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본문: 욥기서
설교자: 조정의
회복하는 2022년을 시작하며 우리는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회복은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은 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셨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환난과 궁핍 가운데 충성할 수 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세속과 죄를 이긴다. 하나님 안에서 잃어버린 생명력을 찾고, 약한 능력을 가지고도 큰일을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교회는 미지근하여 아무짝에 쓸모없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치료자시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주저한다. 하나님 계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밖에서 배회한다.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아는데 가는 길을 헤맨다. [예시]. 극단적인 예시를 든 이유가 있다. 첫째, 종종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 둘째,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극단적인 경우에도 사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극적인 일이나 고통스러운 일, 이해할 수 없는 환경과 상황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불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어렵고 험난하게 만든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가족을 데려가시는가? 왜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왜 가까운 사람의 배신을 겪게 하시는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억울한 비난과 조롱을 받게 하시는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왜 이렇게 더디 주시는가? 나를 괴롭게 하고 울부짖게 하는 사람이나 문제를 왜 빨리 해결해주지 않으시는가? 어쩌면 당신도 최근에 이렇게 하나님께 탄원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욥기서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그 길을 찾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 원한다. 욥은 사람이 당할 수 있는 모든 비극을 종합선물세트처럼 한꺼번에 받은 사람이다. 그는 부유했고 화목하고 다복한 가정을 이뤘으며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로 평가받고 하나님께는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라는 평가를 받았다(욥 1:8).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삶에 허락하신 풍파는 그가 대단했던 것만큼 더욱 파괴적이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물과 종들, 열 명의 자녀 모두를 잃었다. 하나님은 또다시 그의 삶에 고난을 허락하셨는데 바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난 심각한 종기였다. 그는 종일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살 수 있었고 세 친구가 와서 욥인 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심히 고통스러웠다(욥 7:3-6).
하지만 욥은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주신 이도 여호와시여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고(욥 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했다. 그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욥 2:10).
하지만 욥이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보면 그가 비록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욕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에서 헤매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담겨 있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할 수 없었다. 상처 입은 마음과 영혼을 치유해주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1.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잃은 증상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잃은 사람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말씀도 귀에 잘 안 들리고 성경을 읽어도 눈에 잘 안 들어온다.’ 왜 그럴까? 자기 영혼에게 말씀과 성경보다 훨씬 더 크게 외치는 내면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욥의 내면의 소리는 욥이 친구들에게 했던 말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잃은 상태라는 걸 분명히 보여준다.
1) 부정(3:1-10)
욥은 자기 생일을 저주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에서 ‘~더라면’이 몇 번 나오는가? 15번 나온다. 모두 욥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가정이다. ’과거에 이랬다면 혹은 저랬다면 지금의 현실을 겪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실 부정이다(나의 선택도 포함, 12절). 현실 부정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잃은 자의 증상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나의 선택과 실수를 포함한 모든 것을 통해 반드시 그분의 선한 뜻을 이룬다는 걸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오해(6:1-4, 8-9; 7:11, 11-21)
욥은 자신이 당하는 시련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오해했다. “전능자의 화살”(4절).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9절). 그는 당하고 있는 시련에 압도됐다: “나의 괴로움을 달아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2-3절). 그의 고통을 과소평가할 수 없지만, 그는 고통에 사로잡혔다.
욥은 자기 영혼이 너무 아프고 마음이 괴로워 하나님을 오해했다(7:11). 하나님께서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무거운 짐으로 누르시고 죽을 지경이 되게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7:12-21). 정말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면 누가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을까? 하나님을 오해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분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잃는다.
3) 불평(10:1-8)
욥은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했다. 그는 억울했다. 자신이 “악하지 않은 줄을” 하나님도 아신다고 말했다(7절). 하나님 앞에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괴로움을 겪을 만큼 악한 일을 행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과 더불어 변론하기 원했다.
욥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했다(9장). 하지만 왜 이렇게 가혹하게 자신을 심판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10:16-17).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무서운 채찍을 휘두르는 분으로 보는 사람이 그분을 가까이하고 싶을까? 그분의 거룩함과 절대 권위를 인정하기는 해도 그분께 가까이 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욥의 말에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부정,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거룩과 공의에 따라 일하고 계심을 믿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다면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길 원했고,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간절히 듣고 싶어 했다.
