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본문 : 시편 73편
설교자 : 최종혁
우리 삶과 밀접한 주제를 다루는 시편은 자주 ‘복’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말에서 ‘복’은 뜻하지 않았는데 만나게 되는 좋은 일, 행운과 같은 뉘앙스를 갖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그런 우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이다. 우리는 그런 복을 누릴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복된 길, 즉 좋은 길이 있고 그렇지 않은 나쁜 길이 있다. 더 나은 선택이 있고 더 나쁜 선택이 있다. 시편 1편은 그렇게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길을 말하면서 어떻게 복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교훈해준다. 간단히 말해 복의 길로 인도하는 여호와의 말씀이 있고 그것을 거절하는 악인들의 말이 있는데, 그 중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여 그 길로 행하는 자가 복 있는 자고 복 있는 삶을 사는 자다. 그런 사람이 의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악인이다. 당연히 하나님은 의인의 길을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지만, 악인은 심판하신다.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한 원리다. 이론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전혀 없다. 그런데 살다보면 이게 정말 맞나하는 생각이 드는 일들을 보고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많은 시편이 그런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말씀을 통해서 배운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만나는 것이다.
시편 73편의 저자인 아삽도 바로 이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고(3절),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손을 씻어 무죄”한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했다(13-14절). 그가 알고 있는 원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난 것이다.
욥도 이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일들을 보기는 했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었는데, 그런 일을 자신이 당하게 되자 욥은 하나님 앞에서 답답함을 토로했었다. 자신의 지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가? 왜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가? 선하신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있고 고통이 있는가?
신학 용어로는 ‘신정론’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다루는 주제가 바로 이런 주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믿는 사람들, 특히나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정직한 의문이기도 하지만 믿음을 흔들 수 있는 의심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질문에 대해서 바른 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아삽이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 시편 73편을 통해 함께 그 답을 찾아보자.
시편 7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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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권의 시작
- •73-89편 : 총 17편
- •저자: 아삽, 시편 50편의 저자이고 3권의 주저자라고 할 수 있다(73-83편, 11편)
“아삽의 시”
아삽은 다윗이 임명한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은 레위 사람 중 하나였다. 헤만, 에단과 함께 성전의 음악 사역자 역할을 했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올 때 노래하는 사람으로 직분을 받았고, 그 후에도 찬양대의 리더로서 역할을 했다(대상 16:5). 시편 50편에서 그는 하나님을 잊은 예배자들에게 감사로 드리는 참된 예배를 회복할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게 앞장 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삽이었지만, 73편에서 그는 솔직한 마음을 기록했다. 거의 믿음을 버릴 뻔 했던 그가 어떻게 마음을 다잡았는지를 정직하게 기록했다. 정직한 아삽의 솔직한 질문과 그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함께 살펴보다.
아삽의 질문(1-16절) – 정결한 자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의심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1절)
아삽은 먼저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는 하나님이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심을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라고 말씀하셔서 “선함”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임을 말씀하셨다. 시편 119:68은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일도 모두 선하다는 말이다. 이런 본질적인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랑’으로서 우리에게 드러난다. 그 사랑은 상황에 따라 긍휼, 은혜, 인내, 인자와 같은 모습으로 드러난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은 비참한 상황에 있는 자에게,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죄인에게, 또한 의인에게 골고루 드러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아삽도 이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신다고 그가 이해하는 사실을 먼저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베푸시는 선이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선에 아삽은 주목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선과 악인에게 베푸시는 선을 대조하여 보고 있다. 그는 그 결과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했다.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절)
아삽은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말한다. 비유적인 표현으로, 올바른 길을 버리고 악인들의 길을 따를 뻔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자기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렇게 할 뻔했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 이유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고 그것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선을 마음이 정결한 자들이 아니라 악인과 오만한 자들이 훨씬 더 경험하는 것 같았다. 아삽은 4-1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본 것을 자세히 말한다.
“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4-5절)
먼저 아삽은 악인들의 고통 없는 삶을 봤다. 그들은 어디 아프지도 않고 잘 살다가 아주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평범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조차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특별한 재앙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재앙과 같은 일도 그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사회가 어렵고 힘들어져도 여전히 가진 자들은 잘 사는 것처럼, 아삽이 보고 있던 악인들도 그러했다.
