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큰 물보다 크신 여호와

본문: 시편 93편

설교자: 최종혁

큰 물보다 크신 여호와 (시편 93편)

복습

  • 대관령 양떼 목장 :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1-2절)
  • 미세먼지 없이 맑은 겨울 밤 : 8편,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3절)
  • 정동진 해돋이 : 19편,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4-5절)
  • 천둥 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질 때 : 29편,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3절)
  • 봄에 모내기를 하거나 가을에 추수할 때 : 65편,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9절),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11절)
  • 밤에 산책하다가 동물을 발견했을 때 : 104편,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20절)

이 외에도 많은 시편이 우리가 경험하는 피조 세계를 통해 창조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편 93편도 그런 시편 중의 하나다. 시편 93편을 묵상하기 가장 좋은 때와 장소는 아마 큰 파도가 치는 날 바닷가일 것이다. 모래사장보다는 해안 절벽 같은 곳이 더 적절할 것이다. 끊임 없이 밀려오지만 결국은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 시편 93편을 기록한 저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그 메시지도 더 마음에 와닿을 것이다.

시편 92편은 ‘안식일의 찬송 시’로서 안식일인 토요일에 불려졌는데 93편은 바로 그 전날인 금요일에 불려졌다. 그래서 원래 사본에는 표제가 없지만 70인역의 표제에는 “안식일 전날, 땅이 채워졌을 때. 다윗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본에 추가된 표제이기에 모두 신뢰할 수는 없지만, 이 시편이 후대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되어 있고 그 창조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찬양한다.

오늘날 ‘창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진화’의 반대말 정도로만 인식되기도 한다. 세상이 빅뱅과 진화를 통해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는 정도의 생각에 머무는 것이다.  창조를 단순히 ‘시작’하고만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창조는 어차피 끝난 일이고 지금과는 별 관계가 없는 일이 된다. 이신론적인 사고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시작하셨지만 그후로는 크게 혹은 전혀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창조 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진화론’ 못지않은 사탄의 속임수다. 창세기 1-2장은 단순히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만을 말하려고 기록된 것이 아니다. 특히 시편을 읽어 보면 앞서 언급했던 그런 창조와 관련된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오늘 시편의 첫 구절, 첫 두 단어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1절)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말은 곧 여호와께서 왕이시라는 의미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모든 것 위에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는  왕으로서 그분의 확고한 법에 따라 심판하기도 하시고 구원하기도 하신다.  이 사실을 선포하며 그에 합당하게 반응할 것을 요구하는 시편이 시편 93편에서 시작하여 100편까지 이어진다.

이 시리즈에서 94편과 100편을 제외하는 경우도 많지만(왕 혹은 다스린다는 표현이 없음) 내용 상 분명한 연결점이 있다. 그 연결점이 바로 ‘창조’다. 94편은 여호와께서 세계를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이 확실하고 공의로운 이유를 하나님의 창조에서 찾는다.

94:9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100편의 경우 95편 6-7절의 말씀과 거의 유사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에 마땅한 기쁨의 찬송을 드려야할 것에 대해서 말한다. 즉 시편 93-100편에 기록된 시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진리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세상의 왕이심을 의미하고 우리에게 그에 합당한 경배를 요구한다. 이 사실을 오늘부터 이어지는 8개의 시편을 통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먼저 시편 93편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 하나에 집중한다. 그래서 사실은 “다스리시니”라고 문장을 이어가기보다 “다스리신다”로 문장을 끝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는 선언이며 선포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선언 :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1-2절)

“여호와께서”(1절)

우리말과 다르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는 동사가 먼저 온 후에 주어가 온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있다. 96:10; 97:1; 99:1도 마찬가지다. 모두 순서가 바뀌어 있다. 우리말 문장에서도 순서를 바꾸면 이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다스리신다, 여호와께서!”

