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초조해하지 말라 Part I
본문: 시편 37편
설교자: 최종혁
1절에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또한 7절에도 “불평하지 말지어다”, 8절에도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불평하지 말라는 말은 다른 번역본에서 “안달하지 말라”(현대인), “초조해하지 말라”(우리말, 한킹)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어는 ‘열을 내다. 화를 내다’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상심하지 말라’, ‘화내지 말라’고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 침착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하고 더 나아가 열(화)을 내는 모습을 말합니다.
저희 집에 꼬마 아이가 이런 행동을 많이 합니다. 먹고 싶고 하고 싶어 할 때 그것을못하게 하면 입을 삐쭉 내밀고 발을 동동 구릅니다. 한쪽으로 걸어가서 장난감을 툭 칩니다. 나중에 아이의 머리를 보면 열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고 싶어서 간절히 원해서 열을 내고 화를 내고 불평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언제 그렇게 할까요? 초조해 하고 안달할까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그렇게 합니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을 때 그렇게 합니다. 나중이 아니라 당장에 그것을 원할 때 그렇게 합니다. 그것이 초조함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그렇게 할까요?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자주 그런 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다고 말합니다. 주의 말씀을 사모해서 입을 열고 헐떡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은 지나침이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 아닌 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재물을 원하고 명예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기 원하고 나의 행복을 원합니다. 결국 나의 만족, 나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하나님 안에는 없고 세상 속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의 많은 것들을 통해 그런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 속에는 그런 것들을 이룬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충분히 잘 살고 충분히 행복해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나의 삶보다는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살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계속 손해만 보면서 사는 것 같고,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사는 저 친구는 계속 좋은 일만 있고 행복해 보입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회의감이 찾아 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옳은 일인가? 회의감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편 37편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초조해하지 말라. 이 명령을 부정형과 긍정형의 다른 명령들을 통해, 우리가 이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은 답관체입니다. 우리말의 가나다순으로 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 시편의 공통점은 전체의 주제는 이해할 수 있으나 부분으로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일관성 있는 흐름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문을 부정형의 명령과 긍정형의 명령으로 나눠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부정형 명령과 이유 – “하지 말라”
시편 36편에서 저는 ‘아는 자들의 세상 보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악인이 어떤 자인지 알아야 하고 하나님이 어떤 자인지 알아야 하며,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알아야 하고 그들이 사는 현실이 어떠한지 알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현실 속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더 많고, 그렇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직하게 살려는 자들에게 유혹과 시험이 됩니다.
부정형의 표현들을 보면, “불평하지 말며”, “시기하지 말라”(1절), “불평하지 말지어다”(7절),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8절)라고 말합니다. 이 명령들은 각각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시편 기자는 하나의 상황에 대한 반응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상황일까요?
불평하지 말라, 시기하지 말라는 어떤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불의를 행하는 자들”(1절)을 시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일반적인 모든 상황에서의 불평이나 시기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악, 불의를 행하는 자들 때문에 생기는 불평(초조함), 시기, 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일 때문에 불평하게 되고 시기하게 되고 분노하게 됩니다.
악인들의 악행에 대하여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를 향하여 그의 이를 가는도다”(12절) 악인들은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자를 치려고 계략을 짭니다. 짐승들이 으르렁 거리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악인들이 의인을 잡으려고 함정을 만듭니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14절),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32절). 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약한 자들을 넘어뜨리고 그들을 반대하는 자들을 멸망시키고자 합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풍요를 누리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좋은 예가 헤롯입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요한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결국 죽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막고 있는 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21절). 꾸고 갚지 않는 것은 탈취입니다. 도둑질이고 강도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으로 끝인 것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속에 있는 죄악된 본성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좋게 포장을 하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감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힘을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 사용하고 그것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여 결국 자신의 부와 명예를 쌓습니다. 이것이 악인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의인, 정직한 자들이 이런 일을 보고 실제로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떨까요? 그 상황에 대해서 불평하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상대방의 악함 때문에 생기는 이런 일들에 대해서 억울해 하고 그 억울함을 풀기 원할 것입니다. 그것은 맞서서 싸우는 것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화풀이 대상을 찾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37편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8절)고 말합니다. 악한 일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을 우리는 ‘의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말 그런지 잘 생각해 봐야합니다. 다른 사람의 악한 일로 내가 어떤 피해를 당했을 때 그것에 대해 분노할 때 그것이 정말 하나님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손해를 입었기 때문인지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실제로는 그것 때문에 내가 손해보고 억울한 것인데, ‘하나님 때문에’라고 단지 변명을 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분노의 감정은 매우 강력해서 우리를 주관하기 쉽습니다. 의분에서 시작된 것이 보복으로, 죄악된 분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시원치 않고 답답함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평,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그런 분노를 그치고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의 형통에 대하여
또 하나 이 세상에서 정말 믿는 자들에게 시험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악인들이 형통한 것은 의인들에게 시험이 됩니다.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7절), “악인의 풍부함”(16절),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의 무성함과 같으나”(35절).
