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비밀을 먹는 자
본문: 요한계시록 10장
설교자: 조정의
‘막간’은 연극의 막과 막 사이를 의미하는 데, 한 단락이 끝나고 다음 단락이 시작되기 전까지 요한이 본 환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본문은 담고 있다(10:1~11:14). 끝나는 단락은 여섯째 나팔 심판(11: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니”), 곧 시작될 단락은 일곱째 나팔 심판이다(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일곱인 심판 때도 막간이 있었다. 6장에서 어린양은 여섯째 인 심판까지 쉼 없이 땅에 쏟으셨다. 그리고 막간인 7장에서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유대인 종들 144,000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 구원받을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통해 예배받으셨다. 이처럼 막간의 내용은 땅에 쏟아질 심판보다는 하나님 나라 백성을 위한 메시지에 가깝다. 대환난 시대, 하나님이 무서운 진노를 악인에게 쏟으시면서도, 때마다 자기 백성을 위한 계획을 알리심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전하신다.
“하나님의 비밀을 먹는 자”라는 제목은 본문에 기록된 두루마리에 하나님의 비밀이 기록되어 있고, 요한이 그것을 “갖다 먹어 버리라”는 명령에 따라 먹어 버리는 장면에서 나왔다. 요한이 막간에 본(내가 보니, 1절) 장면을 통해 말세에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 것이 합당한 지 살펴보기를 원한다. 1) 하나님 비밀은 전부 알 순 없다, 2) 하나님 계획은 지체됨이 없다, 3) 하나님 말씀을 먹고 선포하라.
1. 하나님 비밀을 전부 알순 없다(1-4절)
요한이 막간에 처음 본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였다(1절). 혹자는 구름을 입고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다는 묘사에 적합한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요한은 그 정체를 다른 천사라고 분명히 밝혔다(ἄλλος: 같은 종류의 다른 대상). 성경은 예수님을 천사라 부른 적이 없고, 6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예수님께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추측한 이유는 그만큼 이 천사가 대단히 영광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이 나타날 때 동반된 구름, 견고한 임재와 공의로운 심판을 상징한 불기둥, 해 같이 빛나는 영광스러운 얼굴, 머리를 두른 자비로운 무지개빛 영광. 일반적인 천사보다 뛰어난 위엄과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진 천사다. 그래서 요한은 이 천사를 가리켜 “힘센 다른 천사”라고 불렀다.
계시록 5장에도 “힘 있는 천사”가 나온다. 이 천사의 대단함은 모두 하나님의 비밀과 관련이 있다. 5장에선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한 분이 누구인가 큰 음성으로 물었고, 10장에선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2절). 이 두루마리는 5장의 두루마리와 같은 것으로 그 인을 떼기 합당하신 유일한 권세자, 어린양 예수님께서 인을 뗀 상태, 곧 펴 놓인 상태가 되었다(완료). 이 두루마리에는 하늘과 땅과 바다 전체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무섭고 놀라운 심판 계획이 기록되어 있었다.
천사는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쳤다(2-3절). 무섭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가 외치는 하나님의 비밀이 밟고 있는 온 바다와 땅 전역에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천사가 외칠 때에 더 웅장한 소리가 합세했다. 일곱 우레 소리였다(3절). 성경에서 우레 소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된다. 특별히 시편 29편에서는 “여호와의 소리”가 일곱번 나오는데,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라고 노래한다(29:3).
일곱 우레는 확실히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냥 소리가 아니라 메시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라고 했다(4절).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4절). 기록한 것을 아무도 알 수 없도록 봉하라는 명령에 이어 아예 기록조차 하지 말라는 분명한 말씀이다.
참 흥미로운 말씀이다. 계시록은 주님께서 요한을 찾아와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됐다(1:19). 지금까지 요한은 주께서 환상으로 보여주신 계시, 하나님의 비밀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런데 기록되지 않은, 알려주지 않으신 비밀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가 기록하지 못하게 하신 비밀이 무엇인지 추측하지만, 가장 합당한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이다. 대 선지자 모세도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했고(신 29:29). 예수님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시기에 관하여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고 말씀하셨다(행 1:7).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지만, 사람이 감히 말해서는 안 될 내용이라고 했다(고후 12:4).
