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성, 하나님의 사람들

본문: 시편 87편

설교자: 최종혁

오늘 함께 살펴볼 시편 87편에서 도시에 대한 자부심을 볼 수 있다. 도시는 1-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인 ‘시온’, 즉 예루살렘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영광스러운 도시다. 그리고 4-6절에서는 그 시온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시온에 등록하신 시온의 시민들로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7절은 이들의 자부심과 기쁨을 말한다.

시편 87편은 ‘하나님의 성’인 시온에 대한 찬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편은 시온이 온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날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를 담고 있지만, 또한 구약에는 감춰졌던 교회에 대한 기대가 있고, 궁극적으로는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적 기대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짧은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함께 살펴보자.

특별한 도시, 시온(1-3절)

87:1–3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2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3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시온은 본래 예루살렘에 있는 해발 약 790m정도의 산을 지칭한다. 본래는 여부스 족속이 거주했던 곳인데 다윗이 점령하여 성을 쌓은 후로 다윗 성이라 불렸다. 다윗은 이곳으로 언약궤를 옮겨왔고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시온은 예루살렘 전체나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다. 예루살렘이 일반적인 표현이라면 시온은 좀 더 종교적이고 영적인 측면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1-3절은 시온의 특별함을 세 가지로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그 터전을 세우셨다는데 있다. 1절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터전이 성산에 있다고 말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여부스 사람들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고 다윗이 그 땅을 차지하고 성을 세웠지만, 모든 것을 계획하고 결정한 건축가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어쩌다가 다윗이 차지한 성이 시온이라서 하나님께서 시온을 사용하셨던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결정하셨다. 그 일을 다윗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실행한 것 뿐이다. 사실 다윗 이전 아브라함 때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셨던 장소인 모리아산도 바로 이곳이다. 하나님은 시온을 인류 구속사의 중심지로 처음부터 계획하고 계셨고 다윗 때부터 그것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 터전은 성산에 있었다. 성산은 “거룩한 산들”이라는 복수형으로 되어있다. 시온, 즉 예루살렘을 둘러싼 많은 언덕이나 산들을 의미하는 표현일 것이다. 많은 산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영적인 터전으로 삼으신 곳이 바로 시온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시온에 자신의 처소를 삼으시고 특별한 임재를 두셨다.

이것은 곧 시온의 둘째 특별함으로 이어진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이라는 것이다. 2절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성“문”이 종종 언급되는데 문자적으로 출입구를 의미할 때도 있지만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활동을 의미할 때가 많다. 성문은 사람들이 항상 모이는 장소로서 모든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문에 앉아 있다는 표현’을 보면 우리는 구걸하는 것을 먼저 떠올릴리게 되지만 실제로는 관직을 가진 사람이 공무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문’ 자체가 도시나 혹은 그 안의 시민들을 의미할 수 있고, 여기 “시온의 문들”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선택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을 ‘더’ 사랑하셨다. 야곱(이스라엘 민족)이 거주했던 모든 땅을 하나님은 다른 땅들보다 더 사랑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시온을 가장 사랑하셨다는 의미다. 그렇게 하기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한때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었던 장소들이 있었다. 여호수아와 사사시대 초반의 ‘길갈’이 그러했다. 그 후에 사무엘 때까지는 ‘실로’가 그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벧엘’이나 ‘놉’, ‘기브온’이 그런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도시들은 일시적이었을 뿐, 예루살렘(시온)이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로 선택되었다.

132:13–1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4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하나님은 시온을 사랑하셔서 그곳에 성전을 짓게 하시고 특별한 임재를 나타내셨다. 영원히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시온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나아왔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시온의 문은 백성들을 위해서는 항상 열려 있었고 대적들에게는 닫혀 있었다.

하나님은 그런 영광스러운 장소로서 시온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시온이 그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발달된 도시들을 보시면서 그 중에서 가장 괜찮은 도시로서 시온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사랑하기로 선택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터전을 놓으시고 사랑하신 시온 성은 다윗 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이다. 따라서 그 성에 대해서는 마땅히 영광스러운 말이 전해진다. 이것이 셋째 시온의 특별함이다.

앞서 읽었던 시편 132편의 말씀도 이런 영광스러운 말 중 하나일 것이다. 시편 48편에도 그런 말이 기록되어 있다.