동시에 욥은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 부정하고 싶을 만큼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육체 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모두.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신이 경험하는 아픔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치시는 게 아닌가 그것도 너무 가혹하게 징계하시는 게 아닌가 원망이 들고 불평이 흘러나왔다.
욥의 방황하는 발걸음을 잘 묘사하는 구절이 있다면 바로 23장 1-9절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잃었다. 많은 신자가 욥처럼 길을 잃는다. 때론 삶의 작은 일에 실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긴 방황의 시기를 겪는다. 하나님을 완전히 배척하거나 떠나진 않지만, 그분께 돌아가는 길에서 헤맨다. 부정과 오해, 원망의 목소리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일으키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까? 그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욥은 어떻게 했나?
2.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1) 계시
욥과 친구들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논쟁은 37장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38장에서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폭풍우는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폭풍우처럼 하나님만 아실 수 있고 하실 수 있는 주권적인 일들에 관해 욥에게 쏟아지는 질문을 하셨다(38-41장). 그리고나서 욥의 대답이 무엇이었는가?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1-3).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4절, 새번역).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5-6절).
무엇이 욥으로 하여금 회개하게(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찾게) 했는가? 하나님의 계시다. 그동안 그는 주께 대하여 듣기만 했지만 이제 그는 믿음의 눈으로 들은 말씀을 믿고 신뢰하게 됐다. 주님은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내면의 시끄러운 소리를 멈춰라. 쏟아져 나오는 끝없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 애쓰지 말라.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0:4). 주님 말씀만 듣고 주가 물으시는 것에 답하라. 말씀의 소리를 듣지 말고 믿음의 눈을 열어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라. 그럴 때 당신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목을 찾게 될 것이다.
2) 믿음
하나님은 욥을 갑절이나 축복하셨다(42:10; 1:3). 양이 칠천 마리였는데 만 사천 마리가 됐다(42:12-13). 낙타가 삼천 마리였는데 육천 마리가 됐다. 소 오백 쌍, 암나귀 오백 마리였는데, 각각 천 쌍(겨리), 천 마리가 됐다. 하나님은 또 욥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주셨는데, 주님 품에 안긴 자녀들을 포함하면 이 또한 갑절이다. 거의 죽은 자처럼 병들었던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다(42:16-17).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그분이 과거에 베푸신 축복(은혜, 선하심,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약속하신 장래의 축복을 기대하며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오래 가까이에서 동행한 사람일수록 그분이 베푸신 것에 감사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어려움이 없었을까? 아니다. 그것을 다 덮고도 남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계속해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라도 우리는 다윗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하나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헤매지 않고 그분 집에 영원히 함께 살게 하는 힘은 믿음이다. 내 평생에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구하라.
3)주님
두 가지 면에서 우리 주님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주님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육신을 입은 말씀이시다(요 1:1).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절대 의심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셨다.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고 여러 번 가르치셨다(하물며 너희 아버지께서…눅 11:13).
그 절정은 십자가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주님이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신 것. 하늘 보좌에서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것.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우리 대신 받으신 것.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 죄인이었을 때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과 용서를 베푸신 것.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 자녀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교제와 기업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하신 것. 믿음으로 주님을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부정하거나 의심할 수 없다.
둘째,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시다(히 4:14-16).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무슨 말인가? 그분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릴만한 시험을 경험하셨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신실한 제자의 죽음, 억울한 누명, 이유 없는 비난과 조롱, 사람들의 배척,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단절…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더욱 강렬하고 고통스러웠을 시험을 친히 경험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히 5:7).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잃었을 때 누가 우리를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까지 인도해주실 수 있을까? 누가 우리에게 ‘네가 겪는 고통과 슬픔을 나도 안다. 네가 느끼는 실망과 좌절을 내가 안다. 네가 방황하며 답을 찾고 싶어 애쓰는 마음을 내가 안다’라고 진심으로 말해주실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이다. 그리고 주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종착지까지 인도하실 수 있다.
심한 통곡과 눈물 가운데 자기 뜻 구하기를 멈추고 아버지의 계시된 뜻에 순종으로 답하기 원하셨던 주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는 중에도 십자가 앞에 있는 기쁨, 아버지께서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 주실 축복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주님. 바로 주 예수님만이 우리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다(히 12:2).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분이 당신을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로 인도하시고 끝까지 그 길에 동행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