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가장 위대한 겸손
본문 : 누가복음 9장 43~50절
설교자 : 최종혁

겸손은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장 위대한 겸손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겸손입니다. 43-45절에서는 그러한 가르침의 배경이 기록되어 있고, 48절까지 그 가르침이 나와 있고, 이후로는 그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나타나있습니다.

배경

이 사건은 지난 시간에 배웠던 말씀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그 놀라운 일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마 서로가 보고 들었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 그분이 그동안 행하셨던 많은 기적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모든 일들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제자들이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의 기대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로 전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비슷한 표현으로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라”는 말을 하셨었는데, 여기서는 좀 더 분명하게 이 말을 귀에 담아 두라, 넣어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속에 지금부터 하는 말을 깊이 새겨 두라는 말씀입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사람들이 하고 있는 칭찬의 말이나 놀라움의 말을 기억해 두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상관없이 자신이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약간의 언어유희를 사용하셨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털 깎는 자 앞의 잠잠한 양과 같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았습니다. 마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사람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먼저 제자인 가룟 유다에 의해 배신당하여 산헤드린에 넘겨졌습니다.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로마인들에 넘겼습니다. 당시 유대 지역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자신의 관할이 아니라며 헤롯에게 예수님을 넘겼지만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넘기고, 빌라도는 군병들의 손에 넘기고 군병들이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손에서 사람의 손으로 계속해서 넘겨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정확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셨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뜻대로 하고 있다 생각했겠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졌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이 상함 받는 것이었습니다(사 53:10). 아들은 그 손으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길 원하여 기꺼이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 길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51절에서는 굳게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실 것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제자들이 처음 듣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광의 메시아와 고난은 그들에게 물과 기름 같은 것이었고, 빛과 어둠, 선과 악과 같아서 함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그들에게는 이 시점까지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숨기셨습니다. 그들은 부활 이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때가 되어서는 예수님께서 자세하게 모든 구약의 말씀을 설명해 주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이 말씀을 잘 듣고 마음에 새겨두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들도 이 말씀에 대해서 더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묻는 것을 두려워한 이유는 분명히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위엄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더 아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더 알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메시아가 그렇게 죽게 될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제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께 더 묻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베드로의 고백부터 이어진 하나의 사건이 마무리 되는 듯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46절부터 이어지는 사건의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놀라고 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다시 언급하십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묻기도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뭔가 조심스럽고 무거운 분위기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누가는 이런 장소와 시간의 변화를 언급하지 않아, 이어지는 사건의 의외성을 보여주며 제자들이 꼭 배워야할 가르침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가르침