48:2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시온을 찬미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시온에서 일어난 모든 영광스러운 일들에 대한 말들도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의 옛 예배당 건물을 보면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저 좁은 건물에서 얼마나 열심히 모이기에 힘썼었는지를 말한다. 차도 없던 때 긴 시간을 당연한듯이 걸어서 주일이든 수요일이든 금요일이든 모였었다. 나눠서 공부하고 교제할 공간이 없어서 가까운 곳에 살던 성도들은 무조건 자기 집을 개방해야 했었다. 주변 성도의 집들이 모두 교회 사택처럼 사용되었던 것이다. 지금보면 너무 좁고 보잘것 없던 그 건물에서 우리는 마음을 모아 하나님을 예배했고 전도하기에 힘썼다. 의 좋은 형제 이야기처럼 서로가 서로를 섬겼다. 겉보기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건물이지만 그것을 보며 밤을 새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 수많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가 다른 건물로 이사 가게되면 지금 이 건물을 보면서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시온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온을 보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억하며 이야기했을 것이다. 다윗의 열정적인 예배를 기억했을 것이다. 솔로몬의 웅장하고 감동적이었던 성전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드려진 수많은 예배들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기억했을 것이다. 시온을 아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함께 영광스러운 말을 했을 것이다.

이것이 시온의 특별함이다. 정리하면 시온의 특별함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시온은 하나님이 그 기초를 놓으셨기에 특별하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에 특별하다. 그리고 시온은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특별하다. 하나님이 그 특별함의 원천이고 그렇기에 시온은 하나님의 성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시온에 대한 자부심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시온에 대한 자부심은 곧 시온의 특별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시온이 특별한지만 오해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자부심은 정당한 것이다. 그들이 시온을 특별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게도 거의 비슷하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18). 예수님께서 교회를 터를 놓으신 것이다. 또한 교회를 예수님은 사랑하셨다(엡 5:25).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엡 1:4).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엡 2:21-22). 교회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다. 시온의 특별함이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특별하게 하셨던 것처럼 교회를 특별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한다.

주의할 것은, 이것이 의미없는 혹은 왜곡된 ‘부심’이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시온에 대한 자부심은 결국 시온부심이 되어버렸다. 부심에 대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것이 ‘선민의식’과도 일맥상통한다는 말이 있었다. 사실 그렇다. 유대인들은 시온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내가 선택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여기에 함께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를 내가 선택 받았다는 말로 바꾼 것 뿐이지만, 그 결과는 심각하게 왜곡되었던 것이다.

교회도 비슷한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면 잃어버린 영혼들을 죄인 취급하거나 뭔가 부족한 사람처럼 대할 수도 있다. 진리도 모르는 것들이라며 얕잡아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타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더욱 그럴 수 있다. 성경이 그들을 ‘어리석다’고 표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을 계몽해줄 수 있는 대단한 존재처럼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내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단지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특별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고 하나님은 원하는 누구든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침례 요한의 외침처럼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으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졌다는 의미이지, 그전에 우리가 먼저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자부심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예배, 그리고 하나님을 전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다시 이스라엘의 경우로 돌아와보자. 1-3절의 말씀을 그들은 매우 당연하게 그리고 감사하며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에는 충격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앞서 말한 ‘나만 특별하다’는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어지는 말씀은 불경하게 들렸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그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신성모독자이나 배교자로 낙인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으로 누가 시온의 시민 중에 있을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이 역시 ‘영광스러운 말’ 중 하나이다.

시온의 시민들(4-7절)

87:4 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라합은 애굽을 말한다. 애굽과 바벨론은 거대한 세력으로서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남쪽과 동쪽에 자리했다. 블레셋과 두로는 거대한 제국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서쪽과 북쪽에 가까이 자리하여 이스라엘에게 계속되는 위협을 가했던 나라들이다. 구스는 에디오피아인데 종종 먼 나라를 대표하는 나라로서 등장한다.

공통적인 것은 모두 이방 나라라는 것이고, 거기에 더하여 이스라엘이 우호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나라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이 나라들은 우리와 함께할 수 없어라고 생각할만한 대표적인 나라들이 여기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가 있을 것이고 그들 중에 시온에서 난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인정하며 믿고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들도 “거기서 났다”고, 즉 시온의 시민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성인 시온의 시민,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장면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부연설명한다.

87:5–6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6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시온의 모습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곳에 두신 것은 터를 놓는 작업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일을 계속해서 하셨지만, 그것은 완성된 모습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에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두실 것이다.

