이 별로 없는 사람,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사람(학생,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 퇴직한 사람)들은 충성스럽게 재물을 사용하는 것에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재물에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나 큰 것을 드리느냐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얼마나 충성하는가를 보십니다. 충성이 핵심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훈련은 교회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손에 천 원, 오백 원을 들고 하나님께 드리는 연습을 합니다. 달란트 시장에서는 아이가 달란트의 일부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도록 합니다. 어린 나이에도 하나님께 다시 드리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학생회에서도 아이들이 받은 용돈 가운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헌금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할 수 있도록 돕는 방편들입니다. 성도들이 물질로 성도의 필요를 돕기 위해 구제자금을 모읍니다. 구제에 필요한 물질을 충당하기 위해 집에 있는 물건을 기증하기도 합니다. 애찬 당번이 성도를 섬기기 위해 식사에 필요한 물질을 제공합니다. 성도가 성도를 초대하고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해 물질을 사용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모습입니다.

당신은 작은 일에 충성하십니까? 이 땅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재물에 작은 일에도 충성스럽게 임하고 있습니까? 주의 영광을 위해 가정, 이웃, 국가와 교회의 필요를 충성스럽게 돌보고 있습니까? 특별히 내 이웃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런 자에게 큰 것을 맡기실 것입니다. “크다”는 수, 양, 질적으로 더 뛰어난 것을 말하는데, 천국과 관련하여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눅 6:23) 이 땅에서 작은 것에 충성된 자에게 천국에서 많은 것을 맡길 것이라는 것입니다(마 25:21).

 

기준2: 이 땅의 재물에 충성하는 자인가?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1절).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닙니다.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되지 않다면 참된 것을 어떻게 맡길 것인가, 참된 것을 맡으려면 불의한 것에도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많이 당황합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 “의롭지 못한 재물”(검은돈)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아닙니다. “불의한”(아디코스)은, 하나님과 세상을 구분하여 설명할 때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속한 사람(불신자)이나 물질을 가리킬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마 5:45)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행 24:15)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고전 6: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불의한 재물”(눅 16:9, 11)은 뒤에 나오는 참된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 땅에 속한 재물’을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악하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속한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든 적게 가지고 있든 이 땅에 살아갈 동안에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재물은 다음 세상에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딤전 6:7).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재물에도 충성되지 않는다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어떻게 맡길 수 있겠는가입니다.

우리는 “행인”과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몇 년 후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을 계획하고 한국에서 돈을 열심히 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번 돈을 여기서 흥청망청 쓴다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 것입니까? 우리가 현재 그와 같은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가 가게 될 본국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주어진 일시적인 시간과 재물을 규모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영원히 여기 살 사람처럼 사는 것은 어리석고 한심한 일일 것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시리아 에프렘은 ‘없어질 것들로 없어지지 않을 것을 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이고 행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참된 것”을 맡기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 가치가 진실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참된 빛”, “참된 떡”(요 1:9; 6:32). 참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요 17:3; 살전 1:9; 요일 5:20).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하늘에 간직한 것을 의미합니다(벧전 2:3,4). 영원히 가치가 있고, 영원한 만족을 주며, 영원히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것을 우리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랜디 알콘의 책, ‘돈 소유 영원’에서는 두 농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지독한 무신론자였고 또 하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두 농부는 봄에 같은 면적의 곡식을 심었습니다. 무신론자 농부는 그리스도인에게 내기를 겁니다. 봄에 같이 씨를 뿌리고 10월쯤에 “누가 더 곡식을 거두는지 보자. 너는 계속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는 계속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결과와는 다르게 무신론자가 더 많은 수확을 거둡니다. 무신론자는 “어리석은 사람아, 하나님에 대해 이제 뭐라고 더 할 말이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우리 하나님은 이 10월에 모든 계산을 하지 않으시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의 계산은 하늘나라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기준3: 맡겨진 것에 충성된 자인가?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12절)

모든 재물이 사실상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재물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이 말씀에서 “너희의 것”은 무엇일까요? “심령이 가난한 자,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고(마 5:3)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마 5:10).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9:14).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즉,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바로 믿는 자들의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맡겨준 재물, 내 것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사용하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너희에게 주기로 한 천국 기업을 줄 수 있겠느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맡겨진 것에 충성된 자인가? 하나님이 지금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것, 재물, 시간, 능력, 그 외 모든 자원에 나는 충성된 자인가?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합니다(고전 4:2)

우리는 사회나 공공기관에서 자금을 함부로 사용할 때 많은 책망을 합니다. 그들의 재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재물이기 때문에 더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줍니까? 우리는 얼마나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까?

