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연약함

본문 : 로마서 7장 13~25절

설교자 : 이병권

종교개혁가 루터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전에 수도원에서 생활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고해성사가 있었습니다. 신부가 신자의 죄를 고백 받고 중보자로서 그 죄를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루터는 정말 최선을 다해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기 원했습니다. 악한 생각이 들 때마다 신부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했고 용서를 받고 돌아온 후에도 또 다른 악한 생각이 들면 그럴 때마다 다시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백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하루에 여섯 시간동안 고해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에서 열심히 경건을 추구했던 사람이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을까요? 그만큼 루터는 죄에 민감했습니다. 마음의 작은 죄도 그에게는 크고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죄를 지을 때마다 자신의 연약함에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존재의 연약함에서 나오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루터의 연약함이 루터에게만 고통이 되었을까요? 루터의 고백을 듣는 신부에게도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신부들은 루터의 고해성사를 서로 미루었다고 합니다. 어떤 신부는 고해성사 중에 욕을 하며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루터라는 존재로 인해 감수해야 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피곤함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부의 입장에서 단골도 이런 단골이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올 때도 있고 와서 고백하는 죄를 들어보면 사소한 것뿐인 것 같습니다. 어떨 때는 몇 시간씩 앉아서 죄를 고백하는데 루터가 와서 고해성사를 하고 나면 자신도 다른 신부에게 가서 ‘오늘 루터가 다녀갔습니다.’ 하며 고해성사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죄를 고백하는 루터나 그 고백을 듣는 신부나 모두 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생기는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루터의 모습이 과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죄에 대한 그의 태도는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상대적으로 우리는 죄 용서 받았다는 사실만 크게 생각해서 내 기준으로 죄의 크기를 판단하고 죄를 가볍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내 기준으로 죄를 구분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죄는 크든 작든 상관없이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죄에 대한 판단과 심판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조금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으며 죄에 민감한 사람들을 보면서 교훈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루터가 그런 면에서 도전이 되었다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도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도전과 교훈을 줍니다.

바울은 7장에서 율법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율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본문에서는 율법과 죄와의 관계를 말하며 율법은 죄가 아님을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요약됩니다.

롬 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지만 율법은 거룩함과 의로움과 선함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의 관심은 조금 더 ‘나’에게로 모아집니다. 왜냐하면 결국, 율법과 죄의 관계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의 그 경험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경험이 또한 우리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경험을 그의 짧은 고백을 중심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의 짧은 고백을 본문의 표현 그대로 하면 “노니”입니다. 세 번의 노니를 살펴볼 텐데 기억하기 쉽게 3노니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노니”, “알지 못하노니”, “깨달았노니”

그런데 3노니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어려운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고민이 많이 되었던 부분이고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단락은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많은 논쟁이 되는 부분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나’를 어느 시점으로 봐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절충안이나 다른 대안으로 제시되는 소수의 견해들이 있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 견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말하는 ‘나’를 구원받기 전, 불신자로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말하는 ‘나’를 구원받은 후, 믿는 자로 보는 견해입니다.

어떤 견해를 가지든지 본문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논쟁이 되는 것이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불신자로 볼 때 불신자가 간절하게 선을 행하기 원하는 것이나, 믿는 자로 볼 때 믿는 자가 무력하게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나 두 견해 모두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죄로부터 해방된 믿는 자가 여전히 자신에 대해서 죄의 종으로 말하고 그 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지, 또한 그 반대로 율법에 원수가 되는 불신자가 어떻게 율법을 즐거워하며 율법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제 생각이 틀릴 수 있지만 현재까지 제가 생각하기에 더 나은 견해는 구원받은 바울로 믿는 자의 고백으로 보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간단하게 살펴보면 오늘 본문에서 이전 본문과는 다른 두드러진 차이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나’라고 말할 때 모든 동사를 현재형으로 쓴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과거형으로 썼는데 이 단락에서는 현재형으로 바꿉니다. 이러한 시제의 전환은 구원받은 후, 현재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계속되는 투쟁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계속되는 선과 악의 싸움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세 가지 특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에 대한 평가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육신에 속한 자’로 표현합니다. 만약 불신자라고 한다면 자신에 대해서 이런 평가를 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자신만만한 것이 불신자의 자기 평가입니다. 반대로 믿는 자의 자기 평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로 알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율법에 대한 태도입니다. 본문에서 율법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이러합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본질적인 선함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며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믿는 자의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8:7).

셋째로, 구원에 대한 열망입니다.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는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열망을 볼 때 믿는 자의 고백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지금은 사망의 몸으로 인해 죄에 영향을 받고 있지만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완전히 새롭게 되는 그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자신의 타락한 본성과 싸우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약속된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본문의 ‘나’를 믿는 자이며 성화의 과정 중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견해에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적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을 세부적인 단락으로 구분하면, 1)14~17절, 2)18~20절, 3)21~25절입니다. 첫째 단락과 둘째 단락은 비슷합니다. 반복되며 발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단락과 둘째 단락을 함께 번갈아 가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아노니

존재의 연약함에서 나오는 고백, 첫 번째 노니는 “아노니”입니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바울이 “아노니” 라고 고백하는 것,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율법과 대조되는 육신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에게 있는 연약함은 이러한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율법과 나의 육신의 차이는 큽니다. 단순히 조금 차이 나는 것이 아니라 엄청 많이 차이가 납니다. 법은 지극히 선하지만 육신은 지극히 선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여기 말씀하는 육신은 단순히 육체, 몸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하다고 말하는 육신은 죄의 성품, 타락한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사람은 이 타락한 본성을 가집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죄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람이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원함이 있지만 선을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율법의 선함을 행하기에는 우리 육신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아노니 이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육신,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율법은 선하지만, 우리 육신은 악하기에 우리는 왜곡되고 자기중심적인 삶, 죄 지배와 영향력 아래에서 죄의 본성을 따라 행할 때가 많습니다. 14절의 고백과 같습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2. 알지 못하노니

존재의 연약함에서 나오는 고백, 두 번째 노니는 “알지 못하노니”입니다. 

