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
본문 : 베드로전서 5장 1~4절
설교자 : 조정의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오늘 본문은 특별한 대상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바로 장로들입니다. 이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할 때, 제 앞에 큰 거울을 두고 저 자신에게 해야 하는 설교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성도님들이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기에 많은 고민이 되는 본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처음으로 말씀에 영감을 주시고 기록하셨을 때 그 대상이 소아시아 성도였고 교회에서 함께 읽혀졌을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가 이 진리를 알기 원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도 이 말씀이 들려질 때 장로들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유익을 줄 것이라 믿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로의 모습이 어떠한가, 성도들이 어떻게 이를 도울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원하고, 나아가 가정의 영적인 목자인 아버지들에게도 이 말씀이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세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권고하는 사람과 그 대상’, ‘권고의 내용’, ‘그 권고에 순종했을 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권고하는 사람과 그 대상(1)
그런데 왜 갑자기 장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요? 본문이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앞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많은 고난이 있으나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해서 장차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미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되었습니다(겔 6).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마땅히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하는데 그들 중 장로들에 대해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고난의 삶 가운데 장로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지, 어떻게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는 여러 교회가 있었고 각 교회들마다 복수의 장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이라는 구절로 보아 이들은 교회의 지체 중에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서는 “장로”라고 되어 있고 2절에서는 “양 무리를 치는 자”라고 말하는데 이는 ‘감독’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로이든 감독이든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교회마다 호칭에 대해 이견들이 있는데 서신서들을 보면 장로, 감독, 목사가 모두 동일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하나님의 사도이고, 그 중에서도 특별한 수제자였으니 내 말을 들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라고 말합니다. 자신 역시 동일한 사람이니 그 어려움을 알고 겪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그는 장로에 대해 권고하면서 자신에 대해 다시 소개합니다. 당시 장로들에게는 고난 중에서 살아있는 소망이 필요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나도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을 지켜봤다, 그분이 잃어버린 양을 돌보시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권세로 말씀을 전파했지만 많은 이들이 굳은 마음으로 거절했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고 배고프셨고 피곤한 중에 양을 이끄셨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결국 그분을 죽였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승천하시고 돌아오시리라는 약속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에 다시 참여할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나도 당신들과 동일한 장로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당한 모든 고난을 목격했고 그분이 입으신 영광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분의 모든 일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이 권고의 말을 잘 들이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권고의 내용(2)
권고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 여기서 ‘치라’는 말은 돌보고 먹이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3번이나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그러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들이 해야 하는 역할은 이것입니다. 집사의 자격과 장로의 자격은 거의 비슷한데 장로에게는 하나가 더 추가됩니다. 바로 ‘말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양을 먹이는 것이 바로 이 가르침과 관계 있습니다. 설교나 성경공부 등 공적인 가르침으로 양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상담으로 양을 먹일 수 있습니다. 양으로 바른 길을 가게 하고 위로하는 것, 때로는 징계하는 것이 바로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장로가 하는 일은 단순히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 떨어져 있는 것, 연약해져 있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입니다. 또한 성도들을 잘못된 가르침과 거짓교사들, 세상의 문화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장로들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헬라인 과부들이 소외되었을 때 일꾼들 중 7명을 세워 그들을 돕게 하고 자신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장로들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라는 말씀은 참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큰 도전이 됩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 하나님의 양들이기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저에게 맡겨주신 분들이기에 어깨가 무겁습니다.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히 13:17). 하나님께서 책임을 부여하셨기에 맡겨진 자, 청지기처럼 양들을 돌볼 책임이 장로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라는 사실은 위로가 됩니다. 최종 책임이 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책임을 장로들에게만 맡기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로들은 양을 돌보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하나님이 꼭 장로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0-21). 히브리서 기자는 양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알았습니다. 모든 장로가 매일 해야 하는 기도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고 날마다 거룩하고 온전하게 하시며, 영광의 날까지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입니다.
