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감옥에 갇힌 요셉
본문: 창세기 39장
설교자: 이병권

 

창세기 39장은 주일학생들이 모여서 어른들의 도움 없이, 아이들끼리 연극을 만들며 놀이를 할 만큼 많이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도 익숙하고 잘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애굽에 종으로 팔린 요셉은 보디발 집에 가게 되었고 그의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 가정총무가 됩니다. 이제 그의 인생이 좀 괜찮아질까 생각할 수 있을 때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요구를 거절한 대가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감옥에서도 요셉은 간수장에게 인정을 받고 형통한 자가 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요셉을 생각하면 어떤 인격적인 자질이 생각나십니까? 요셉의 저 모습을 나도 배우고 싶다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몇 가지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성실함일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요셉에게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 먼 길을 혼자서 걸어갔습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성실하게 맡은 일을 합니다. 하지만 형들에게 버림을 받아 멀리 애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요셉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부족할 것이 없는 풍족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아들에서 하루아침에 이방나라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살게 될까요?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평생을 복수하기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무기력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인생을 낭비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요셉은 다릅니다. 요셉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일을 만나든지 관계없이 성실합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아들로 있든지, 이방나라에 노예가 되어 있든지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을 때에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도 변함없는 요셉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성실함을 보면서 그런 모습을 교훈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여기서 오늘의 질문입니다. 요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성실했을까요? 저는 지금 뜬금없이 요셉을 성실하다고 말해놓고 나서 다시 요셉이 성실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면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1에서 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1-6)

본문에서 요셉의 성실한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까? 말씀을 보시면 그런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요셉이 열심히 맡은 일을 해내고 성실하게 일해서 주인의 칭찬을 받고 궂은일이든 힘든 일이든 가리지 않고 충성스럽게 일하는 모습,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 속으로 그리고 있는 요셉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셉이 성실하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본문을 보면 정작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본문이 무엇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6절까지의 말씀은 같은 방식으로 다시 20절에서 반복이 됩니다. 39장의 처음과 마지막이 같은 내용인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래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요셉은 주인에게 은혜를 입고 더 큰 책임을 맡게 됩니다. 여기서 요셉이 어떻게 주인을 섬겼는지, 일처리를 얼마나 지혜롭게 했는지, 그가 한 일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본문에 그런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고, 주인에게 은혜를 입었고, 더 큰 책임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요셉이 일을 열심히 잘 했기 때문인가요? 요셉이 똑똑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요셉이 잘 생기고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요셉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형통은 요셉이 한 일에 대한 결과가 아닙니다. 요셉의 자질이나 요셉의 어떠함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에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위해서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고 보디발의 모든 소유에 그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이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간섭하지 않은 것입니다. 요셉이 성실했기 때문에 그가 형통한 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일을 잘 했기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번성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요셉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요셉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했는데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셉은 성실하게 일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은 이 사건의 주체가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가 되십니다.

여기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인생을 열심히 살 수 있고 성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돕고 정직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참된 목적과 의미를 모릅니다.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에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비슷하게 보여도 그 시작부터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의 선하신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삽니다. 그래서 인생을 사는 목적과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은 주의 것! 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대해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분의 목적대로 우리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이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보디발도 알 수 있는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보디발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디발의 입장에서 특별할 것 없는 히브리 소년을 종으로 구입했는데, 이 종이 우리 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좋은 일만 생깁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성공적이고 좋은 결과를 거둡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셉이 섬기는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을 위해서 눈에 보이는 많은 결과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주인의 총애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 결과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생기는 의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런 놀라운 결과가 있는데,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도 함께 하시는데, 왜 우리에게는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넘치게 부어주셔서 우리가 하는 일마다 다 잘되고 성공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회사에서 맡은 프로젝트마다 큰 성과를 거두고, 가게를 열면 손님들이 모여들고, 내가 손을 대는 곳마다 좋은 일이 생깁니다. 앨범을 내고 책을 출판하면 대박이 납니다. 설교를 할 때마다 사람들이 큰 감동으로 울면서 난리 나고, 그러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대로 일을 이루어가고 계시기에 하나님 뜻에 합당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에 요셉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보디발이 잘되어서 그 집에 복이 넘치기를 원했을까요? 요셉은 그 집에서 종으로 인정받아 잘 사는 것을 원했을까요? 그것보다 자유의 몸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더 원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시면서 그가 하는 일에 복을 주시는데 정작 그의 억울함을 해결하시고 그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과 선하신 뜻대로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아직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까지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모든 것이 아름답고 완벽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면, 요셉은 성실합니까? 네, 다만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셉의 성실함을 이어지는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성실함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6절 끝에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라는 언급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옛적에 요셉의 조상들에게 있었던 어려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라와 리브가 역시 빼어난 용모를 가졌기 때문에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오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아름다운 아내를 이방 왕들에게 빼앗길 뻔했던 겁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표현으로 이번에는 요셉을 주인의 아내가 노리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유혹은 요셉이 좀 살만해졌을 때, 이제 좀 괜찮아졌다고 한 숨 돌릴 수 있을 때 찾아왔습니다.