즉, 시편 기자는 가장 먼저 누가 다스리는지를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근본이 되는 진리이면서 곧잘 많은 사람이 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 혹은 무엇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고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많은 신들이 있다고 믿었고 그들이 다스린다고 생각했다. 최고신이나 신들의 왕 같은 개념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신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때로 사탄을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찾다가 가끔 보는 그림 중 하나가 하나님(예수님)과 사탄이 팔씨름을 하는 그림이다. 뭔가 선과 악의 대결 같은 느낌을 주려고 그린 그림이겠지만, 사실 말도 안되는 그림이다.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과 비슷한 힘이나 권위를 가지고 대등하게 싸우는 것은 아니다.

욥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탄은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 활동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귀신들의 반응을 봐도 그렇다. 그들은 그들의 대장인 사탄에게 예수님을 좀 어떻게 해달라고 하지도 못한다. 단지 예수님의 자비를 구했을 뿐이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통해 계속해서 배우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싸움은 사실 싸움이 아니라 심판의 기록이다. 사탄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인간 왕들은 어떨까? 유대인들은 어쩌면 그들이 다스린다는 느낌을 더 받았을 수 있다. 애굽에서의 경험이 그랬을 수 있고 솔로몬 이후 분열 왕국을 거치고 포로기를 경험하면서 그랬을 수 있다. 거대한 제국의 왕들은 스스로를 신 혹은 신의 아들로 칭하기도 하면서 주변의 나라들을 굴복 시켰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경험하면서 그 왕들이 다스린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다니엘서가 이런 생각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반박이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이루어가실지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말씀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느부갓네살을 통해 증명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직접 경험한 후에 느부갓네살 왕은 이렇게 고백했다.

4:34–35 …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 유럽과 같은 나라들이 세계의 경제를 흔들고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 같아도, 인간 왕이 아닌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어떤 환경이나 혹은 정해진 운명, 아니면 우연과 같은 것이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환경이라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환경이고, 운명이라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운명이다. 우연이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고 하시는 일들이 우리에게 우연처럼 보일 뿐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마지막으로 ‘나’는 어떨까? 내가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내 삶은 내가 다스리는게 맞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대로 내가 선택하고 계획하며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이니까, 내가 다스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직하게 답해보라. 정말 내가 원하는대로 되었는가. 내 계획은 다 이루어졌고 내 선택에 후회해본 적은 없는가.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없고 내 삶을 어떻게든 해야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내 삶을 통제할 수 없고 그냥 사니까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은 없는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 삶조차도 내가 다스리지 못한다. 그럼 누가 다스릴까?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139: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0:29–31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참새의 삶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날에 대한 계획이 있으시고 그 계획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우리의 머리카락 수도 하나님은 아실 정도로 내 삶의 구석구석을 다스리신다. 정확하게 세심하게 다스리신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이것이 감시 카메라처럼 느껴진다면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것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내 손을 떠난 것 같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원래부터 내가 아니라, 그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이다.

“다스리시니”(1절)

다음으로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에서 “다스리신다”를 살펴보자. 1-2절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특징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권위와 능력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1절)

1절은 여호와께서 옷을 입고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권위를 입으셨고, 능력의 옷을 입으셨고, 띠를 띠셨다. 이는 왕이 왕으로서 복장을 차려입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어느 시대의 어느 나라를 다루고 있든지 상관없이 누가 왕인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굳이 오가는 대화나 상황을 통해 추리할 필요가 없다. 입고 있는 옷만 보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왕은 대개 가장 불편한 옷을 입고 있다. 저렇게 입고 움직이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의 복장을 하는 경우들도 있다. 실제로 왕의 역할은 자신이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실용성보다는 상징성을 강조하는 옷을 입는다. 아무나 입을 수 없는 옷을 입는다. 가장 귀하고 비싼 재료로 만든 옷을 입는다. 화려한 옷을 입는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시편 기자가 묘사하고 있는 왕이신 여호와의 모습이 그렇다. 다만 확실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그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실용성 없이 불편하고 화려하기만한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권위 자체를 입고 계시고 능력 자체를 띠 띠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 왕은 아무리 값비싸고 화려온 옷을 입어도 권위와 능력이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 있어 권위와 능력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에 속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나타내고 과시할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권위와 능력으로 다스리는 왕이시다.

