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죄를 담당하신 너희 하나님을 보라

본문: 이사야 53장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의 딜레마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하나님은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죄를 담당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어쩌면 마치 검사나 판사가 죄(사건)를 담당하는 모습이 떠오를 수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또한 형벌을 선고하시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이미 6장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죄인도 하나님께서 용납할 수 없으시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신다는 말을 기독교인들이 종종하는데, 사실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지 죄인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언제나 동일하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과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 죄를 즐기며 사는 죄인을 사랑하실 수는 없다.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께서 죄인(악인, 교만한 자, 살인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증언하는 자 등)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딜레마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볼 때 딜레마처럼 보이는 부분이다. 죄를 미워하시며 동시에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인(죄를 가진 사람)을 어떻게 하실 것이냐는 것이다. 죄가 미우니 사람도 그냥 심판하여 멸망시키실까? 아니면 반대로 사람을 사랑하시니 죄를 그냥 모른 척 눈 감아주실까?

반드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첫번째가 하나님의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죄를 눈 감아 주는 것은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절대로 하실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을 나타내기로 선택하신 것 뿐이다.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고 그것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랑하시는 하나님’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죄인인 사람을 심판하여 멸망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수도 있는 옵션이다. 애초에 ‘사랑’이 하나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하실 수도 있으셨던 것이다. 사람이 아닌 천사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시고 그들을 구하셨더라도 하나님께 문제가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죄인인 사람을 사랑하기로 선택하신 순간 표면적으로는 딜레마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할까? 하나님은 어떻게 죄를 가진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있겠는가?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다.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막이 보여주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기 원하심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데까지 나아갈 수 없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결국 영생의 즐거움을 누맂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죄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신다. 바로 ‘대속’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의 종과 하나님

본래 이사야 53장은 52:13에서 시작된다. 이사야에는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말씀이 4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42:1-9; 49:1-13; 50:4-11, 그리고 52:13부터 53장 끝까지다. 모두 메시아에 대한 말씀인데, 그 중 마지막 종의 노래가 우리가 살펴볼 본문이다. 그 시작은 이렇게 되어 있다.

52: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내 종”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를 보라고 하신다. 아마 벌써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보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을 보라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의 종”으로 표현된 대상이 여럿있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 중 하나이고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종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둘 모두가 해당 사항이 없다.

먼저 여기서 종에 대해서 사용된 표현 자체에서 답을 위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는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다. “종”이라고 표현되었지만 그가 매우 높게 될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에서 “받든다”와 “높이 들린다”는 단어가 함께 등장한 다른 곳은 총 3곳(6:1; 33:10; 57:15)인데, 그때마다 예외없이 하나님의 높으심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단순히 같은 표현이 하나님과 종에게 사용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이사야서 전체가 하나님의 높으심은 다른 어떤 사람이나 우상과도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 낸다.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어야할 이유는 그분이 가장 높으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에게만 사용된 표현을 다른 누군가에게 사용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봐야한다.

이사야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아질 수는 없다. 또한 53장의 맥락에서 이사야를 포함한 이스라엘은 종이 아니라 “우리”로 표현된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은 그들 외의 다른 누군가를 지칭한다고 봐야한다. 사실 그 누군가가 누군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신약 성경에서는 그가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지칭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고, 그를 찾아온 빌립에게 이 말씀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를 물었었다. 그때 빌립은 그 말씀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 말씀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자신도 이사야의 말씀이 자신에 대한 것임을 말씀하셨다.

22: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이는 이사야 53:12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 8:16-17에서 마태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 내시고 병을 고치시는 것이 이사야 53:4에 대한 성취라고 말하기도 했다. 베드로도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에게 따라오게 하신 고난의 본에 대해서 말할 때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종의 노래에서 메시아인 종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지칭한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며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다(요 1:1).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셔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이시다(빌 2:6). 따라서 13절에서 “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13절에서 하나님께만 사용된 표현이 하나님의 종에게 사용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종 역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한 위격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14절이다.

52: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하나님께 이런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니라 약속된 메시아인 것만 고려해봐도, 이사야 당시 그리고 그 후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이 말씀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납득하지 못했다. 메시아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보다 상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메시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런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씀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이 말씀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누군가를 지칭할 수 없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메시아에 대한 말씀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은 고난과 영광을 우리가 함께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난과 영광은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이 어울리지 않는 쌍이 생겨난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는 거룩과 죄가 예수님에게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구원하기 원하시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럼 이제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자.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먼저 이 말씀에서 전제로 두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죄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 5절에서 허물과 죄악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그 죄다. 6절은 그 죄의 특징을 설명해 준다. 마치 양처럼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이 죄의 특징이다.

