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본문 : 누가복음 2:8-14
설교자 : 최 종 혁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살다보면 어떤 소식을 기다리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작게는 인터넷 쇼핑을 하고 택배를 기다리기도 하고, 크게는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시험을 보고 그 결과를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그 소식의 중요도가 높아질수록 기다림도 커지고 그 결과에 대한 반응도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들으면 너무나 기쁘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실망에 빠집니다. 본문의 10절에는 천사가 전해준 기쁜 소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이 기쁨의 소식은 어떤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선포되는 장면과(8-10), 그 소식의 내용(11-12), 그리고 그 소식에 대한 천사들의 반응(13-14)입니다.
8절은 “그 지역에”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는 베들레헴입니다. “거기 있을 때에”(6절), “다윗의 동네로 올라가니”(4절).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킬로 정도 내려온 곳으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을 흔히 ‘다윗의 동네’라고 말합니다(4절,11절). 이곳이 다윗이 태어난 곳이고 그가 왕이 될 때 기름부음을 받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다윗 왕조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은 양치기였던 다윗을 연상시킵니다. 이곳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익히 알던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요한복음 7:41-42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논쟁할 때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였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7절). 그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메시아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성취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알았던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 2:6). 이스라엘을 다스릴 ‘목자’, 메시아가 예언되었고 그 소식이 목자들에게 전해지는 상황입니다. 당시 목자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았고 그렇다고 천대받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평범한 날은 사실 인류 역사상 가장 평범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9절). 그들의 평범한 일상에 어떤 모르는 사람이 곁에 서고 그에게서 뭔가 특별함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천사가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것은 손에 꼽을 만한 드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특별한 메시지가 있을 때 그렇게 나타나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와 같은 자가 올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말 4:5-6). 그후로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침묵하신 것입니다. 그 침묵이 깨진 것이 바로 누가복음 1:11, 즉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셨을 때입니다.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그 날에 400년의 침묵이 깨졌습니다. 말라기에서 예언하셨던 것에 대해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눅 2:26-38). 그리고 다음으로 천사가 나타난 것이 이 장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때에 가서야 다시 천사가 등장합니다.
목자들의 평범한 하루는 끝이 났습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9절). 구약성경을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 땅에 임재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성경은 ‘주의 영광이 임했다’는 표현을 쓰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막을 짓고 그 일을 마쳤을 때, 또한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했을 때 그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출 40:34-38; 왕상 8:9-11).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신 곳에 임하셨을 때 그러한 일, 영광이 임하는 일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성전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역하는 일들을 행했던 것입니다. 여러 번의 경고에도 듣지 않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겔 9:3).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나가려고 문지방에 이른 것입니다. 그 영광이 에스겔 10:18-19에 이르면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곧 그 영광은 성전 밖으로 나와 산에 머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겔 11:22-23). 주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범한 목자들이 양을 치고 있던 어느날 밤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목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합니다. 그들은 크게 무서워합니다(9절). 그것은 너무나 두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을 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입니다. 사가랴도 그러했고 마리아도 그러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절). 심판의 메시지나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하곤 했던 천사들이, 이제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이 좋은 소식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승전보를 전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 군이 승리하면 적들의 공격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므로 이 말은 구원을 의미하기도 하고, 왕의 후계자가 태어났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목자들은 아마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천사들은 이 소식이 그들에게 뿐만 아니라 온 백성에게 미치는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400년의 침묵을 깨시고 천사를 보내시며, 이스라엘을 떠났던 영광이 돌아와서 전한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절).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오늘”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예언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하셨다가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셨으며, 그들 중에 유다 자손으로, 또한 그들 중에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범위를 좁혀가셨습니다. 그 메시아가 어떤 일을 할 것이고 그의 성품이 어떠할 지에 대해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예언들은 마리아에게 전해지는 천사의 말로 이어집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이것이 가장 확실한 마지막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가 한 말은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오늘’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수천 년 동안 말씀하셨던 메시아가 오늘 태어난 것입니다.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태어나셨습니다. 누가는 이 아기를 “구주”, “그리스도”, 그리고 “주”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구주”(구원자)는 하나님을 지칭하던 표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 하나님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았을 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도다”고 말하는데 아마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후손이 태어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구원자가 아니라 인류의 첫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라멕은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고 했는데, 그 아들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자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자가 아니었고, 그를 통해 구원의 그림자만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이제는 그 구주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예수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구원자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자신들을 구원할 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보다 큰 구원자였습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영적인 구원자이고, 하나님을 떠나 즐거운 듯, 행복한 듯 살며 죄 가운데서 지옥을 향해 가는 자들을 구원할 자이며, 죄의 종노릇하면서 그것도 알지 못하던 자들을 해방할 자,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할 자입니다. 이보다 좋은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당시에는 황제들도 스스로를 ‘구원자’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목자들은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천사는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메시아, 곧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지위를 줄 때 권위 있는 사람이 그에게 와서 기름을 부어주었습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지위는 제사장, 선지자,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아로서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직무를 수행하셨습니다. 제사장으로서 인간과 하나님의 중보자가 되셨고,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으며, 왕으로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십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대적하려고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그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예배하는 자가 그의 보호하심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예수님은 왕이셨습니다. 인간 왕들 중 하나의 왕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궁극적인 왕조를 세우셨습니다. 이 땅에서 세우셨고 다시 오실 그날에 온전한 모습을 갖출 것입니다.
“주”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말을 19번 사용하면서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습니다(1:6, 16, 32, 46, 68). 그는 예수님을 주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이 땅에 구주가 오셨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 주이신 분께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쁜 소식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기쁜 소식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11절). 이 소식은 목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0절에서는 “온 백성에게 미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떨까요?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30-32). 이 기쁜 소식은 목자들만, 또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을 포함한 만민에게 미칠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내가 너를 복주겠다”고 하셨고,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 소식이 과연 나에게 필요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 어쩔 수 없는 죄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어서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율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심판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심판 아래 있으므로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12절). 이 위대한 소식을 전해준 위대한 아이의 특징은 그가 구유에 뉘어있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구주, 온 세상의 주인이 태어났는데 작은 마을에 말구유에 뉘인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해준 것입니다. 천사가 목자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었고 천사들은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13-14절). 하늘의 군대가 이 땅에 평화의 소식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일이 이제 이뤄지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인 평화로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 죄로부터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6-17).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천사들은 이 놀라운 일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타락을 보았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하셨던 일들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 일의 절정이 되는 구세주의 탄생을 보고 찬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뉴스를 보니 많은 종교계 인사들이 예수의 나심을 축하하였습니다. 우리도 아기 예수를 본받아서 이 땅에 평화와 사랑, 겸손을 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좋은 본이 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더 사이좋게 지내라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계속 지니고 살아온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기 예수의 나심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 하늘의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누가 이런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 그 앞에 무릎 꿇는 사람들, 그분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신 사람에게 이것이 정말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다.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면서 트리에 달린 작은 아기 예수를 생각하시지 마시고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