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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하나님의 말씀, 하늘
본문 : 시편 19편 1-6절
설교자 : 최종혁
시 19:1-6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노력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 중간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맞지만 모든 것을 우리의 능력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입니다. 일반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반계시는 또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사람 외부에 있는 자연물들이 있고, 사람 내에 있는 양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반계시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일반적인 지식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특별히 주신 것들을 말합니다. 그것도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록된 말씀(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성육신 하신 말씀(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특별계시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특별한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난 것이 아닌 특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실제로 본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한 차등이 있습니다. 오늘날 아직도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은 ‘일반계시’에 대해 말하고 있고, 7-14절은 ‘특별계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통해 드러내신 일반계시에 대해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여러 일반계시들 중에 ‘하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계시들 중에 가장 적합한 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 일반계시의 역할은 하나님에 대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에서는 “하늘”, “궁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성경에서 하늘은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가리키기도 하고, 눈으로 보는 파란 하늘, 밤하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더 확장시키면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그 너머에 있는 우주를 말할 때도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에서 하늘도 눈으로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온 우주를 말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하늘과 궁창도 그런 의미로 생각해야 합니다. 더 넓은 의미의 우주와 행성, 항성 등의 천체들이 포함된 개념입니다. 그런 우주가 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우주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 하늘과 우주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하는데, ‘하나님의 거룩’이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의 속성이 다른 무엇과 구별되는 것을 강조할 때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그런 하나님의 구별되는 속성이 피조물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피조물들이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표현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우리의 창조 목적을 말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의 말과 행동, 삶으로 드러낸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낼 수 있고, 사랑을,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말한 본문의 구절은 현재시제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계시고 어떤 분이시지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 하나님이 손으로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세상을 손으로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시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직접적인 관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그것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그것을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가 있다’, ‘그가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선포합니다. 하늘의 태양과 별들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물건을 만들 때 목적 없이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만물을 만드실 때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만물이 하나님을 통해 창조되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그려진 그림을 보면 그 그림의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마음 속으로 먼저 ‘누가 그렸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답고 위대한 것 뒤에는 무언가 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림을 칭송하기 보다는 그것을 그린 사람을 칭송합니다. 자연은 아름답고 장엄하고 위대하며 놀랍습니다. 자연이 하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말의 ‘자연’이라는 말은 그다지 좋은 말이 아닙니다. ‘스스로 생겨났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고 싶은 것이지 정말 그렇게 저절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창조물은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주가 어떤 분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연을 보는 우리가 창조주를 찾게 만드는 것이 모든 피조물들의 창조 목적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 과학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더 많은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망원경이 발달해서 더 많은 하늘을 보고 우주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피조물의 선포를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우연과 시간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 마음속에서 양심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들은 창조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2-4).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일반계시가 갖는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시간, 언어, 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1). 이 말씀은 다시 말하면, ‘하늘은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지식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샘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늘은 날마다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소리로 들릴 듯 안 들릴 듯 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낮에는 태양이 그러합니다. 저녁이 되어 태양이 지고나면 달과 별, 하늘의 수많은 천체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옵니다. 별들을 보면 다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크기가 다르고 밝기가 다르며 색깔도 거리도 다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데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별들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 정말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이것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별과 관련된 신화를 만들어냈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은 그 별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궁금해 했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개수가 4천개라고 합니다. 과학자들의 추정은, 태양계가 속한 은하에 천억 개 정도의 별이 있고 그런 은하가 천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숫자를 센다면, 일억을 세는데 2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것에 천을 곱한 것이 천억입니다. 물론 이것은 추정이고 과학자들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별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저는 우주에 대한 사진과 영화를 보면 ‘정말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우주를 보여주신 목적은 우리로 초라함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보다 더 크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사 66:1-2).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입니까. 우리를 압도하는 이 우주도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 창조되었던 육천 년 전부터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에 대해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살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포를 내가 듣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3).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했는데, 무언가를 선포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늘은 어떠한 언어도 없습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어떤 소리도 없습니다. 자연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방법은 우리의 언어를 통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포에 제약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언어에 대한 제약을 풀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말을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지만, 그것은 그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좋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선교지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입니다. 자연은 말없는 말, 소리 없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지 상관없이 자연 만물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누구도 하늘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4). 하늘의 선포는 장소의 제약도 받지 않습니다. 세상 끝까지 그 소리가 이릅니다. 땅과 바다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늘이 하나님에 대해 선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지에 살아도 외딴 섬에 살아도 하늘은 그곳에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반계시들이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면 ‘보편성’, ‘일반성’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하늘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그것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해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해, 달, 그리고 별들은 순회하는 하나님의 설교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는 사도들이며,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죄 있다하는 재판관들이기도 하다’. 하늘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늘, 나무, 바다 등의 자연물을 보면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들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그분의 능력, 일반적인 속성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의 한 예로서 ‘태양’을 듭니다. 당시에 다윗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밤을 지새우고 이른 아침에 뜨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으로부터 몸을 숨겨 나무 아래서 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아니면 힘든 하루를 보내며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4-6).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태양이 어딘가에서 자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 해에게 휴식처를 제공한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태양은 경외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태양신에 대한 숭배와 전설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태양 조차도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태양이 하룻밤을 자고 출격할 준비를 합니다. 그 태양을 ‘신랑’과 ‘힘센 장사’로 표현합니다.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왜 하필 신랑과 장사로 비유했을까요? 둘의 공통점은 힘과 에너지, 그리고 기쁨입니다. 태양은 하루만 떴다가 지면 일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뜨고 지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이 입장하는 순간을 생각하면, 정말 기쁘게 밝은 표정으로 힘차게 걸어 들어오지 않습니까. 또 넘치는 힘으로 달리기를 즐기는 장사처럼 태양은 기쁨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6). 태양은 매일 떠서 매일 집니다.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이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빛을 비추는 일과 온기를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태양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빛을 보고 온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태양은 창조주 하나님을 이 땅에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늘과 관련된 일반계시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은 또 하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열린, 누구나 볼 수 있는 말씀 말입니다. 어느 시대에 살았든지 어느 언어에 속하고 어떤 장소에 있든지 누구나 하나님의 이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연은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8-20).
누구도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하나님을 몰랐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핑계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피조물을 보면서 두 가지 잘못된 길을 갔습니다. 하나는 피조물 자체를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름답고 위대해 보여서 그것을 경배한 것입니다. “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맞추었다면(그것을 경배했다면)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욥 31:26-28). 욥기는 성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때에도 벌써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을 섬기는 죄악이 있었던 것입니다.
피조물을 대하면서 인간이 저지른 또 하나의 잘못은 그것을 연구 대상으로만 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올바른 반응은, 그 자연의 위대함을 보면서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고 그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연 만물을 볼 때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밤하늘의 아름다움, 태양의 열기를 보면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늘과 바다, 수많은 일반계시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피조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일부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올바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을 위해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온전한 모습을 이 땅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올바른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올바른 형상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조주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나는 그와 같은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