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의 질문
본문 : 시편 15편
설교자 : 최종혁
시 15 [1] [다윗의 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우리는 흔히 구원에 대해 말할 때(특히 전도할 때) 구원을 받음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이나,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있는 것에 집중됩니다. 이것은 물론 분명한 진리이고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보다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무엇을 얻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얻으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2-23).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때를 ‘예배할 때’라고 하셨고, 하나님은 그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이 말씀에서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목적이, 그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5-7). 하나님께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모든 세대에 나타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이 땅에서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할 일도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가는 사람이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1절). 시편에는 하나님을 부르는 표현이 많은데 주로 직접적인 기도나 찬송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여호와여”라는 표현은 그와는 달리, 화자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질문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질문의 대상을 명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비슷한 질문을 두 번 반복합니다. 물론 “장막”과 “성산”이 같은 곳은 아닙니다. 장막은 임시적으로 머무는 장소이고, 성산은 지속적으로 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상관없이 이 말은, 같은 질문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계신 그곳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자인가’에 대한, ‘누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누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런 자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시 24:3-4; 사 33:14-17). 만일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사람이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5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여러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거룩함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2절). 그 기준으로 2절에서는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정직하게 행한다’는 것은 ‘완전하다’, ‘온전하다’, (희생제물을 말할 때)‘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6:9에서 노아에 대해 말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하였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따를 때,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교회 안에서든지 밖에서든지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공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의로운 일을 하고 의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특별히 공의를 알거나 말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닌, 공의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공의를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또한 공의를 말하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이는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공의를 알고 말할 뿐만 아니라 공의를 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마음에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시편 14장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자에 대해 “그 마음에 이르기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말한다는 표현이 일반적인데 여기서는 ‘마음에’ 말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왔던 나다나엘에 대해 주님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안에 있는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마음에 거짓이 없이 진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의 전체적인 특징입니다.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3-5절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특징들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표적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구절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입니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3절). 이것은 비방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허물이나 잘못된 정보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3절). 사람들은 자신보다 힘이 있거나 강한 사람에게는 악을 잘 드러내지 않거나 숨겨둡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 때 권력을 악용하고 자신의 이익을 취합니다. 사업주가 사원들의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일, 가장이 가정의 구성원들을 학대하거나 이용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크든 작든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3절). 여기서 비방이라는 것은 ‘모욕’을 말합니다. 우리는 말로 모욕할 수도 있고 행동으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는 행위는 예배자로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4절).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망령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절한 사람, 또는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은 나 역시 거절하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을 나도 존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세상에 가치 기준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영적인 기준에 가치를 두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성경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재능이나 매력을 좋아하고 따라가지 그의 삶이나 성경적인 가치는 별로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4절). 우리가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는 뭔가 상황이 바뀌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고 진실된 성품을 가지고 있어 자신에게 해로운 상황이 되었을지라도 약속한 것을 바꾸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5절). 이자를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목적으로 내 소유를 불리거나 이득을 취하려고 그렇게 하는 경우는 문제가 됩니다. 재물에 대한 탐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또한 뇌물을 받고 판결을 다르게 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언어나 행동으로 해하지 않는 사람,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 약속에 신실한 사람, 재물을 탐하지 않고 재물 때문에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을 말하는데 어떠한 상황이나 조건을 나타내는 표현이 전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인 것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5절). 이런 사람은 주의 장막에 거하고 주의 성산에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입니다. 그는 안전하고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에게 고난과 역경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기초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기초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흔들리지 않는 한 그가 흔들릴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기준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요? 이렇게 행해야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예’이기도 하고 ‘아니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조금의 죄악도 두시지 않는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천사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여섯 날개 중 두 개로 얼굴을 가리고 두 개로 발을 가리며 두 개로 날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쳐다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조금의 죄도 용납할 수 없는 거룩함,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하려면 그렇게 거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시에서 제시하고 있는 기준보다 결코 낮아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나으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절대적인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신의 힘과 노력, 우리의 어떠함으로 그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편 15편에서 묘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편 14편에서 묘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에 기록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장). 한 번은 어떤 부자 청년이 와서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아니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인간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비춰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계속해서 참된 믿음의 증거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예배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을 비춰보고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성장의 문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다시 태어나야 할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돌아볼 때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자라가야 할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의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이 요구됩니다. 내가 정말 거듭난 사람이로서 예배하는 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시간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자들이 모여서 주일에 드리는 것이 예배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19-25). 우리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힘입어 죄가 씻겨졌고 이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베풀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런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향하여 더욱 걸어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자로서 가지는 두 가지 잘못된 태도가 있습니다. ‘나는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와, ‘이미 내 죄는 모두 해결됐으니 아무 문제없다’는 자세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스스로 이뤄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죄는 나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의 어떠한 행위나 노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닌데 마치 내가 그렇게 한 것처럼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올바른 예배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보시는 것이지 내가 완벽한 삶을 살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자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이뤄주신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에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 예배드리러 나오기 전에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하십니까? 어떤 옷을 입을까를 질문하십니까? 그런 질문보다 우리가 예배자로서 드려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절).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자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합니까. 그 질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할 것입니다. 주일 교인은 있을지 모르나 주일 예배자는 없습니다. 삶의 예배자로 최선을 다해 일주일을 살고 하나님 앞에 나와 겸손한 예배자로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분을 자랑할 수 있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