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큰 자보다 큰 자들
본문 : 누가복음 7장 24~30절
설교자 : 최종혁

 

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빙고 게임은 종이에 바둑판처럼 25개의 칸을 만들고 숫자나 나라 이름을 써서 한 사람씩 그것을 부르면서 진행하는 게임입니다. 가끔 학생들이 성경 인물을 가지고 할 때가 있습니다. 25명을 적으면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약 3천 명 이상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명이인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우리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 사람의 특징이나 관련된 사건으로 기억합니다. 키 작은 ‘삭개오’, 의심 많은 ‘도마’, 세상을 사랑한 ‘데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사랑의 사도 ‘요한’ 등이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을 특징으로 기억합니다. 또한 여호수아와 ‘갈렙’, 다윗과 ‘요나단’으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만약 내가 죽은 이 후에 사람들이 나를 기억한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요?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축구를 잘했던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고, 세상의 돈을 모두 긁어모은 갑부, 좋은 아내, 남편, 어머니, 아버지로 기억되길 원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을 사랑한 사람, 충성된 사람, 겸손한 사람 등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에 대해 직접적인 평가를 한 경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 불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불렸습니다.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평가받았고, 왕 중에서는 히스기야 왕이 가장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의 시작에서 우리가 함께 살펴봤고,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다시 살펴볼 인물인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7:23). 예수님을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즉 인간들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더 놀라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요한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자인데, 그보다 더 큰 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순 같은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나눌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큰 자’와 ‘큰 자보다 큰 자들’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며 교훈을 나누기 원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시간은 큰 자인 요한에 대해서 살펴보고, 마지막에 큰 자보다 더 큰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1. 요한의 삶(24-25절)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24). 본문은 앞선 말씀과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부탁에 따라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오실 메시아’인지 물었고,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구약의 예언이 자신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은 그 말을 요한에게 전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기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 대해서 조금 부정적으로 말한 것 같아(23절) 미안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직접 그 사람을 칭찬하면 안 되니 뒤에서 칭찬하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은 이 상황을 통해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해서,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답이 명확한 질문을 연달아 세 번 던지시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어 가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24) 예수님은 이 질문을 2번 더 반복하십니다. 광야는 특별한 장소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이 있던 곳’을 광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러 왜 광야에 갔느냐는 말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그 사역을 준비했고(눅 1:80),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눅 3:2).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보기 위해 척박한 광야로 나가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24). 예수님은 갈대를 보러 광야에 나갔냐고 물으십니다. 갈릴리 지역은 갈대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는 동전에 자신의 얼굴과 갈대를 새겨 넣기도 했습니다.)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대를 보기 위해 광야까지 나갔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25). 이번에는 다른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러 나갔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도 당연히 ‘그렇지 않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광야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25). 그런 사람은 왕궁에 있습니다. 갈대는 광야에 있지만 굳이 광야까지 나가서 볼 만한 것이 아닙니다. 역시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그들의 입장에서 어쩌면 볼 만한 사람들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광야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옷’이라고 하실 때 의미한 것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저 옷이 부드러운 것을 말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화려하게 사치하며 세상의 즐거움을 즐기는 사람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왕궁에 있습니다. 이 말은 바꿔서 말하면, 요한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고 사치하면서 세상에서의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 진리를 강력하게 선포하고 정의를 지키기보다 자신의 안락과 평안, 이익을 위해 정치적 아첨하는 사람이 요한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 거하면서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은 먹고 마시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눅 7:33). 입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막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요한은 진리를 선포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선포했으며(요 1:29),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소리쳤습니다(마 3:2). 그는 또한 진리를 전함에 있어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향해 신념을 가지고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며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눅 3:8-9). 또한 요한은 당시 분봉 왕이었던 헤롯의 잘못을 책망하는데도 주저함이 없었고(눅 3:19-20)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마 14:1-12). 진리를 전하는 데 있어서 절대 타협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자리에서 기뻐했습니다(요 3:22-30).

이것이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받은 소명을 지키기 위해 힘썼던 사람입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 기준에서 볼 때는 형편없는 혹은 안타까운 삶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는 참 대단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단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 비를 보지도 못했던 노아는 물로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20년을 배를 짓는데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으며 모세는 땅의 어떤 사람보다 온유했다고 평가 받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고,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들보다 더 큰 자, 가장 큰 자였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그가 가장 큰 자라고 했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가 특별했던 이유는 그가 감당했던 사역입니다.

 

2. 요한의 사역(26-27절)