하나님의 권위에 맞설 존재는 없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항할 존재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우리말 성경 번역에는 거의 빠져있는데, 이 표현 앞에 “참으로, 실로”와 같은 단어가 있다. 하나님께서 권위와 능력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에 세계가 질서있게 유지된다는 의미가 강조되는 것이다.

여기 “세계”는 땅, 지구와 같은 물리적인 세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이 세상,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 안의 질서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을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안식하셨지만 세상의 일에서 손을 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돌보시고 지키고 계시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은 그 권위와 능력으로 다스리고 계신다.

과학자들은 발견은 하지만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작년에 중고등부에서 창조 과학을 배우면서, 지구가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 즉 태양에서 이 정도의 위치를 유지하며 공전하는 것이 정말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배웠었다. 조금만 가깝거나 멀어도 지금 같이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내용을 적은 한 블로그를 읽었는데, 결론은 이러했다. “46억년 전에 우연의 결과로 만들어진 기적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누구에게 감사한다는 의미인지 모르겠다. 우연의 결과라면 우연에게 감사한다는 의미가 될텐데, 우연에게 감사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경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한다. 이 절묘한 위치에 지구가 존재하는 이유, 수천년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 약 23.5도 기울어져서 시속 약 1600km로 자전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어쩌다 운좋게 그렇게 되서 우리가 살고 있는거고 어쩌다 운이 나쁘면 이 모든 것이 멈춰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멸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고 그렇게 다스리고 계시다. 지구가 멸망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서 혹은 무엇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다. 하나님께서 “이제 끝이다”라고 하지 않으시는 한, 세계는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다른 모든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 질서나 도덕, 영적인 질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 죄는 하나님의 질서를 흔들고 무너뜨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 남녀의 역할에 대한 가치관, 선과 악에 대한 가치관 등 그 어떤 질서도 실제로 무너지지 않는다. 시편 94편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 질서를 무너뜨린 자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권위와 능력으로 다스리신다.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신다. 그냥 대충 생각날 때 한번씩 잘 돌아가고 있나 점검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이치에 맞게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이치를 만드시고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운좋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권위나 더 큰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이런 하나님의 통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의 둘째 특징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언제나 영원히 다스리신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보좌”는 왕권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언제부터 다스리셨을까? 시편 기자의 대답은 이렇다.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되던 때부터 견고히 다스리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으로서 언제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다스리셨고, 다스리고 계시고, 다스리실 것입니다.

전반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것이 맞지만, 언제나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는 말 할 수 없을까? 그렇지 않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포로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이 선언을 되새기고 되새겨야 했을 것이다. 나라를 잃었던 그들에게는 마치 하나님이 다스리기를 멈추신 것 같은 상황이 펼쳐졌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대적에게서 그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단 한번도 세상을 다스리기를 멈추신 적이 없다. 애굽에서 그들을 구하셨던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광야에서 그들을 심판하셨던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신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그들을 포로가 되게 하셨던 분도 하나님이시고 다시 본래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다스리기를 멈추신 적이 없다. 다만 그들이 원하는 모습과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우리도 비슷한 상황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지금은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진리를 되새겨야 한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권위와 능력으로 언제나 영원히 다스리신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고 확신이 없다면, “여호와께서 정말 다스리시는가?”하는 의문이 생긴다면, 이제 3-4절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바닷가 절벽에 (위험하지 않은 곳) 가서 이 말씀을 묵상해 보라.

시험 :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3-4절)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3절)

이 구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큰 물”과 “높인다”라는 표현이 3번 반복된다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큰 물”은 강이나 홍수, 혹은 바다도 의미할 수 있는 단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큰 물”이라는 번역이 적절한 것 같다. 여기서는 “높인다”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에 바다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시편 기자는 큰 파도가 계속해서 몰려오는 상황을 연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고대의 바다는 사람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통해 유익함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큰 풍랑과 파도는 그저 만나지 않기를 바랄 뿐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바다와 관련된 미신들이 많은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있다.