“제자 중에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46절) 가버나움으로 오던 길에 제자들 사이에 변론이 생겼습니다. 논제는 ‘누가 크냐’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누가 크냐는 것이 논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에 담아두라고 강조하셨던 말씀을 담아 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이야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고, 어쨌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인데, 거기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논쟁의 대상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인 자신들 12명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데, 그 중에서도 누가 제일 높은 자리를 얻을 것인가가 이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들은 자신들이 얻게 될 영광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런 변론을 하고 있었을까요? 제자 중 일부만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 갔다왔다는 사실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때문에 놀랐던 사람들이 제자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쳐서 이런 질문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제자들은 어리석은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제자들이라면 무엇을 가지고 논쟁의 근거로 삼겠습니까? 누가 더 많은 이적을 행했는지를 가지고 싸웠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더 강력한 귀신을 쫓아냈는지 말했을 것입니다. 누가 더 예수님과 더 가까운지, 누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등을 서로 말했을지 모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뒤에서 조용히 웃으면서 나와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본 사람?”하며 거들먹거렸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건 말하지 말라고 하신건데…”하면서 말입니다. 서로 자신이 높다고, 가치있다고 어필했을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참된 제자의 모습과 비교해 보십시오. 거리가 멉니다. ‘자기 부인’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 자신을 드러내며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바로 ‘비교’입니다. 그들은 서로 자신이 ‘더’ 크다며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만은 비교를 좋아합니다. 그래야 어떻게든 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감사했던 내용을 보십시오. 저 죄인들, 세리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기가 나은 점을 열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기준에 초점을 맞췄다면 내가 잘한 것을 말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어떻게든 그런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교만은 나를 높이기 위해 비교합니다. 내가 더 나은 부분만 비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 양 강조합니다. 섬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섬기지 않는 사람을 판단하고, 말씀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렇게 나를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이런 일에 전문가입니다. 내가 이런 비교를 좋아한다면, 나에게 이런 교만의 모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비교를 좋아한다면 나에게 교만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만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분리와 배척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나와 다른 제자를 분리합니다. 그래야 내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분리하고 배척합니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결과는 논쟁, 다툼, 분쟁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것들의 원인으로 “싸우는 정욕”을 지목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교만입니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47절) 예수님께서 그들이 마음에 변론하고 계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설명없이 구체적인 예 하나를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어린 아이”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누구도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아이 하나를 데려 오셔서 바로 옆에 세우십니다. 다른 사건에서 보면 부모들이 어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았던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특히 아이들에 대해서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어린 아이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그러했습니다. 아이들은 일할 힘도 없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관심을 주고 보살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이래저래 귀찮은 존재, 하찮고 가치 없는 존재로 취급 받던 대상이 당시의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 어린 아이를 지금 자기 곁에 세우십니다. 제자들의 관심이 주목된 상태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48절) 영접하는 것은 환영하고 받아들여주는 것, 호의를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에 대해서 이렇게 합니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합니다. 그것이 교만한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비교하는 것입니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영접하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 속에 어린 아이는 영접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린 아이가 나를 영접해야 합니다. 당연히 하찮게 여길 수 있고 내 마음대로 쫓아낼 수 있는 어린 아이를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 환영하고 호의를 베푸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그렇게 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자는, 다른 이유가 아닌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곧 예수님을 영접한 것과 같습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곧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매우 분명한 메시지를 말과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크신 분’이, 그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작은 이’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은 이를 영접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자신과 어린 아이를 동일시 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제자들은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자신의 나은 점을 말하면서 서로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더 높은 자리를 주실 것이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더 큰 자는 없다, 모두가 큰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단 이것 자체를 교만한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큰 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더 큰 자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다같이 1억을 버는 것보다, 50만원을 버는 사람들 중에서 100만원 버는 사람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내 자식이 100점을 맞아 오는 것은 좋지만, 옆집 아이도 100점을 맞으면 별 감흥이 없습니다. 내 자식이 80점을 맞더라도 옆집 아이보다 더 높은 점수면 그게 더 좋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교만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큰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최고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낮출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된다면 우리는 큰 자가 됩니다. 지금 상황에서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는 바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자입니다. “누구든지”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사람이 큰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큰 사람일까요? 한 나라의 대통령을 영접하는 사람이 큰 사람일까요, 시장을 영접하는 사람이 큰 사람일까요? 더 높은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우리 개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낮은 아이를 영접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라고 하심으로서 그 상대적인 개념을 부인하셨습니다. 그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꼭 어린아이를 영접해야지만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누가 되었든지 자신을 낮게 여기고 그를 영접할 수 있다면 그가 큰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막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누구와 함께 있든지 내가 낮은 자로, 섬기는 자로 있다면 하나님은 나를 큰 자로 보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린 아이를 영접하든, 돈이 많은 사람을 영접하든, 지위가 높은 사람을 영접하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와 함께 있든 섬기는 자로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동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자신을 낮출 수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영접할 수도 있습니다. 나이 때문에, 돈 때문에, 지위 때문에, 혹은 어떤 특별한 나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교하여 나를 낮추는 것 자체가 교만의 증거입니다. 비교하면서 낮춰야 할 때 낮추는 것은 겸손은 아닙니다. 겸손은 비교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이라 해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한 자는 자기를 높일 수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자신을 어떻게 높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십자가를 앞두시고도 가르치셨던 가장 핵심이 되는 교훈입니다. 사실, 그것이 제자의 삶이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신앙입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가실 길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 언급하신 제자가 따라야 할 길에서 핵심은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것들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나의 가장 큰 적이 되는 것이 제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한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당연히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뜻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난 자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새롭게 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궁극적인 마음의 소원이 달라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천성적으로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이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계속되는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나만 그럴 뿐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도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맞고 더욱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우리의 죄악된 몸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에는 하나님을 향해 높아진 마음, 즉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에는 이 교만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거듭난 자들에게도 여전히 이 교만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속되는 교만과의 싸움입니다. 우리 속에서 교만을 덜어내고 대신 겸손을 채워 넣는 과정이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입니다. 내 삶의 곳곳에 숨어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교만을 찾아내어 그것을 겸손으로 바꾸는 일, 그것이 영적 성숙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제자의 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반응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요한은 어떤 일이 생각났습니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순수하게 자신들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를 알고 싶어서 물은 것일 수도 있고, ‘이건 괜찮지 않습니까?’와 같은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요한은 그들이 영접하지 않았던 사람에 대한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말을 가만히 보면 그 안에 앞서 언급했던 교만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포함한 제자들을 ‘우리’라고 말하며 특별한 무리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아서 그가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분리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일에는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그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했던 일과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그도 예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가 제자들과 함께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한 뜻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께 왜 안식일에 사람을 낫게 하느냐고 물었던 바리새인들과 비슷합니다. 그들에게는 한 영혼보다 그들의 율법이 우선이었습니다. 여기 제자들도 한 영혼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 받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단지 이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에 초점이 있는 말이 아니라 “우리”에 초점이 있는 말입니다. 단지 제자들과 ‘함께’ 따르지 않은 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무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50절)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하는 일을 하게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으면 너희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너희를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면 단지 너희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가 행하는 하나님의 일을 금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에 물든 제자들의 생각은 좁아져 있었습니다.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고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느새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23에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라고 비슷한 듯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겉보기에는 부딪치는 말씀인 듯 하지만 이 두 말씀은 서로 보완적입니다. 먼저 모든 사람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든지 예수님을 반대하든지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예수님 편이 아니면 사탄의 편입니다. 이것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반대하는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편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라는 목적은 동일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각할 것이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다”라는 말씀입니다. 즉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나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한다고 문제될 것 없습니다. 꼭 나와 함께 해야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겸손입니다.