예수님은 무리에게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답을 내놓으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26). 사람들은 요한에게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를 보기 위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한을 선지자라고 생각했고(눅 20:6,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요한을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눅 1:76).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그 전에도 많았습니다. 단지 선지자라는 것만으로 ‘큰 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26). 요한은 선지자 그 이상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을 덧붙이셔서 뒤에 오는 말을 더욱 강조하십니다. 요한은 그저 많은 선지자 중의 하나가 아니라 좀 더 특별한 선지자였습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27). 요한은 특별히 예언된 선지자였습니다. 바로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서 구약에 예언되었던 사람입니다. 바로 앞 본문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구약의 예언을 통해서 드러났던 것처럼, 여기서는 요한이 누구인지가 구약의 예언을 통해 드러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말 3: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 하나님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한 사람을 보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엘리야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막 9:11). 바로 말라기서 말씀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이 엘리야였을까요? 요한의 특별함을 본 사람들은 동일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요 1:21). 그런데 요한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궁금해 했습니다. 그들에게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말합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 1:23). 요한은 이사야 40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힙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말라기 말씀과 동일하게 메시아의 선구자인 엘리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요한에 대해서 ‘엘리야’라고 하셨습니다(막 9:13). 그렇다면 요한은 왜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했을까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실제 엘리야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기다렸던 부활한 엘리야, 혹은 하늘에서 떠돌다가 내려온 사람이 요한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탄생에 대해서 천사 가브리엘이 예언할 때, 가브리엘은 ‘엘리야가 올 것이다’라는 성경의 예언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했었습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7). 엘리야가 온다는 것은 엘리야와 같은, 그와 같은 심령과 능력으로 올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요한은 엘리야와 같은 단호함과 강직함으로 모두가 하나님을 버린 것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어도 바알 선지자들과 싸웠던 엘리야 말입니다. 그런 요한을 모두가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은 요한을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사실 요한의 사명은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누리지 못했던 특권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저 멀리서 메시아를 바라보며 예언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 메시아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모두가 믿음으로 바라기만 했던 놀라운 역사를 자신의 눈으로 보며 증언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이 가진 사명이었고 특권이었습니다. 그것이 요한의 특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세례 요한이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3. 요한에 대한 반응(29-30절)

이 요한에 대해 사람들은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1) 백성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29)

두 가지 분명하게 다른 반응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뒤에 나오는 말씀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세례를 받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던 것처럼, 모든 백성 심지어 모두에게 죄인으로 취급 받던 세리까지도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즉,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를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세례가 없었습니다. 의식적으로 손을 씻거나 하는 것은 있었지만 물에 들어가는 세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례를 베풀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이 베푼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자신이 회개가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나 혈통으로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요한의 회개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틀렸고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혈통으로 하나님이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자신들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이방인들이 받았던 세례를 그들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가르치던 지도자들은 그러한 세례를 거부한 것입니다.

 

2) 지도자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30). 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했습니다. 사실은 백성들보다 이들이 더 먼저 세례를 받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을 잘 알고 가르쳤던 사람들이고 또한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요한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인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그들은 하나님을 옳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뜻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각자의 이유가 있었을 수 있지만 요한의 세례를 거부한 것은 그저 한 사람을 거부한 것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거절한 것이 되었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그 선지자가 분명히 선포했던 하나님의 메시아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요한은 그 삶도 위대했지만 그가 감당했던 사역으로 가장 큰 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곧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큰 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더 큰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28).

먼저 이 말씀은 어떤 식으로든 요한을 낮추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거나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별 것 아닌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요한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고, 그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했기에 분명 칭찬받는 자리에 앉을 사람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을 비교할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에 거하게 되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 그것이 포함되지만 이 말씀은 그렇게 이해하면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쉽게 말해 “(이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시작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 의미로 사용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의 영역, 즉 그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속해 있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오지 않은 것, 약속해주신 것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오면 다릅니다. 예수님 이후로 오면 그 약속된 것이 성취되었습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취된 것, 약속된 것을 믿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요한이 전했던 메시지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길을 준비했던 자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왔으니 그 나라가 임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왕의 사자인 요한이 왔기 때문에, 약속이 성취되고 그 나라가 이 땅에서 성취될 것이라고 요한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메시아가 고난 받고 그 이후에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지자보다 더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봤던 자이지만 그 역시 다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보았던 의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 전에 세상을 떠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요한은 구약과 신약, 약속과 성취의 전환점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이전의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렸고 위대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자입니다. 그러나 약속이 성취된 새로운 시대에 속한 사람은 요한보다 훨씬 더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큰 자들입니다. 이 시대에 속한 사람들이 요한보다 더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린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바라보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계시의 일부만을 보고 있지 않고 계시의 전부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고난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고 승리하심도 알고 있습니다. 그 후에 하늘로 오르셨지만 다시 오실 것도 알고 있고, 언젠가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그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 부분에 대해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하면서 삽니다. 그것 역시 구약의 성도들은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코 성령님께서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며 삽니다. 우리에게 교회가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 어린 아이, 노인,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될 수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서로 세워주고 그 나라를 선포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요한이 의심했던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그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감추어두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고 모든 것이 드러나자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들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동일하게 말씀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0-12). 이 놀라운 구원의 비밀, 메시아의 사역이 우리에게는 드러났습니다.

때로 우린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고, 실제로 한번이라도 예수님을 만나봤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시대에 살아서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나 봤다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세례 요한보다도 큰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많은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무엇을 더 바라고 더 원하기보다, 받은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특권은 다른 한편으로 그만한 책임도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많이 주신 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시대에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자신이 잘못되고 하나님이 옳으심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있었고,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그 구원의 비밀을 다 알고 있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처럼 일부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기만 하면 말씀을 원하는 언어로 읽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내가 옳고 하나님이 틀렸다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내가 틀렸고 하나님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메시아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이 더 필요하지 않습니다.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틀렸고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내어 쫓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들

  • 세례 요한의 삶과 사역을 통해 당신이 배운 교훈은 무엇입니까?
  • 당신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까? 어떻게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 오늘날 우리가 믿는 자로서 받은 복(특권)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그런 것들이 진정한 복인 이유에 대해서 나눠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