이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다. 악인들의 길은 멸망의 길이고 의인의 길이 형통한 길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럼, 이렇게 고통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사실은 의인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6절)
목걸이와 옷은 그들의 부와 신분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이들은 누가 봐도 형통하고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순종할 때 내려주시겠다고 했던 그 복을 이 사람들만 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의로운 삶의 결과가 아니라 교만과 강포의 결과였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의 아름다운 목걸이와 옷은 그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오히려 드러낸다. 이들은 누가 봐도 악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7절)
아삽은 악인들의 외적인 모습이 그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계속해서 표현한다. 살찐 것은 오늘날 미적 기준에서 인정받지 못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살찐 것이 곧 부의 상징이었다. 살이 쪄서 눈이 솟아난 모습, 즉 약간 돌출된 그 모습이 그들의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었을텐데, 아삽은 거기서 그들의 교만을 보았다. 그들 마음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뛰어넘어 탐욕이 되었고 그들의 많은 소유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삽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악에 대해서 언급한다.
“8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8-9절)
그들은 다른 사람을 모욕한다. 압제한다. 거만하게 말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며 그런 사상을 세상에 퍼뜨린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라면 최소한 주변에 아무도 없이 홀로 쓸쓸히 돈만 만지면서 살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10절)
오히려 사람들은 그들에게로 몰려와 함께 그 풍요로움을 즐기기 원한다. 물론 악한 그들과 함께하기를 원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악한 자들이 가진 부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것이다. 앤더슨은 “그들의 풍요로운 삶이 인상적이어서 그들의 악조차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Anderson, Psalms 73-150, 532).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로운 길을 버리고 악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은 악인의 꾀가 효과가 있고 죄인들의 길이 형통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먹을 것이 많은 것을 보고는 넘어진 것시다. 의로운 길을 버리고 악한 길을 선택했다.
여기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것은 아삽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다고 3절에서 말했는데, 그만큼 그들의 형통함이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에게 악인들은 이렇게 그들의 풍요로운 삶의 비결을 알려주었다.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11절)
하나님에 대해서 이들도 모르지 않았겠지만, 그들이 봤을 때 하나님은 “아무 것도 모르는 분” 혹은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그들이 아무리 악한 말을 하고 위력을 행사해도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했을 때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설 수 있었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삽은 이렇게 정리한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12절)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아삽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솔직하게 말한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절)
이런 일들을 보니 자기가 지금까지 정결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이 참 헛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이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말씀에 순종해온 삶이 아무 의미 없는 일로 느껴졌다는 말이다. 공허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아삽이 경험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14절)
다른 사람이 잘 되는거야 그렇다고쳐도, 최소한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 재난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떻게 신실한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징벌을 받는 것처럼 매일을 살게 할 수 있을까? 선하고 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아삽의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사실 아삽의 진짜 문제는 단순히 자신은 고난을 당하고 악인은 형통하다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3절에서 그는 자신이 ‘질투’했다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그가 악인과 같은 형통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악인의 상황과 비교했다. 그들의 건강, 그들의 부, 그들의 풍요로움이 자신과 대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악인들이 누리는 좋은 것이 나의 것이기를 바랐다. 그것이 질투다.
선에 대한 보상은 없고 형벌만 있는 것 같은 삶, 악에 대한 형벌은 없고 보상만 있는 것 같은 삶, 아삽으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삶이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지, 의로운 자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도 괜찮은건지, 아삽은 혼란스러웠다.
특히 아삽은 예배를 인도하는 리더였다. 그는 책임감있는 리더로서 이런 혼란스러움을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른 성도들을 죄에 빠뜨리는 악행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15절)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아삽이 한 일이었지만, 그 자신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더욱 심한 고통이 되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16절)
여기까지가 아삽의 솔직한 질문이다. 아삽은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찾을 때까지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답을 찾게 된다. 어떤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늘상 하던대로 성소에 들어갔을때, 그는 모든 의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아삽의 답변(17-28절) – 언제나 해답은 하나님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절)
성소에게 아삽은 깨달음을 얻었다. 성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가랴처럼 천사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을 수도 있다. 어떤 선지자나 지혜자를 만나 좋은 충고를 들었을 수도 있다. 사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본문이 전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상황을 재구성해보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 아삽은 단지 자기가 성소에 들어갔을 때, 깨닫게 된 것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삽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뭔가 새로운 전에 없던 뛰어난 통찰력 같은 것은 아니다. 아삽 자신도 이미 익히 알고 있었을 내용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소에서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다기 보다는 평소처럼 예배를 드렸지만, 그런 무거운 마음으로 고통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여셔서 삶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키드너, “빛이 그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했을 때, 비로소 그에게 ‘하나님’은 사색의 대상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임을 깨우치게 되었다.”(키드너, 17).
의심이, 부정적인 생각이 그를 삼키려 할 때, 거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뻔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바라봤을 때, 그는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해답은 깨닫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자신을 무지한 짐승으로 표현할 정도로 단순한 것이었다. 단순하지만 확실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아삽은 회복되었다.