혈기왕성한 십대 청년에게 이 일이 얼마나 큰 유혹이 되었을까요?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상황에서 이 여인에 대해서 충분히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주인의 아내이기에 요셉이 마냥 거절하기에도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청하며 계속해서 노골적으로 요셉에게 매달립니다.

지금 보기에 누가 노예인 것 같습니까? 노예 신분으로 있는 요셉보다 이 여인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 노예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서 죄를 좇아 살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요셉은 날마다 이런 강력한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 유혹에 대해서 요셉은 지혜롭고 간단한 방법으로 대처합니다. 그것은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않는 것입니다. 요셉은 유혹이 될 수 있는 기회조차 만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차단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유혹은 뿌리를 내리며 자라기 전에 그 시작부터 잘라야 합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유혹 앞에서 굳건히 서 있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요셉처럼 유혹에 대해서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8-9)

요셉은 왜 이 여인의 요구를 거절했습니까? 큰 유혹이 되었을 텐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습니까? 요셉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랬을까요? 너무 들러붙으니까 부담스러워서 도망갔을까요? 요셉이 거절한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성실함을 볼 수 있습니다. 유혹에 넘어가 죄를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을 깨는 일입니다. 요셉은 이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성실한가? 라는 오늘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성실했습니다. 요셉은 단순히 맡은 일에 대해 성실한 것보다 먼저 하나님께 성실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성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가 맡겨진 일만 성실하게 잘해도 많은 문제가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는 자로서 단지 그것이 목표가 되고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일에 대한 성실함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성실하지 못하면서 일에 대해서는 성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성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성실하다면 일에 대한 성실함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이 우리로 하여금 일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일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일처리에 있어서 서툰 면이 있을 수 있고 가진 은사와 재능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은 삶의 태도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을 인격적인 자질로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을 때에 그냥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에 대해서 성실하도록 계속 훈련하면서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하나님께 성실하지 못하면 우리는 일을 하면서 불평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시기하며 미워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일할 수 있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에 대해서 성실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해서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죄를 가볍게 여기고 쉽게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사람을 의식함으로 그럴 듯하게 겉만을 꾸밀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성실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실패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성실하다면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으로 살아갈 때,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겉으로 보기에 별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비슷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 전혀 다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성실할 수 있을까요? 요셉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을 지켰습니까? 그 비결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은 그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유혹의 순간에도 그것을 기억하고 유혹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성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11)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 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둘만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곳에는 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함께 계셨습니다.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 큰 악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곳에서 내가 어떻게 이 여인과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갈 때,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을 지킬 수 있습니다. 죄를 미워하고 유혹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으로 살아갈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성실하다고 해서 그 즉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장에 좋은 결과를 거두고 상황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요셉의 경우처럼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상황이 나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을 포기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게 될까요? 유혹에 굴복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더 심각한 결과를 얻게 되지 않을까요? 조금만 더 멀리 더 나중을 생각하면, 무엇이 정말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선택할 경우 당장의 만족과 유익이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감당해야 할 죄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죄가 일시적인 만족을 줄지는 모르지만, 죄는 항상 인생을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듭니다. 죄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만족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시 동안의 달콤함을 주고 나서 인생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요셉이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을 포기했다면 그는 실패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과 하나님이 주신 꿈과 계획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에 대해서 성실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성공했습니다. 비록 그 대가로 요셉의 인생은 감옥에까지 더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했지만, 그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겁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겁니다.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일까요? 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며 어려움이 눈앞에 훤히 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때 그것을 후회 없는 선택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을 지키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순간적인 즐거움보다 일시적인 만족보다 더 영구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억함으로 죄의 유혹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면서 경험하는 어려운 일들, 힘든 순간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고난이 하나님이 없는 풍요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헤아려 주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아시고 그 성실함에 대해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때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에 대한 성실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