다윗은 악인들이 이렇게 형통한 경우가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악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35절에서 다윗은 그런 경우를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의 무성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무마나 특징이 있고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이 있는데 아주 딱 맡는 토양에 심긴 나무처럼 악인들의 세력이 그렇게 무성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진짜 시기는 여기서 옵니다. 악인들이 악을 행하고 악한 생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항상 결과가 나쁘게 나온다면, 우리는 그들의 악행 때문에 힘들어 할 수는 있어도, 불평이나 나아가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악인들이 더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악한 생각이 실패하고 그들이 창피를 당해야 정상인데, 오히려 그것들이 이루어지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이뤄지고 악한 일을 통해 얻어낸 결과를 사람들이 높이고 그것을 그가 행복하게 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기’에 대하여
‘시기’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에서 옵니다. 무언가를 원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나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도 ‘하나님만’ 사랑 받고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시다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의 특별한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배타적’이어야 합니다. 그 관계의 배타성이 깨지면 오히려 문제가 됩니다. 성경은 일부일처를 말하고 있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나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죄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시기’는 특별히 다른 사람이 가진 것, 혹은 그가 경험하는 것이 나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를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시기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내가 아닌 그 성도 혹은 그 사람에게 그런 일이 있는지에 대해 분개하고 억울해 할 때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어떤 것이 나에게 (더) 합당하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나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시기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남편을 존경하는 아내와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런 관계를 보며 나도 저런 관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선한 소원입니다. 그런데 내가 더 성경도 많이 읽고 기도도 많이 하고 교회에서도 일도 더 열심히 하고 하는데, 왜 내 아내는 저 아내만큼 나를 존경해주지 않지라고 생각하면 시기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결혼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뭐가 부족해서 좋은 형제, 자매를 만나서 결혼하지 못하지? 저 사람은 나보다 뭐가 나아서 저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고, 나는 이렇게 집에서 구박 받으면서 살고 있지라고 생각한다면 시기의 죄입니다.
직장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승진을 보면서 나도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승진을 했어야지 맞는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시기입니다.
학생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원하기도 하지만, 어떤 친구와 내가 제일 친한 친구가 되기를 원할 때도 있습니다. 나보다 다른 친구가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더 가까우면 그것 때문에 시기의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기의 죄가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시기의 죄는 더 심각합니다. 시기의 대상이 ‘악한 일을 통해 형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이 악한 일을 통해 얻어낸 것을 가지고 시기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입니다.
기본적으로 의인이 악한 일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노략하고 멸망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의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의인들도 형통한 것은 좋아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과정에 대한 부러움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부러움이지만,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 나도 그런 과정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바로 유혹의 시작이고 그 생각을 따라가게 하는 것이 바로 시기라는 죄가 원하는 궁극적인 결과입니다.
직장에서 승진을 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된 방법으로 승진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며 나도 그러기 원한다면 시기의 죄가 됩니다. 직장의 누군가가 상사에게 뒷돈을 건네서 승진할 수도 있습니다. 부하 직원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자신의 것으로 속이고 성과를 내서 승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승진을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승진을 못하면 직장을 나가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면 가정의 경제에 어려움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냥 눈 딱 감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어떤 사실을 인정하면 나에게 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말로 상황 모면하려고 합니다. 때로 우리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합니다. 누군가 하라고 한 일을 내가 깜빡 잊고 하지 않았을 때, 정직하게 “제가 잊어 버렸습니다. 제 잘못입니다.”라고 말하기보다, 듣지 못했다거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상황을 모면하기에 좋습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잘못을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거짓말로 책임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나 혼자 사실을 말하고 책임을 다 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유혹이 생깁니다.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는 야외에 나가서 실습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일에 너무 더워서 밖에 나가기가 싫었습니다. 반장이 우리가 못들었다고 하자고 했습니다. 10분 정도 지나서 선생님이 땀을 흘리면서 올라오셨습니다. 왜 안 나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반장은 못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일로 단체기합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반장, 부반장을 지목했는데 모두들 못 들었다고 했습니다. 다음은 제 차례였습니다. 나는 분명히 들었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까 수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실제 많은 청년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자매, 형제가 믿지 않는, 하지만 사회적인 조건이 정말 괜찮고 인격도 훌륭한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사는 것을 보면 청년들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까요. 그리고 그 믿지 않던 사람이 금새 믿고 구원 받게 되면 더욱 그런 마음이 생기고 자기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생깁니다. 나도 저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눈 한번 딱 감고 이번만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면 나머지는 나에게 따라올텐데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실제적인 유혹과 시험이 그리스도인들 앞에 산재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지만 이런 유혹들을 계속해서 만나게 됩니다. 약간의 타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게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 알지만, 그래도 다들 그렇게 하니까.. 이렇게 해야만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 등등의 유혹이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 의인들도 그들의 삶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긱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세상에서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고, 의인들조차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 악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 유혹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잘되는 것 같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더 큰 유혹이 됩니다.
이런 유혹이 있을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바로 시편 37편에 나오는 부정형의 명령들입니다. 시기하지 말라! 불평하지 말라!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호한 명령들입니다.
결과가 과정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내가 잘못된 과정을 선택한 것이 정당화 되지 않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과 위주의 가치관, 성과 중심의 사고에 묶여서 그런 신앙생활을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신실함’이지 ‘결과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신실하게 행하면 합당한 것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신실한 자들에게 보상하십니다. 때로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것 자체도 죄악된 것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악인들이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2절). 악인들이 그들의 악한 행동을 통해 얻는 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그들의 풍성함이 지금 우리 눈에 보이고, 그것이 진짜고 그것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부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을 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분노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이들은 소꿉장난을 하면서 싸웁니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참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그것을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다.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기의 죄는 우리와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시기는 우리를 또 다른 죄로 이끕니다. 혹해서는 안 됩니다.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은 결코 잘못 사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면, 결과가 어떻게 드러나든지 사람들이 그것을 뭐라고 말하든지 그것은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불평하거나 시기하거나 분노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