양들을 치라는 명령 뒤에는 3번에 걸쳐 ‘이렇게 하지 말고 저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장로의 YES or NO’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라면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동기에 있어서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억지로 한다는 것은 의무감을 말하는 것이고 ‘내가 장로인데 해야지’라는 내적인 강요나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신 소명 가운데 자발적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장로는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기쁘고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모든 장로들이 주님과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식어지고 의무감으로 바뀔 때가 많습니다. 이는 부부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신혼부부가 결혼해서 ‘결혼했으니 그냥 살아야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에 겨워 어떻게 살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지 10-20년이 넘으신 분들은 그러한 마음을 잘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로들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양들을 돌보고 싶은 소명이 뜨겁게 차오르지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억지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장로들이 억지로 일하게 될까요?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히 13:17). 이 일을 하는 것이 근심이 되면 자발적으로 하기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자신이 근심한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범죄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적으로 불순종할 때 장로는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근심이 장로들을 억지로 일하게 합니다.
또한 장로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모든 것이 나 때문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생각할 때 일이 버거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 금방 바닥이 나게 됩니다. 버거워지고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그 일 자체가 자신을 소진하는 일입니다. 어디에서 자신을 충전해야 할까요. 장로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채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두드러진 특징은 바쁘신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시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장로들에게도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시간, 영적인 충전이 필요합니다. 또한 친밀한 교제가 필요하고 육체적인 휴식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충분히 채워져서 일꾼들이 억지로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목적에 있어서,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 하지 말고 기꺼이 해야 합니다. 장로의 필요를 교회에서 공급하는 것은 성경이 지지하는 것이지만, 부정적인 이득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인 인기나 명성을 얻기 위해 일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장로의 자격에 대해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않는 자”(딛 1:7)라고 말하고 있고, 거짓교사에 대한 경고에서는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 도다”(딛 1:11)고 말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이 있는데 이들 중에 더러운 이득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정부패가 교회 안에 있고 사람을 치유해주겠다며 돈을 받고 직분을 준다고 돈을 받습니다. 참된 장로는 이런 일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정상적으로 세워진 선한 일꾼들이 ‘교회에서 돈을 벌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시작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을 받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에게는 아굴의 기도와 같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돈을 더 얻고자 하지 않도록,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좋은 물건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돈에 대한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부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게 해달라는 아굴의 기도가 목자들에게도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장로의 일을 “기꺼이 하라”고 말하고, 사도 바울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모든 일꾼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나를 먹이고 입히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또한 베드로는 방법에 있어서,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말합니다. 주장하는 자세는 강제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때로는 장로가 감정적인 압박을 할 수 있고 힘을 과시할 수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정치적인 힘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캇 멕나이트라는 사람은 ‘돈이 일만 악을 뿌리라면 권력욕은 뿌리가 자라는 토양’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장로들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격이 잘 뒷받침되지 않는 장로는 권위를 남용하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장로는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권위를 합당하지 않을 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휘두르는 것입니다.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양을 치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제가 교회 부친님들, 모친님들보다 더 많은 경험을 했겠습니까? 직장에서 일하는 분야를 제가 더 잘 알겠습니까. 이곳에 계신 분들보다 덜 배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자리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저의 경험을 통한 조언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저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거절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권위)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2-13). 바울은 디모데에게 귄위를 지켜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 일을 할 때 이론적인 말 뿐이 아니라 저의 모든 삶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저 자신에게 비취지고 그것이 성도들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성적으로 범죄하면서 성적인 거룩함을 말하거나, 분란 가운데 있으면서 화합을 가르친다면 말씀의 권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는지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결과
장로들이 성실하게 일할 때, 하나님의 양들을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본이 되는 삶으로 가르칠 때, 목자장이 되신 분께서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때 시들지 않는 관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당시에는 풀이나 꽃으로 만들어진 면류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들어버립니다. 당시 전투에서 싸워 공을 세운 사람에게 황금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금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꽃도 풀도 황금도,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세월이 흘러 가면서 시들고 쇠하고 썩어집니다. 그러나 장로들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섬길 때 전혀 사라지지 않는 관을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는 어린양 앞에 장로들이 영광의 관을 쓰고 예수님께 예배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일했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높은 신분으로 삼으실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영광과 축복을 이어받을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5). 오늘 말씀은 특별히 장로들에게 전한 말씀이지만, 심판은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영원한 삶에 영향을 줍니다. 장로이신 분들이라면 오늘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이 일을 억지로 하는가, 자발적으로 하는가, 더러운 이득을 취하는가, 권위를 남용하는가, 본이 되는 삶으로 가르치고 있는가, 하나님의 양 무리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가.
목자를 따르고 있는 양들은 우리의 목자는 이러한 자들인가, 또한 그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가정의 영적인 목자로 계시는 가장들은, 내가 가장으로서 나에게 맡겨주신 가족들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