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과 그의 예배자
본문 : 시편 24편
설교자 : 최종혁

 

예배는 교회에서 하는 여러 사역 중에 하나로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 조금더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면 가장 궁극적인 교회의 목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단지 성도들이 모여서 찬양하고 만찬 돌리고 말씀 듣는 어떤 ‘행사’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선포하는 모든 것이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기 위해서 창조되었고 그러기 위해서 구원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 삶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좋든 나쁘든 예배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 삶을 통해 높임을 받기도 하시고 낮춤을 당하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아름다운 덕이 선포되기도 하고 그분의 덕이 사람들에게 오해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실제로 하나님이 그런 분이 되시는 것은 아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도 그렇고 그분의 예배자인 우리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제대로 예배할 수 있을까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더욱 알아갈 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진정한 예배, 제대로 된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기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 측면과 각각에 대한 예배자의 올바른 반응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창조의 주님 (1-2절)

하나님은 누구신가?

첫 번째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윗은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주님, 주인이시다, 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로 시편 24편은 시작됩니다. 우리말 성경 중에 카톨릭 성경이 이 순서를 따라서 번역되어 있습니다. – “주님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선포가 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가요?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 우리가 발 디디며 사는 땅, 지구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들도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땅만 하나님의 것이고 하늘은 아닌가요? 바다는 어떠한가요? 지구보다 훨씬 광활한 우주는 어떻습니까? 2절에서 다윗은 왜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간단하게, 하나님께서 이 땅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존재하게 하신 분으로서 이 땅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1절과 2절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 순서에 따라 번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 바로 그가!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 위해 건설하신 까닭이다.”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좀 이상한 표현입니다. 땅의 터가 바다 위에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과학적인 사실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없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둥근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해가 뜬다”라는 표현을 여전히 사용합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말하는 일상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마치 바다 위에 땅의 기초가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실제로는 창세기 1:9-10이 말씀하는 것처럼, 바다가 땅 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볼 때는 마치 땅이 바다라는 큰 물에 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다윗이 주목하는 부분은 (과학적인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땅을 견고하게 두셨다는 부분입니다(“터를 세우심이여… 건설하셨도다”). 땅은 변하지 않는 것,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상징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너무나 거대하여 움직일 수도 없는 이 땅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그 땅의 주인도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 다윗이 하고 싶은 말입니다.

땅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다른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바다, 하늘, 우주도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다윗이 특별히 ‘땅’과 그 안에 있는 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자의 반응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소유권을 의미한다. 만든 사람이 주인인 것은 우리도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누가 무언가를 만들면 그것은 만든 사람의 소유가 됩니다. 그것을 내가 가지고 싶으면 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유권이라는 것은 단지 ‘내가 가지고 있다 없다’의 의미가 아니라, 나의 것이면 내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가끔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우리를 진흙으로 비유합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할 그릇, 관상용으로 사용할 그릇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듭니다. 심지어 만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토기장이의 권리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해서 그런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세상에 주권을 행하십니다. 세상이 움직이는 법칙을 정하셨을 뿐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세우시고 공의로 심판하실 수 있는 권리도 그분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그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때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좋아할 만한 이유 안에서만 인정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던 일, 좋아하지 않는 일이 생기면 상황이 내가 원하는 대로 바뀌어 가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내가 보지 못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딴 사람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선하심이나 인자하심, 사랑, 은혜와 같은 우리가 좋아할 만한 이유들을 제외하고도, 그분의 주권은 인정받아야 마땅합니다. 내가 좋아하든지 좋아하지 않든지 말입니다. 물론 내가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마땅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말이고,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말입니다. “난 나고 내 삶의 주인도 나다”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기본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가장 근본에 있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미 믿고 구원 받은 사람에게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다’라는 생각 말입니다. 참된 예배자의 창조주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더 인정해 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이 언급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거룩하심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3-6절)

하나님은 누구신가?

3-6절에서 다윗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다’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3절에서 던진 질문을 생각해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다윗이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시편 15편 1절과 매우 유사한 질문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할 것을 요구하신다면 예배하면 그만일 것 같은데, 왜 이런 질문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창세기 1장이 창조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던지는 숨겨진 의미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은 그 전부터 이미 계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는 ‘피조물’이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창조주’라고 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예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다르십니다. 우리 인간과도 다르십니다. 그냥 ‘차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피조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피조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옳으시지만 피조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시지만 피조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피조물과 다르다는 것은 피조물보다 월등히, 사실 비교해서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존재시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님을 인간처럼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손이 있으신 것처럼, 입이 있어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말 그대로 단적인 비유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으십니다. 기본적으로 보이는 형상이 없다는 것조차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이 저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영원’이 무엇인지 이해되십니까?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무죄’가 정말 어떤 상태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다른 무엇에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높은 분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예배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누가 그런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까? 예배자의 마땅한 반응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미 시편 15편에서 더 자세하게 다룬바 있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핵심은 ‘거룩’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의롭다 함을 얻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예배자의 반응