이런 거대한 파도 앞에서도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편 기자는 그렇다고 답한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4절)

파도가 아무리 높을지라도 여호와는 더 높은 분이시고, 파도가 아무리 클 지라도 여호와의 능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증명해 주는 말씀이 있다.

욥기의 끝에서 마침내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 욥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그동안 참 힘들었지? 이런 이런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너에게 이런 일이 있었던거야”라고 욥을 위로하고 격려해주실 것만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을 쏟아 부으셨다.

38:3–5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앞서 우리가 말했던 세계의 질서에 대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누가 세계의 질서를 세웠는지를 물으시면서 하나님이 주권자이며 왕이심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 중 하나가 이것이다.

38:8–11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11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창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주 셋째 날에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셨고, 바다는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없다. 높은 파도가 쉬지 않고 육지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 언제라도 그 경계가 무너질 것만 같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높은 파도는 결국 부서지고 멈춘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을 넘어갈 수 없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큰 물보다 하나님이 크시다. 비할 수 없이 크시다. 큰 파도는 그 엄청난 소리와 힘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크신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 앞에 큰 물은 그냥 물일 뿐이고 자기 앞에 붙은 “크다”는 형용사를 부끄러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저 말씀이 욥의 고난에 대한 답이 되어야 했던 것처럼 “여호와께서 정말 다스리시는가?”라고 질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답이 되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하나님이 정말로 다스리고 계시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넘쳐난다. 바다를 보고, 땅을 보고, 하늘을 보라. 나 자신을 보라. 성경이 말하는 창조의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없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고 있지 않다면,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파도에게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라고 주권적으로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하신다. 욥에게도 그렇게 하셨었다. 욥 자신은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도 했었지만, 하나님은 정확하게 시험의 한계를 정하셨고 욥이 견뎌내게 하셨다.

하나님이 다스리시지 않는 것 같은 우리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다스리고 계신다. 우리가 보고 있지 못할 뿐이다. 큰 물 사이에 있어 하나님을 보고 있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큰 물보다 크시기에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볼 수 있다. 우리가 혹 보지 못할지라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큰 물보다 크셔서 여전히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이런 확신 가운데 시편기자는 마지막 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확신 :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5절)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5절)

“주의 증거”는 좀 더 일반화된 표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확실”하다. “매우” 확실하다. 사람이 하는 말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믿을만한 사람이 하는 말도 100% 그 말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이 변할 수도 있고, 혹 사람은 동일해도 상황이 변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약속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선다(사 40:8).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룬다(사 55:11).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고 그래서 믿을 수 있다.

이런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에 합당한 것은 “거룩함”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거룩하다. 그 어떤 불의도 없고 부정도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에 대한 확신 가운데 시편 기자의 마지막 말은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이다. 사실 5절 가장 앞의 “여호와여”가 여기에 있어서 “여호와, 만세”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인간 왕이라면 ‘만세’가 긴 시간을 의미하겠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영원무궁”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함을 선포하는 것이다.

도전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성경은 너무나 명확하게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정말 그렇게 세상을 보며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큰 그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 삶의 가장 작은 부분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내 삶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듯이 말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 아무 일이 없을 때도 그렇고, 삶에 큰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올 때도 그렇다. 우린 너무 왕이신 하나님과 관계 없는 사람들처럼 산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말이 우리에게 의미 없는 말이 되어서는 안된다. 말씀과 피조물을 통해 계속해서 경험하고 듣고 있는 이 말을 의미 없는 말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먼저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로 격려를 받으라. 부활의 소망이 있으면서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슬퍼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큰 물보다 크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슬퍼하고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언제나 다스리신다. 그러니 힘을 내라.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는 그 온전한 통치를 기다리면서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임을 기억하라.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왕이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확실한 말씀을 주신 왕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큰 물만 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보다 크신 여호와가 계심을 우리 삶으로 선포하며 살아야 한다. 감사의 대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야 한다. 그것이 먼저 영원한 왕 앞에 무릎 꿇고 그 아들에게 입맞춘 우리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