가장 위대한 겸손

겸손은 위대합니다. 겸손이 하는 일을 보십시오. 겸손은 죄의 힘을 무력화시킵니다. 죄로 인한 잘못된 결과를 바로 잡습니다. 교만으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교만이 만들어낸 상처를 치유하고 교만이 만들어낸 수많은 분리와 단절 사이에 다리를 놓아 다시 하나 되게 합니다. 자기 유익을 추구하던 사람이 남의 유익을 추구하게 하는 것, 섬김 받기만 좋아하던 사람이 섬기기를 원하게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나는 어차피 이런 사람이니까 당신이 나를 인정하고 받아 줘야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변하려고 하는 것,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렇게 하여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위대한 가치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추구해야 할 위대한 가치입니다.

이 위대한 겸손의 열매를 우리가 맺을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가장 위대한 겸손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첫 단락에 있습니다. 그곳에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말이 있고, 가장 겸손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며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본 것은 하나님의 위엄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가장 높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누구도 예수님보다 높지 않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예수님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피조물의 모습을 입으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낮아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 낮은 곳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손에 넘겨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죽음을 당할 십자가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그보다 낮은 자리까지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누가 그렇게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우린 우리의 죄를 담당할 뿐이지만, 예수님은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간 것, 가장 위대한 겸손입니다.

이 위대한 겸손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위대한 겸손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십니까? 구원자라 부르십니까? 그분을 눈으로 보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십시오.

빌 2:12-16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겸손이 나의 구원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게 하려고, 우리로 기쁘신 뜻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해,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서 그 겸손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위대하신 분을 세상에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구역 모임을 위한 질문

  1. 제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교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겸손은 무엇입니까?
  3. 겸손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당신은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따라 겸손하기를 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