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1
본문: 시편 46편
설교자: 최종혁

 

 

사람은 변화를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 특히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환경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환경의 변화가 나에게 큰 해가 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거나 그 상황에서 의지할 만한 것을 찾는다.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안정을 찾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돈에서 안정을 찾으려 한다. 상황이 어떻게 되든 돈만 많이 있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서 안정을 찾으려 한다. 육체적인 강함이나 학문적인 성취를 생각하며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 한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생각하며 안정을 찾으려 한다.

특별히 이 시편에서 배경으로 삼고 있는 상황은 “재난”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인지를 특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국가적인 재난을 염두에 두고 시가 쓰여진 것은 분명하다. 특히 2-3절, 5-6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황이 그렇다.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뛰놀고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리는 것은 자연 재해, 전쟁과 같은 국가적 재난에 대한 묘사다. 개인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앞에서 말한 그런 것들이 정말 도움이 될까? 혹은 우리에게 어떤 다른 것이 필요할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실 뻔한 답을 알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안에서만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뻔하고 당연한 답을 말해주고 있다. 시편 46편을 통해 왜 그 답이 당연한지, 그리고 그에 대한 당연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원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변하고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가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얻길 원한다.

 

I. 전제가 되는 사실(1, 7, 11절) –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시편 46편은 하나의 큰 확신에 근거해 있는 시편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다. 이 확신에 대해 두 개의 질문을 던져보자. 첫째로 우리와 함께 하는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둘째로 이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1, 7, 11절을 살펴보자. 46편은 “셀라”를 기준으로 자연스럽게 3 부분으로 나뉜다. 두번째와 세번째의 끝(7, 11절)에는 동일한 후렴구가 반복되고 있다. 첫번째 부분에 후렴은 없지만 1절의 내용은 후렴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세 구절은 이 시를 통해 시인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시작에서 그리고 후렴구를 통해 주제를 반복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것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두 가지 다른 표현이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다.

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 하나님의 초월성

먼저는 하나님, 즉 “엘로힘”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지칭할 때 여러가지 표현을 사용하고 각각이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엘로힘”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다른 거짓 신들과 다르게 능력이 많으신 분임을 강조한다. 간단히 말해 엘로힘은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뜻과 속성에 따라 하지 않으시는 일은 있어도 능력이 부족해서 하지 못하시는 일은 없다.

그래서 창조의 하나님은 “엘로힘”으로 표현되었다.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는 능력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떤 어려움도 없었다. 심지어 아무 것도 없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온 땅을 뒤덮은 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물은 자기가 있을 곳으로 모여들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었다. 그래서 다른 창조 설화들에 비하면 창세기는 재미있지는 않다. 하지만 아름답다.

7, 8절에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여호와 체바오트”라고 한다. 모든 군대를 거느리시는 여호와라는 의미다.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 모든 힘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지휘 아래 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는 의미다.

즉, 이 표현들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들이다. 하나님은 무엇든 할 수 있으신 능력자시고 모든 권위를 가지고 계신 통치자시다. 강하신 분이시며 높으신 분이시다. 왕들의 역사는 바로 이 두 개의 힘을 가지기 위한 싸움의 역사다. 권력과 능력이다. 하나님은 절대적 권력과 절대적 능력을 가지신 절대적인 왕이시다. 어떤 인간도 어떤 피조물도 이런 하나님의 힘에 도전할 수 없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우리와 다르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고 말하고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이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성경을 읽으며, 그리고 삶을 살아가면서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질문들이 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모습들이 있다. 지금 우리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기적들이 그렇다. 멀쩡하던 바다가 하룻밤에 마른 땅이 되어 2백만의 사람이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는 것이 상식으로 어떻게 이해가 되는가? 사람이 물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상식 밖의 이야기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이해가 되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는데 우리에게 자유의지도 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성경에는 우리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우리는 그런 질문에 대해 성경적인 설명을 찾는다. 어떻게 설명을 하든 가장 그 근본에 있어야 할 전제는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진리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 위치로 끌어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욥이 자신에게 일어난 부당해 보이는 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때,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모두가 이 상황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기다리는 그 때에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욥 40:9)고 물으셨다. 간단히 말하면 “네가 하나님이냐?”라고 반문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분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믿음의 시작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많이 사용한다.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와는 다른 분이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럼, 두번째 질문은 “이런 하나님이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실까?”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와 다른 분이시라면, 하늘의 하나님이시라면 땅에 사는 우리와 함께 하실까?”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위해 살펴봐야 할 표현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두번째 호칭 “여호와”다.

이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 하나님의 내재성

엘로힘이 능력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다른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가 많은 거절 끝에 결국 애굽의 바로를 만나고 나서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 모세와 아론을 비판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드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할 것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그들을 이끌 것을 약속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3).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가 여기서 처음 언급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끝까지 지키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의 표현이고 그 약속의 이름이 “여호와”였던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7, 11절)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바꾸셨고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셨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이 민족의 연약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현재 이들의 상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여호와”와 “야곱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 대해 “우리의” 혹은 “우리를 위한”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7, 8절은 더욱 분명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니”라고 말한다. 히브리어로 “임마누”이다. 이스라엘 민족에서 있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셨던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로 표현하고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내재성”이라고 표현한다. 사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내려오시는 모습, 하나님의 임재를 계속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둘만 그냥 두신 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창 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범죄한 후에 사람들은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다. 특히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으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기도 했다. 죄가 세상에 가득찼을 때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을 구원하시며 세상을 심판하기위해 내려오셨다. 바벨탑 사건 때도 하나님은 “내려와서”(창 11:7) 그들을 지면에 흩으셨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비롯한 족장들과도 하나님은 함께 계시면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경험한 것 뿐 아니라, 그들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 특히 광야에서는 성막을 통해, 불과 구름 기둥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심을 보여주셨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으로 때로는 그들의 불순종에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은 그들 중에 계셨다.