그가 깨달은 사실은 두 가지다. 먼저는 악인들의 운명에 대한 것이다.
“18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18-19절)
너무나 형통한 것 같고 모두의 부러움을 사던 악인들이지만 결국 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아삽은 깨닫게 되었다. 악인들은 너무나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가, 갑작스럽고 철저한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들도 놀라겠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도 놀랄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의 파멸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 그렇게 된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20절)
아삽은 악인들이 이미 멸망 당한 것을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악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분처럼 계신다. 하지만 이제 아삽이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깨시면 악인들을 바람에 날려가는 겨와 같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언제가 되든 상관없다. 지금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 그것이 우리 삶의 결론이 아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면서 삶을 순차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지나간 과거는 희미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우리에게 선명한 것은 현재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가 전부인냥 살 때가 많다. 아삽도 그랬던 것이다.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 것 같은 삶을 사는데, 악인들은 형통하고 고통도 없이 잘 사니,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지, 선을 행하시는지 의심이 생겼다.
그런 아삽을 비난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우리들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그것이 우리 삶의 바뀔 수 없는 결론인 것처럼 산다. 그런데, 영원하신 하나님께 지금 악인의 형통함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진짜 주무시고 계셔도 아무 상관없다. 그들에게 합당한 심판을 하나님은 이미 내리셨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의 시각에서 현재를 바라볼 때, 아삽은 ‘나도 참 불쌍하지’라는 자기 연민에서 ‘나도 참 어리석지’라는 자기 비판으로 시각이 바뀌었다.
“21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21-22절)
아삽은 그 마음이 상했었고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은 실제였지만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어리석은 짐승과 같았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이 당연한 진리를 왜 모르고 있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악인들의 삶을 부러워하며 질투하기까지 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을 것이다.
아마 천국에 가면 우리가 이런 고백을 동일하게 할지 모르겠다. 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세상의 것에 매여서 그것을 추구하며 죽기 살기로 살았는지, 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그것이 없으면 안될 것처럼 살았는지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혹 그 때 후회할 것 같다면, 지금 우리의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금 그 어리석은 질투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영원을 바라보며 산다면 우리는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 수 있다.
아삽의 깨달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더욱 근본적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23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23-24절)
아삽은 그래도 자기가 믿음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것, 이렇게 깨달음으로 나아온 것을 자기 공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삽은 주님께 고백한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를 교훈하셔서 인도하시며 끝내는 영광으로 나를 이끄실 것입니다.
악인들은 마치 하나님의 선하심을 풍족하게 누리며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였기 때문에 아삽과 같은 신실한 사람도 넘어질 뻔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함께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도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에게 좋아 보이는 모든 것을 가졌어도 하나님이 없다면 그는 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아삽은 이렇게 고백한다.
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5-26절)
세상에 속한 그 어떤 좋아 보이는 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하늘 위에는 땅 아래든, 하나님이시면 충분하다. 우리가 간절히 바랄 분은 하나님이셔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복에 대해서 아삽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며 시편을 마무리 한다.
“27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7-28절)
하나님의 가까우심이,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복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그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한다면 멸망의 길로 향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세상 가운데 선포할 수 있다.
그런 삶이 세상에서 보기에 풍요롭고 넉넉한 삶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되는 삶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도전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을 받는지, 왜 선한 사람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는지와 같은 신정론과 관련된 질문들은 사실 우리 입장에서 생기는 질문이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 모든 일을 다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해하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언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까?
1. 세상이 부러울 때 그렇게 해야 한다. 살다보면 우리도 아삽처럼 세상이 부러울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싶은 때가 있는 것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나는 힘들기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편하고 더 잘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받은 복을 세어 보아야 한다. 영원의 관점에서 세상에 속한 것의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곳을 바라보고 있는 내 눈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교정해야 하는 것이다.
2. 어려움 중에 그렇게 해야 한다. 아삽이 고통 중에 성소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고통 중에 있을 때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 복이다.
성경을 펴는 것도 힘들고, 기도조차도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내 육체와 마음이 쇠약해질 때가 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진짜 모르겠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 계시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때가 있다. 차라리 하나님을 내가 모른다면 더 낫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다. 사실 그때가 가장 기도해야 할 때고 성경을 펼쳐야할 때다.
우리는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이곳 저곳을 찾아봐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내 오른손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쇠약한 내 마음과 육체에 반석이 되시고 영원한 분깃이 되어주신다.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그러니,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라. 목 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3. 평소에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 없어도 우리가 살 수 있는 일상은 없다. 정말 아무 일 없는 것 같은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별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그 선하심을 맛보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디있느냐고 묻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언제나 내게 복임을 기억하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파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