그러므로 종말을 바라보며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지 않으셨다. 감추어두신 뜻은 하나님께 속했다. 비밀은 비밀로 남겨두어야 한다. 다 아는 것처럼 자신과 남을 속이지 말라. 오늘날 기독교의 많은 종말에 관한 가르침이 이 원칙을 위배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계시록의 상징적 표현을 억측한다(베리칩). 세계의 군사적, 정치적 상황을 살피며 때와 시기를 계산한다(제3성전, 러시아-중국의 움직임). 제발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라. 당신의 동기가 아무리 순수해도 하나님의 비밀을 함부로 안다고 말하는 것은 사이비 사기꾼이 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2. 하나님 계획은 지체 됨이 없다(5-7절)
이어서 요한이 본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 힘센 천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비밀이 아니라 분명히 알 수 있는 진리를 선포했다. 그냥 큰 소리로 외친 것이 아니라 손 들고 맹세하며 외쳤다: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맹세하는 자세)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5-6절). 천사가 맹세한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에 속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종말에 만물에게 두신 그 뜻대로 만물에게 행하실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으시다. 천사의 맹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체하지 아니하리니”(6절). 무엇이 지체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εὐαγγελίζω)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7절)
개역 개정에서는 ‘(복음) 전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유앙겔리조를 풀어서 “전하신 복음”이라고 번역했지만, 우리말 성경처럼 “그분이 그분의 종들, 곧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종말에 관한 비밀이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란 말씀이다. 11절을 보면 그래서 하나님은 요한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 년 월 일 시가 정해졌다(9:15). 감추어진 뜻은 우리가 알 수 없더라도, 나타내신 뜻, 선지자를 통해 밝히 말씀하신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성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은 정확히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다(이스라엘의 시작과 회복, 제국의 부흥과 멸망, 예수 그리스도 관련 300개의 예언 성취).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자들의 예언, 기록된 하나님의 비밀도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어진다. 조금의 지체 없이.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세상을 거스르며 살면서 주를 위해 고난을 받으며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다.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계 6:10). 혹은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올 것이란 말씀을 불신하며 주의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벧후 3:9).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획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믿는 자들의 합당한 자세는 베드로가 말한 것과 같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2).
하나님이 종말을 계획하지 않으신 것처럼, 혹은 그 비밀을 알려주지 않으신 것처럼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원망하지 말라. 우린 끝을 알고 있다. 원수는 패배하고 우리는 승리한다. 세상에서 쌓아 올린 영광은 꽃처럼 순식간에 시들어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쌓은 영광은 말씀하신 그대로 영원히 빛날 것이다. 그러니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실 주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3. 하나님 말씀을 먹고 선포 하라(8-11절)
본문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이다. 하늘에서 나서 요한에게(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이렇게 말했다: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8절). 그래서 요한이 천사에게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했고, 그러자 천사가 아주 희한한 걸 요구했다: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9절).
구약시대 선지자 에스겔도 비슷한 것을 요구받았다. 입을 벌리고 하나님께서 손을 펴서 내미신 두루마리 책을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고 했다. 에스겔이 먹은 두루마리는 입에 꿀처럼 달았고 배와 창자를 채웠다(겔 2:8-3:3).
이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요한이 처음으로 환상을 보고 기록하는 관찰자 역할에서 벗어나 실제로 행동하고 보여주는 배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요한은 구경꾼이 아니라 수행자였다. 요한은 하늘 음성과 천사의 요청에 따라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렸고, 그러자 그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10절).
요한이 직접 보여준 행동 즉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비밀을 먹고 소화하여 자기 양분으로 삼는 것.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왜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쓴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종말은 의인에게는 기쁘고 복된 소식을, 악인에게는 슬프고 무서운 소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 겔 2:10).
에스겔이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하나님의 두루마리에 기록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전해야 했던 것처럼, 요한도 하나님의 두루마리에 담긴 달고 쓴 소식을 계속 전해야 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11절).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주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책임이 있다. 세상 끝날까지 이것은 우리 사명이다.
인류의 역사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세세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펼쳐지는 역사다. 우리는 그 역사의 마지막 절정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관찰자나 구경꾼이 아니라 주연 배우이고 수행자이다. 하나님은 종말에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밝히 알고 잘 소화하여 우리 삶을 살게 하는 실질적인 지혜와 힘으로 삼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말과 삶으로 만나는 많은 사람에게 주께서 하실 일에 관하여 계속 선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전하는 소식은 누군가에겐 꿀처럼 달콤한 소식이지만, 누군가에겐 쓰고 고통스러운 소식이 될 것이다. 당신은 주가 종말에 하실 일을 진실로 믿고 바라보는 자로서 의인에게 미칠 기쁨과 영원한 축복에 달콤함을 미리 맛보며 살고 있는가? 그 소식이 주는 위로와 소망이 필요한 자에게 전하고 있는가?
당신은 주가 반드시 지체하지 않고 이루실 악인에게 미칠 무서운 심판과 재앙을 묵상하며 허망하게 멸망을 맞이할 이들을 쓰리고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붙잡고 제발 그 길에서 돌이켜 은혜의 보좌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나오라고 외치고 있는가?
우리는 주가 하실 일을 전부 다 세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요한을 통해 예언하신 계시록의 비밀이 반드시 정하신 때에 이루어질 것을 알고 믿고 바라고 있다. 그 사실이 오늘 내 삶의 목적을 바꿔야 한다. 내 기도를 빚어야 한다. 내 시선을 계속 옮겨야 한다. 하나님 비밀을 단지 아는 자가 아니라 먹는 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