예수님은 적당한 충성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하늘나라에서 큰 것을 주시지 않아도 된다. 그냥 적당히 살다가 하늘나라에 들어 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중간지점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님은 적당히 충성된 종의 예시를 들지 않으십니다. 충성된 종이거나 게으른 종입니다. 착한 종이거나 악한 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이거나 불의한 자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영원한 것, 하나님의 기업을 맡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기준이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 있는 것들에 충성된 자입니다. ‘충성된’에 반대된 ‘불의한’이라는 단어는, ‘믿지 않는 자’, 천국과 연관시켜서 다른 곳에서 불신자로 ‘영원히 지옥에 가게 될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달란트 비유에서도 하나님이 맡겨준 것에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마 25:26). 그리고 그가 맞이한 결말은 주인의 처소가 아니라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오늘 이 말씀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마땅한 삶,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삶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영원한 기업을 받게 될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청문회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비결: 오직 하나님께 충성하라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절)

지극히 작은 것부터 이 땅에서 내게 맡겨주신 재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 왜 안 될까요?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재물도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재물이 내 안에서 탐심입니다. 이것은 갖가지 죄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여 심지어 하나님도 물질을 더 얻기 위한, 물질적 축복을 누리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물질을 통제해야 하는데 오히려 물질의 하인이 되어 물질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얻는 데 헌신하고, 물질을 소비하는 데 헌신합니다.

그러나 “집 하인”은 오직 한 주인만 섬기는 존재입니다. 집 하인은 집 안에 소속되어 그 집을 위해 일하는 종, 노예입니다. 한 학교의 교사, 한 직장의 직원일 때 회사가 허용하지 않는다면 다른 직장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한 아내의 남편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다른 여자에게 아내를 대하듯 헌신할 수 없습니다. 집 하인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친절을 베풀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최우선 순위에 두고 충성을 다해야 할 사람, 헌신해야 할 대상은 오직 자기가 속해 있는 집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오직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물질은 자기 위치를 찾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과 재물 중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재물을 사용할 때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헌신하고 있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이 나의 재정관리하는 모습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재물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기뻐하실까 스스로에게 질문하십시오. 가계부나 재정관리하는 툴을 꺼내두고 맡겨진 재물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나는 더 크고 참되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재물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헌신의 대상이 무엇인지, 하나님인지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결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

인간의 모든 문제는 결국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데서 옵니다(롬 1).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 그래야 인간에게 참된 만족과 평안과 기쁨이 오는데, 그 자리를 항상 넘보는 우상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이 우상을 매일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상을 영어로 ‘아이돌’이라고 하는데 재물은 우리에게 있어 늘상 인기순위 1위 아이돌입니다.

양팔 저울에 하나님과 재물이 있을 때 당신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까요? 한쪽은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영원히 자기의 영광과 기업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자녀로 삼아주신 아버지, 그 특권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서 가진 모든 것을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부요하기 위해 가난해지신 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신 분”,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분”입니다. 한쪽에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한 일인가요?

당신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 것입니까? 주님은 더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이것을 택하라 하십니다. 작은 일에도 충성스럽게 행하라, 그런 자에게 좋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인사청문회에 갔을 때 이러한 질문들을 하실 때 어떤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었고 적당히 살았으니 하늘나라에 가겠죠’가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이렇게 산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 사는 모습 하나만 봐도 영원하고 크고 가치 있는 것들을 맡길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사청문회를 마치고 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