롬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 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리고 이와 연결되는 둘째 단락이 19절과 20절입니다.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합니다. 나는 선을 행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실제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내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경험하는 것들이 아닙니까? 열심히 말씀보고 기도해야지 하는데, 그렇게 잘 안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남편을 긍휼히 여겨야지 하는데, 막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면 화를 내며 쏘아붙이고 맙니다. 자녀를 사랑으로 대하고 품어줘야지 다짐을 하는데, 그런 결심은 하루도 못가고 철저히 무너집니다. 자녀에게 소리 지르고 있는 나를 봅니다. 나를 계속 힘들게 하는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정말 쉽지 않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고백을 공감하며 똑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바울의 이 고백은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모른다는 말, 내가 하는 일이 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아! 진짜, 내가 왜 이러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선한 마음을 선한 행동으로 바꾸어 놓을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이러한 능력의 부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알고 사랑하고 선택하고 간절히 원한지만 그것을 행할 힘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나의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계속되는 투쟁과 갈등 속에서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을 행하는 너는 누구냐?’ 질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17절과 20절에서 같은 대답을 반복합니다. “그것을 행하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 말은 이런 뜻은 아닙니다. ‘그 일은 내 잘못 아니야! 그 일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야!’ 이 말은 잘못의 책임을 전가하고 자기변명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선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그 원인이 죄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악한 본성이 이 일을 한 것이고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 ‘나’입니까? 선을 원하는 내가 진짜 ‘나’입니까? 아니면 악을 행하는 내가 진짜 ‘나’입니까? 우리는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요?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죄의 본성이 드러나면 헐크로 변하는 사람인가요? 지금 모습과 헐크로 변한 모습, 무엇이 진짜 나인가요? 여기에서 깨달음이 나옵니다. 

3. 깨달았노니

존재의 연약함에서 나오는 고백, 세 번째 노니는 “깨달았노니”입니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이 한 법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율법이라기보다 하나의 원리, 법칙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선을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 선과 악의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선을 원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악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원하는 것도 ‘나’이고, 악을 행하는 것도 ‘나’입니다. 둘 모두, 진짜 ‘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의 이중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죄인이기에 이러한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개의 자아는 두 개의 법을 따르게 됩니다. 

롬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우리에게 두 개의 법이 있습니다. 내 속 사람, 구원 받은 자로서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따릅니다. 그 법을 섬깁니다(25). 하지만 내 안에는 그 반대편에 있는 다른 법, 죄의 법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죄의 법은 하나님의 법에 대적하고 나를 사로잡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내속에 벌어지는 싸움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연약함, 그 실체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내 속에서 시작되었고 두 개의 자아가 두 개의 법을 섬김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리고 내 존재의 연약함은 깊은 탄식으로 이어집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합니다. 사망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의 핵심은 이 사망의 몸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몸,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곤고하다는 말은 비참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존재의 연약함은 그 연약함을 넘어서 비참함에 이르게 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비참함, 사망의 몸을 가진 우리는 그 비참함 속에서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참함으로 인한 탄식은 우리에게 놀라운 위로가 됩니다. 24절은 25절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비참함 가운데 탄식하는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참 능력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의 연약함으로 오는 탄식에서 눈을 돌려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 실패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죄의 법을 섬기며, 계속 되는 탄식을 경험할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섬길 수 없고 내가 바라는 것만큼 하지 못하기에 그러한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낙심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비참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구원의 완전함은 누리지 못하지만 그래서 연약함에 넘어지고 실패하지만, 그래서 비참함에 탄식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만 그날에 우리는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 완전한 구원을 맛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도 그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그 완전한 구원을 부족하지만 조금씩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고백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연약함을 보면서 혹시 이상하다고 느끼셨습니까? 실제 우리 모습과 좀 다른 것 같다고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우리가 원함이 있지만,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을까요? 정말 우리가 죄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까요? 정말 우리에게 선한 마음을 선한 행동으로 바꿀 능력이 없을까요?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과 현실의 나는 좀 다른 것 같지 않으십니까? 본문에 언급이 없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현실을 다르게 만듭니다.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것, 성령님입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지만, 내가 마음으로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순종할 수 있는 것, 성령님이 계시기에 가능합니다. 율법은 능력이 없어서 할 수 없지만, 성령님은 능력으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성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며 그분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사망의 몸에 거하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되는 싸움을 경험하고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탄식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율법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제대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가치와 능력을 알게 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율법, 뿐만 아니라 하나뿐인 아들과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율법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7장이 끝나고 이제 우리는 로마서에서 가장 위대한 장으로 평가되는 8장을 살펴볼 준비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