1. 거룩을 추구함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마음의 동기와 삶에서의 거룩함을 말합니다. 사람들에게만 칭찬받는 형식적인 거룩이나, 삶으로 증명되지 않는 마음의 동기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의 깨끗함이 손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 손으로 하는 행동은 마음의 동기가 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이 말을 다르게 또 표현합니다.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를 새번역에서는, “헛된 우상에게 마음이 팔리지 않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라고 나옵니다. 성경에서는 ‘허탄한 것’ 혹은 ‘헛된 것’이 종종 우상을 의미한다. 특별히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자기 영혼을 헛된 것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라고 번역할 수 있어서 넓은 의미에서의 ‘우상 숭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그 온 마음을 향한다면 그것은 곧 우상 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만 향해 있어서 삶에서도 정직한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올바르고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올바로 선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며 삶의 거룩을 추구하는 자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입니다.

 

2. 의롭다 함을 얻음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5). 4절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성화’의 모습이라면 5절은 ‘칭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고 구원의 의를 얻은 사람이 예배에 합당한 자입니다. 구원의 의는 하나님께서 주셔야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기준은 우리가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을 찾음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6). 셋째로 이들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하나님의 얼굴 즉 은혜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언급한 사람의 특징은 새롭거나 낯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고,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말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거듭난 자들, 다시 태어난 자들입니다.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얻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창조의 목적이 그러했듯, 거듭남의 목적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거듭남은 새로운 창조로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이런 자들을 찾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고 그들이 예배하는 자가 될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시편 22편이 바로 그 내용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의 올바른 반응은 그 앞에 무릎 꿇고 은혜를 구하는 것이며, 은혜 받은 자로서 더욱 그 은혜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가장 확실한 모습입니다.

셋째로 다윗이 언급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영광의 왕입니다.

 

영광의 왕 (7-10절)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영광의 왕”이십니다. 다윗은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을 전쟁에서 승리한 것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10). 이 상황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 자신의 성으로 들어갈 때, 왕의 전령이 문지기에게 문을 열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문지기의 질문을 통해 문으로 들어가려는 왕이 어떤 왕인지가 분명히 강조됩니다. 문으로 들어갈 영광의 왕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강하고 능하신 만군의 왕이심이 선포됩니다.

이 말씀 때문에 이 시편의 배경에 대해 몇 가지 가능성이 제기된다. 기본적으로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왕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여부스 사람을 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입성하며 혹은 그것을 기념하며 부른 노래라고 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다윗이 언약궤를 블레셋에서 가져올 때 불렀던 노래라고도 합니다. 둘 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배경보다 궁극적으로 이 시편의 말씀이 ‘언제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언제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에 왕으로서 입성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로 성전에서 아침에 제사를 드릴 때, 날마다 시편을 함께 읽었는데 시편 24편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일주일이 시작하는 날, 즉 일요일에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수없이 읽혀진 시편이 24편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시고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면, 그날 예수님을 환영하던 사람들이 성문에서 ‘호산나’를 외치고 있을 때 그날이 일요일이었다면 성전에서는 이 시편이 낭송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그들이 그날 아침에 읽었던 시편 24편의 말씀과 ‘호산나’의 외침과 낭송을 통해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영광의 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읽고 있던 그 말씀과 전혀 다르게 그들은 영광의 왕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이 땅에서의 통치를 시작하실 때 이 말씀은 온전히 이루어 질 것입니다. 승리의 주, 영광의 왕이 통치를 시작할 그 때 이 말씀은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그의 백성들은 한 가지로 반응해야 합니다.

 

예배자의 반응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7, 9).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열고 그분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드는 것’은 성경에서 주로 기쁨을 의미했고 머리를 숙이는 것은 슬픔을 의미했습니다. 기쁨으로 그분을 맞이하는 것이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분을 함께 예배하며 높이는 것이 예배자들이 해야할 마땅한 일입니다. 입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쁨으로 그분을 영접하고 예배하는 것이 예배자가 할 일입니다. 영광의 왕을 높이고 섬기는 것이 예배자의 본분입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나와 그다지 상관없는 사실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생각이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예배자인 나도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삶은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내 마음의 동기, 내 입술의 말, 내 손의 행동 하나하나가 포함되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왕이십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분을 즐거이 영접하여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예배자가 되길 원한다면,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그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 때 진정 우리의 말을 통해, 행동을 통해, 모임을 통해,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