여기 5-6절의 표현에서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개인이 언급된다는 것이다. 5절의 “이 사람, 저 사람”이라는 표현이 그렇고 6절의 “이 사람”도 그렇다. 민족을 통틀어서 이 민족이 시온에서 났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상관없이 각 개인이 시온에서 났다고 말한다. 민족들을 시온의 시민으로 등록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 때도 수를 세시며 한 사람씩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방인이든 본래 시온의 시민이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가족(시온의 시민)으로 공적으로 기록하실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때 참된 기쁨의 예배가 드려질 것이다.

87:7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여기 “근원”은 ‘샘’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모든 좋은 것을 의미한다. 기쁨의 원천, 복의 근원이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시온의 시민들은 기쁨 가운데 모든 복이 다른 곳이 아닌 시온에서 흘러나온다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시온이 복의 근원이 될까?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모든 민족이 기뻐하며 뛰어노는 참된 예배가 이 땅 위에서 벌어지게 될 것이다.

이는 정말로 누군가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물론 이 시편이 기록될 당시에도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방인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차별 없이 하나님 성의 시민들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도 약속하셨지만 동시에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창 12:2-3).

다윗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다. 시편 86편에서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기억하고 찬양하면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져야할 예배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86:8–10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9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 10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성경에서 종종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거나 다른 거짓 신들과 구분하기 위함이지 다른 여러 하나님이 있는데 그 중 이스라엘에 속한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존재와 다르시고 따라서 하나님과 같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도 없다.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분이 없다. 모든 참된 예배의 유일한 대상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와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이상한 일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선지서에서도 이런 예언의 말씀을 확인할 수 있다.

19:24–25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2:10–11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11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이것이 마땅한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시온에 자기 임재를 두셨던 목적이 바로 그들을 통해서 열방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 모습을 열방의 민족들이 와서 보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게 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잃은 이스라엘은 한편으로는 이방인들을 무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이 되어갔다.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을 보며 어떤 특별함도 느낄 수 없었고, 그렇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시온에서 쫓겨나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스러운 시온의 모습을 그들은 경험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희망도 없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실 때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시온의 모습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함께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시편 87편의 말씀은 그 성취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그 즐거움을 조금은 맛볼 수 있다. 바로 교회를 통해서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의 모습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이미 민족의 장벽이 무너지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2:5–11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일어났던 이 놀라운 일은 예언의 성취일 뿐 아니라, 교회 안에는 민족을 포함한 어떤 차별적 장벽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시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어떤 민족이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시온에서 난 자로서 시온의 시민이라고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자들은 누구든 교회에 더해지며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된다.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렇게 거듭난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민족을 포함한 그 어떤 장벽도 무너뜨리고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다가올 기쁨을 지금 먼저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여기서도 교회는 다시 한번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을 무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방인화 되어갔던 것처럼, 교회도 세상을 무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세속화 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복의 근원에서 멀어지면 기쁨도 멀어진다. 우리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나 각자 삶에서 드리는 예배나 모두 허울만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저 모여있을 뿐 세상 가운데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선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장차 올 하나님의 성을 바라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이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다면, 누구도 그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하나님의 성에 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범했던 큰 죄였고, 오늘날 교회가 반드시 피해야하는 죄이기도 하다.

도전

시편 87편을 통해 우리가 자신에게 던져야할 질문이 몇 가지 있다.

1. 나는 진정 거듭남으로 하나님 성의 시민이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시온을 선택하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처럼, 내가 거듭나는 것도 내가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혈통으로도 안되고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된다. 하나님께서 하셔야할 일이다. 그러니 낮아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2. 나는 하나님 성의 시민으로서 합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합당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감사하고 예배하고, 무엇보다 그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대단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자부심이 나에게 있는지 질문해 보라.

3. 나는 하나님 성의 시민으로서 이 땅의 시민과 다르게 살고 있는가? “나는 너와 달라”라는 태도로 사는 것은 합당치 않지만,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하다.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같아지는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발꿈치를 들어서라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게 해야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으로 할 수 있다. 주일에 교회 가는 것만 다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직장의 동료나 부하, 상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야 한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야 한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로 계셨던 것처럼 어디에서든 섬기는 자로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은 교회를 알고 싶을 것이고, 교회를 사랑하고 선택하신 주님을 알고 싶게 될 것이다. 다르게 살아야 한다.

히브리서 11:10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우리도 아직은 그 온전한 성에 이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성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