양처럼 무력한 동물이 없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야생에서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양은 마치 그런 목자가 필요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저 풀밭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간다. 그러면서 겁이 많아서 놀라면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 곳으로나 뛰어간다. 그렇게 길을 잃은 양은 다시 목자를 만나지 못하면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양의 특징이고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특징이다. 우리는 자신만만하다. 하나님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충분히 선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더욱 죄의 짐에 눌려 탄식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멸망에 이를 뿐이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함께하기 원하시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나님은 그냥 기다리시면 된다. 하지만 사람에게 그런 희망은 찾아볼 수 없다.

3:9–18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의 상태다. 우리 중 누구도 죄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인류가 발전했다고 말하는 지금, 과거보다 우리가 더 선해졌다고 말할 수 없다.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교육을 받고 있는 지금, 과거보다 지금 우리는 서로를 더 믿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보다 정교한 거짓과 사기가 넘쳐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일단은 의심하고 봐야지 일단은 믿고 보면 손해만 보는 세상이다.

아이들의 교실은 어떨까? 과거보다 훨씬 서로를 사랑하고 위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가 그렇지 않은데, 아이들이라고 다를 수 없는 것이다. 시스템이 사람들의 죄성을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게 막고 있을 뿐이고, 그 시스템조차도 사람들은 쉽게 허점을 찾아내고 이용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지키자고 한 그 약속을 나의 이익을 위해서 지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장 큰 피해자는 가장 힘없고 연약해서 가장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과거에는 기술이 부족해서 태어난 아이들이 오래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아기들이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인류는 선을 향해 가고 있지 않다. 죄가 우리 삶을 더욱 어렵고 힘들게 만들고 있지만,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고 벗어날 수도 없는 운명에 있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할까?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죄인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있으실까?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딜레마가 아니라 우리 사람들의 풀 수 없는 숙제다. 하지만 결국 답은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무언가를 우리를 위해서 해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우리가 이사야 43장에서 봤던 것처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보신다. 다른 백성들의 생명으로 그들의 생명을 대신하실 정도로 귀하게 보신다. 하나님은 실제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도 상관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해 다시 그렇게 하실 것을 이사야 40-66장의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면서 확신을 주신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고레스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을 통해 그렇게 하심을 살펴봤었다. 하나님은 그 뜻에 따라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그의 백성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이사야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말씀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만을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더 큰 하나님의 백성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 모든 민족들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하여 인류의 회복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죄를 제거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딜레마를 해결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그냥 용납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서 죄를 제거하셔서 의롭게 하신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인에게서 죄를 제거하시는가? “대신” 죄를 담당하심으로 그렇게 하신다. 4-5절보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진술하는 말씀도 없다.

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말씀은 분명히 “그”와 “우리”를 강조해서 구분하여 “그”에게 속한 것과 “우리”에게 속한 것을 구분한다. 본래 “우리”에게 있어야할 질고와 슬픔을 “그”가 당한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그”가 찔리고 상한다. 반대로 “그”가 징계를 받아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 “그”가 채찍에 맞아 “우리”가 나음을 받는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그”에게 있고 “그”에게 있어야 할 것이 “우리”에게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그와 우리 사이에 이런 말도 안되는 교환이 일어났는가? 어떻게 우리는 온갖 나쁜 것을 그에게 주었는데, 그는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 줄 수 있는가? 그가 우리의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 자리에 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마치 죄를 지으신 것처럼, 악을 행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야할 형벌의 자리에 서셨다. 그래서 찔렸고 상하셨다.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다. 고난을 당했다.

실제로 여기 사용된 표현과 그 표현들이 묘사하는 이미지는 이사야 1장에서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의 모습과 동일하다.

1:4–6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것이 하나님을 반역하여 죄에 빠진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는데,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이런 모습이 되신 것이다. 죄인인 그들을 대신하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수님께 조금의 죄는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

53:11 … 나의 의로운 종이 …

신약 성경도 이 사실을 확인해 준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

예수님께는 조금의 죄도 없다. 즉, 예수님이 어차피 자기 죄 때문에 형벌을 받는 김에 다른 사람들의 형벌도 추가로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순전히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죄를 담당하셨다. 4절을 다시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보면서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은 스스로 우리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했다. 7절도 이렇게 말한다.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그리고 있는 장면은 강제로 어쩔 수 없이 양이 발버둥치며 끌려가는 모습이 아니다. 잠잠하게 순응하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죄를 담당하신 모습은 그러했다. 하기 싫은 일을 반항하면서 억지로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이 길을 선택하셨다. 그래서 11절을 보면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같은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이 맞고, 특히 예수님은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아버지께 간절히 구하기도 하셨지만, 그것이 죄인을 구원하기 싫은데 억지로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으셨던 것은 인류의 죄를 담당할 때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단절되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할 다른 길이 있다면 예수님은 다른 길을 선택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10절이 말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다. 10절 끝에서도 이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임을 말한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십자가에서 죄인을 대신하는 것이었고, 그랬기에 예수님은 기꺼이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예수님께서 기쁘게 하신 이 일을 우리는 일어나지 말았어야할 비극처럼 생각해선 안된다. 고통에만 집중하지 말고 그 결과에 집중하여 더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모든 고통을 통해 이루신 것은 무엇인가? 죄를 담당하신 것이다. 우리가 받아야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셔서 우리가 받아야할 죄의 형벌을 제거하신 것이다.

