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큰 부자가 된 야곱
본문: 창세기 30장 25~43절
설교자: 이병권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야곱의 자녀들”이라는 제목으로 야곱이 많은 자녀를 얻게 되는 과정을 살펴봤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 자매의 질투와 경쟁이 있었지만, 많은 자녀를 얻은 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허락하신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야곱이 많은 자녀를 얻은 것처럼, 많은 재산을 얻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또한 야곱이 얼마나 큰 부자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 과정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말씀이 지난 시간의 말씀과 연결되기 때문에 제목도 연결해서 처음에는 이렇게 지었습니다. “야곱의 자녀들”에 이어서 “야곱의 가축들” 지난주일 주보에는 “야곱의 가축들”이라고 나갔습니다. “야곱의 가축들”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구제역이나 AI가 생각나고, 오늘 말씀은 동물들이 주인공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바꾸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큰 부자가 된 야곱”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야곱이 큰 부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25-26)
야곱은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셨던 약속, 고향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야곱은 이미 라반의 두 딸을 위해 14년을 성실하게 봉사했습니다. 라반과의 계약에 있어서 자기가 해야 할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1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사위로 대접을 받으면서 지냈던 것이 아니라, 29절에 나오는 표현처럼 라반을 섬겼습니다. 종으로 라반을 섬기며 라반을 위해 일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라반에게 내 아내들과 자녀들을 주기를 부탁합니다. 야곱이 이들의 남편이고 아버지였지만,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야곱의 아내와 자녀들이 라반에게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이 요청에 대해서 라반은 어떻게 합니까? 라반은 요청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27)
라반은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인해 자신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도 분명한 차이를 자신이 경험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면서 얻은 재산을 비교해봤을 때 야곱이 없을 때와 지금 야곱이 있을 때의 결과가 완전히 다릅니다.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야곱이 있으면 뭐든지 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은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야곱이 믿고 있는 그 여호와라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구나!’
이 사실에 대해서 야곱은 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30)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었는데, 지금은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습니다. 야곱의 발이 이르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발을 내디디면 그곳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라반에게 있어서 야곱은 정말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였습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것입니다.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심 많은 라반은 야곱을 계속 곁에 두기를 원합니다. 떠나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야곱에게 마냥 있으라고 우길 수는 없으니 협상안을 내어놓습니다.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28) ‘자네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말해보게나! 내가 들어 주겠네!’
야곱은 이 제안에 대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로 말하기보다 자신이 그동안 라반을 어떻게 섬겼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 라반의 재산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차이를 엄청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라반도 자신의 소유가 번성하게 된 것이 분명 야곱 덕분임을 알고 있기에 다시금 야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잔꾀에 능한 야곱은 자신에게 유리한 협상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품삯을 정하는데, 한 가지 일만 허락해 주시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일하겠다고 말합니다(31).
그럼 야곱이 라반에게 말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야곱이 자신의 품삯으로 요구한 것은 3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32)
야곱의 제안은 이러합니다. 양들 중에서 몸에 아롱진 것, 그러니까 무늬가 있는 양들이나 점이 있는 양들, 그리고 검은 양들은 야곱의 소유가 되고 그렇지 않은 양들은 모두 라반의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소 중에서도 무늬가 있고 점이 있는 것만 야곱의 소유가 되고, 그렇지 않은 염소들은 모두 라반의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양이나 염소를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얼룩무늬가 있는 양, 줄무늬가 있거나 점박이 염소가 생각나십니까? 일반적으로 볼 수 있고, 생각하는 양이나 염소는 흰색의 양이나 염소, 그리고 검은색 염소입니다. 그런데 이런 색깔을 가진 양과 염소는 모두 라반의 것이 됩니다. 양과 염소가 얼룩말이나 호랑이도 아닌데 무늬가 있는 것은 흔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 제안을 하면서 자신이 정직하게 일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데, 라반이 언제든 야곱의 가축들을 돌아보면서 혹시 무늬나 점이 없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훔친 것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품삯이 아닌 다른 양이나 염소는 절대로 가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확률적으로 따지면 누가 봐도 라반에게 유리한 제안입니다. 라반은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아마도 이 협상을 하면서 속으로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일단 야곱이 떠나지 않으니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품삯을 지불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야곱과 라반 사이에 또 한 번의 계약이 더 맺어졌습니다. 그런데 계약이 맺어지고 그것으로 일이 공정하게 진행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욕심 많은 라반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보다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일을 꾸밉니다. “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35-36)
라반은 두루 돌아다니며 가축들 중에서 무늬가 있는 것과 점 있는 것들을 모두 골라냅니다. 그리고 미리 자신의 아들들에게 그 양과 염소들을 맡깁니다. 게다가 무늬 있는 양들이 다른 양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떼어놓는데, 3일이나 가야 하는 거리로 완전히 분리시켜 놓습니다.