역사가 계속되면서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불순종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기로 하신 것과 같은 경고와 예언의 말씀이 이어진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극적인 모습으로 인간들 가운데 다시 내려오셨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직접 내려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종의 형테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 불렸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맡겨진 사역, 즉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일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지금은 그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자들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고 언젠가 구원 받은 우리들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류의 역사다. 우리와 전혀 다른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함께하기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신 이야기다.

절대 우리와 같이 않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어쩌면 모순처럼 들리지만,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대하신 분이시지만 나와는 별로 상관 없는 분”으로만 생각하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을 지나치게 “나와 같은 분”으로만 이해하게 될 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와는 분명 다르시지만 우리와 함께 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시 11: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사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그래서 시편 113편의 기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 113:5-6). 하나님같은 분이 없다는 것은 그분의 높으심도 그렇지만 그분이 스스로 낮추셔서 우리 중에 계시기를 원하신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정말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

우리의 확신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면 우리가 분명하게 합리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절)

“하나님은 우리의 요새(산성)이시다”(7, 11절)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이 시편의 배경은 국가적 재난이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난처, 힘, 도움, 요새로 비유되고 있다.

“피난처” –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혹은 숨을 수 있도록 해주는 장소다. 비가 올 때 비를 피할 곳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 쫓길 때 숨을 곳이 필요하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할 때 바위 틈이나 동굴 같은 곳에 숨었었다. 그곳이 피난처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피할 수 있는 장소가 되신다.

“힘” – 동시에 하나님은 힘이 되신다. 피할 수는 있는데 실제로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그것 또한 무용지물일 것이다. 하나님은 보호할 수 있는 힘이 있는 피난처시다. 7, 11절의 “피난처”는 1절의 피난처와는 다른 단어인데, 다른 곳에서는 산성이나 요새로 번역되었다. 힘과 피난처를 합한 이미지다. 높은 곳에 있는 요새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를 의미한다.

“도움” – 그렇기 때문에 환난 중에 만날 수 있는 도움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움은 내가 하는 일에 약간의 도움을 얻는다는 의미에서의 도움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준다는 측면에서의 도움이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강을 건너려면 무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도움이 없이는 강을 건널 수 없다. 지금 이 시편의 배경이 되는 상황도 그런 상황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수영 코치가 와서 그 순간에 몸에 힘을 빼고 이렇게 이렇게 하세요라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치어리더가 와서 힘내라고 열심히 응원해주면 도움이 될까? 아니다. 심리학자가 와서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의 안타까움 심리를 듣는 것이 도움이 될까? 아니다. 구조요원이 필요하다. 구조요원만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못해도 살 수 있다.

하나님이 바로 그 구조요원이시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살릴 수 있는 분이신 것이다. 문제는 그분이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있느냐는 것이고 도와줄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데, 그분이 기꺼이 도우실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그냥 “도움”이 아니라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크다”는 말은 “도움”보다는 “만날”에 연결된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은 크다를 “항상” 혹은 “언제나”로 번역했다. 하나님은 환난이 있을 때 겨우겨우 찾아서 만날 수도 있거나 혹은 그렇게 해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도움이 아니라 항상 만날 수 있는 도움이시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말씀을 더 진행하기 전에 반드시 던져야할 질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렇게 하길 원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여기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는 구원과 심판이 함께 있었다. 대홍수는 죄에 대한 심판이었지만 노아와 가족들에게는 구원이었다.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된 것은 유대인들은 구원을 통해서지만 애굽인들을 심판을 통해서였다. 가나안 정복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는 구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심판이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주님의 다시 오심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구원의 날이고 누군가에게는 심판의 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 자는 누구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고 그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편에 선 자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이고 힘이시고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던질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 만약 이미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면 그에 대한 합당한 반응을 생각하기에 앞서 정말 내가 하나님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실수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내 삶하고 관계 없는 분처럼 멀리 떨어 뜨려 놓는 것이다. 이 경우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지만 그것이 내 삶과 관계는 없다. 그 능력은 내가 죽을 때 천국 가게만 해주면 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 삶에 함께 하시고 그렇게 하길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즐거움도 그분께 가지고 가서 감사해야 한다. 우리 일상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반대로 하나님을 지나치게 나와 같은 모습으로만 이해하려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을 필요 없는 분으로 만든다. 하나님이 나와 같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꼭 필요하지 않다. 멀리 가려고 하는데 내가 운전을 못하면 필요한 것은 운전 못하는 또 다른 친구가 아니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나와 같은 분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필요 없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 둘의 공통점은 함께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더 이상 바라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더 이상 ‘필요’를 채우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풍족하고 입을 것이 넘쳐난다. 월세든 전세든 과거보다 훨씬 크고 깨끗한 집에서 살고 있다. 나쁘지는 않은 이런 것들을 바라보며 안심하는 순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든 우리에게 필요 없는 분이 되신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언제든 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풍족한 줄 알았던 돈이 더 이상 내 손에 남아있지 않을 때가 있다. 평생 병원 한번 안가본 것이 자랑이던 사람이 사고로 병으로 쓰러질 수 있다. 내 곁에 있던 가족, 친구들이 좋게든 나쁘게든 나를 떠나는 일도 있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벌어질 때 어떻게 하겠는가? 주변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겠는가? 혹 그 때가 되면 하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생겨날 것이라 기대하는가?

믿음은 듣고 아는데 기초해있다. 평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바르게 서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한쪽의 하나님만 보려고 하지 말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믿음의 눈으로 계속해서 바라봐야 한다. 그것이 계속해서 변해가는 이 세상 속에서 믿는 자들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가장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