53: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아무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실상은 이러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허물 때문에 그들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53: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예수님께서 대신 형벌을 받아주신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의롭다라고 선포된다. 죄에 대한 댓가를 다 치뤘기 때문에 더 이상은 죄인이 아닌 것이다.

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은 것을 통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셨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신 일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런 면에서 흥미로운 면이 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말로 미워했었다. 그래서 언제든 기회를 잡아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정말로 원했다면 예수님을 죽이는 것 자체는 그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빌라도에게는 “우리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권한이 없었다고 해도 로마는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스데반의 경우는 즉시 돌로 쳐서 죽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아”야했다.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범죄자로 죽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비밀리에 살해하지 않고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공개 처형을 당하길 원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죽어야,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이고, 그래야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자들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의 계획이 성공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방인의 손에 넘겨서 채찍질했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를 오르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결국 자기 죄로 인해서 이 모든 고난을 당하고 처형 당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공개 처형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너무 지쳐서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을 때 군중 중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졌다. 아마도 시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는 사람들이 아는 것이었을 것이다. 시몬 자신은 아무 죄가 없지만 이 범죄자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그러했다. 각자가 자신들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예수님께서 기꺼이 순종하셔서 벌어진 일이다.

53:10–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종교 지도자들이, 빌라도가, 로마 군병들이, 혹은 우리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 틀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상함 받기를 원하셨고 질고를 당하게 하셨다. 10절의 “원하사”는 “기뻐하사”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셨고,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 표현 때문에 십자가를 전우주적으로 가장 끔찍한 아동 학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십자가는 전우주적으로 가장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이사야 43장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해 그들 대신 다른 민족을 내어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사야 53장에서 하나님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들 대신 하나님 자신을 내어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에게서 구하기 위해서는 그 민족들을 대신 내주셨지만,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신 내어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법이고, 유일한 해법이다. 다른 해법은 없다. 하나님은 이 외에 다른 해법을 주지 않으셨고, 우리는 스스로 다른 해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구약의 제사는 이 모든 것의 모형이었다. 특히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두 염소는 대속의 의미를 잘 보여주었다(레 16장).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하여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면서 염소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속죄제사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안수하고 모든 죄를 아뢴 후에 광야로 멀리 보낸다. 희생 제사를 통해서 죄가 백성에게서 멀리 옮겨졌음을(제거)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죄인에게서 제거하셨다. 하나님의 딜레마는 사라졌다. 우리의 풀 수 없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을 보라 보는 것이다.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으면 누구도 죄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누구도 영생을 얻을 수 없고, 누구도 영생을 누릴 수 없다.

3:14–16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놋뱀을 바라보았을 때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이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신 유일한 길이다.

도전

놀라운 것은 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이다. 사실 이사야 53:1-3은 그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53:1–3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분명 예수님은 “여호와의 팔”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이 땅에 계시면서 많은 능력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셨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1: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보였던 일반적인 반응인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특별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매력적으로 보일 어떤 것도 예수님께는 없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냥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분에게서 특별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분은 더 연약하고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오늘날 성화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잘생기고 멋진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분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것처럼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가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죽으셨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조롱을 당했다. 다른 여느 범죄자처럼 십자가에서 죽었다. 누구도 그런 예수님을 귀히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예언의 말씀은 단순히 그렇게 700년 뒤에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그보다 더 뒤에 일어날 일을 말한다. 심지어 아직도 이 말씀은 모두 성취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시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선포하신 것처럼 다 이루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단지 그 일을 하실 것에 대한 예언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그 일을 이 백성들이 받아들이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던 그들이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드릴 고백이 바로 이사야 53장인 것이다. 그들이 바로 이 말씀에 등장하는 가장 직접적인 ‘우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대환난의 때를 겪으면서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사야 53장은 모든 믿는 자의 고백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대신 죄를 담당해주셔서 구원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 말씀과 같이 회개의 기도를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예수님이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바란다. 나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그분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이제 하나님 안에 돌아왔다면,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는 말의 의미를 잊지 말기 바란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분을 위해 살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