일반적으로 무늬가 있는 부모가 있어야 무늬가 있는 아기가 나옵니다. 물론 드물게 무늬가 없는 부모에게서 무늬가 있는 아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아주 낮습니다. 라반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야곱의 것을 주지 않고 자신의 것을 늘리려고 머리를 쓴 것입니다. 야곱을 통해 복을 받되 그 복을 야곱에게는 나누어주지 않고, 자기 것만 챙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욕심쟁이 놀부와 같습니다.
지금 야곱의 상황이 이러합니다. 양이나 염소들 중에서 무늬가 있는 것만 자신의 소유가 되는데, 현재 그런 양이나 염소가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희박합니다.
라반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는 라반의 모습에서 세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원한다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조금 더, 조금만, 조금만 더‘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조금은 언제까지나 채워지지 않습니다. 더 가지려고 하고, 더 쌓아두려고 하는 욕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서 머리를 씁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렇게 이기적이 되어서 나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때때로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도 잠시 마음을 놓으면 다들 그렇게 사는 것처럼 욕심에 따라 엉뚱한 것을 좇아가는 겁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으로 지금 내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허무함에 빠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라반을 보면서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라반의 이런 반칙과도 같은 일을 야곱은 어떻게 대응합니까? 야곱도 나름의 방법을 씁니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37-39)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야곱이 껍질을 벗긴 나뭇가지를 양 떼 앞에 있는 물가에 세워 놓습니다. 그러자 그 나뭇가지를 본 양은 무늬가 있는 새끼를 낳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럼 지금 야곱이 했던 것처럼 하면 누구든 무늬 있는 양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야곱이 사용한 이 방법은 가축이 임신을 할 때, 눈으로 본 것이 아기에게 무늬로 남는다는 당시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과학적인 것도 아니고, 특별한 마술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야곱이 사용한 이 방법이 바로 앞의 이야기에서 나왔던 합환채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임신할 수 없었던 라헬이 임신을 했던 것은 합환채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지금 야곱이 사용한 방법 역시 그러합니다. 그 행동 자체가 뭔가를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사실은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어떤 방법을 써서 자신의 소유를 늘렸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셔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야곱이 또 다른 방법을 썼다하더라도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입니다. 야곱이 사용한 방법으로는 결코 야곱이 원하는 양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에 그가 원하는 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31장에 나오는 야곱의 고백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것입니다.
야곱은 이와 같이 하여 무늬가 있는 양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 일을 더 했는데, 그것은 튼튼한 양을 얻는 일입니다. 야곱은 양들을 모두 무늬 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양들만 자신의 것이 되도록 합니다. 선별하여서 건강한 양이 새끼를 가질 때 무늬가 있는 것으로 만들었고, 그렇지 않은 약한 양이 새끼를 가질 때는 무늬가 없는 것으로 했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하면 야곱은 마치 감별사가 된 것 같습니다. 건강한 양이 오면 무늬가 있는 도장을 꽝 찍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건강하지 않은 양이 오면 그냥 두어서 라반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야곱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오늘의 결론입니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43)
야곱은 이렇게 하여 양 뿐만 아니라, 남종과 여종, 낙타와 나귀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주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도움으로 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부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 머문 기간이 20년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처음 14년은 아내들을 위해 봉사하는 기간으로 보냈고 이 일은 나머지 6년 동안 있었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심으로 야곱은 짧은 기간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많은 자녀를 주시고 또한 많은 재산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고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벧엘에서 야곱과 맺으신 약속, ‘내가 너와 함께하고 보호하리라’는 말씀을 성취해가고 계십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는데, 좀 전에 했던 질문을 생각할 차례입니다. 라반과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나 자신이 라반과 같을 때가 많은데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에서 라반과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믿음의 위기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부와 물질들, 그러한 축복을 얻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나의 힘과 시간을 투자하며 그것에 매여서 아등바등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원하는 것을 나도 똑같이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성공이 무엇인지,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인정하며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의 근원되시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축복과 만족이 나의 능력이나, 나의 어떠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인정하며 그러한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 믿음에 따르는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복주시기로 결정하셨다면, 그 어떤 것도 그분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기로 결정하셨다면, 그 무엇으로도 그 결정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쁜 걸까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든 걸까요? 나에게 필요한 것,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얻으려고 무리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라반과 같이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릴 때도 있고, 야곱과 같이 자신의 것을 챙기려고 잔머리를 굴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십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방향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방향이냐?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이 나에게 부를 허락하시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해서 잘 사용하면 됩니다. 반면에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이 나에게 부를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주신 것 그 안에서 만족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얼마나 지혜롭게 잘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다윗이 목자 되신 주님으로 인해 어떤 고백을 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우리는 없어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고민합니다. 부족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많아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 아닌데, 나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데’ 라고 속으로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지금 나에게 없는 것들이 생각나십니까? 여러분, 믿음을 가지십시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정말 필요한 건데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합당한 때가 되면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말씀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에게 주신 것에 만족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