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차별의 죄
본문: 야고보서 2장 1절-13절
설교: 이 병 권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주일 아침 남편이 아내에게, 오늘은 정말 교회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겁니다. 성도들이 자꾸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하며 차별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오늘은 그냥 쉬면 좋겠다고, 집에 있으면 안 되겠냐고 말합니다. 남편의 말을 들은 지혜로운 아내는 그래도 교회에 가야하는 세 가지 이유를 말하며 남편을 설득합니다. 첫째로 “여보, 예배는 내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기분이 나쁘더라도 예배는 드려야죠.” 둘째로 “여보,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가는 곳이잖아요.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셋째로 “여보, 당신은 우리 교회 목사님이잖아요.”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차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것으로 서로 차별합니다. 얼굴이 얼마나 예쁘냐? 얼마나 날씬하고 좋은 몸매를 가졌느냐? 키가 얼마나 크냐? 이런 외적인 모습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외모가 뛰어나면 잘못을 해도 너그럽게 받아줍니다. 그럴 수도 있지 라며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예쁘고 봐야 돼. 예쁘면 다 용서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좋은 외모를 가지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 이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성형공화국” 우리나라는 체면 문화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외적인 모양을 가꾸는데 신경 씁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겉으로 보이는 것들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그 기준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차를 타느냐? 어떤 옷을 입느냐? 어떤 가방을 들고 있느냐가 마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의 경우 어떤 브랜드의 옷인가? 어떤 스마트 폰을 가졌느냐? 그것의 가격에 따라 서로 등급을 매기고 차별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러합니다. 사람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학력, 외모, 성별을 가지고 차별합니다. 인종이나 피부색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기도 합니다. 이런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다르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차별을 경험한 적이 없으십니까? 차별을 당하는 것은 매우 불쾌하며 화가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차별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때로는 우리가 사람을 차별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차별 당하는 우리가 그런 차별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있지는 않습니까? 외모뿐만 아니라 재물이라든지, 사회적인 성공이라든지, 사람의 외적인 것을 가지고 차별하여 대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교회에서 차별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생각 속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대하고 행동함에 있어서, 사람에 따라 나의 태도가 달리지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은 친절히 대합니다. “저 사람은 내게 득이 되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이야 알고 지내면 도움이 될 거야“ 반대로 나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친절을 베풀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의 문제는 지금 우리만 겪고 있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야고보 당시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고, 교회 안에 있는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늘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차별에 대해서 경고하며 차별하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1절).
야고보는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그러면 차별이 무엇입니까? 차별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관계없이 사회적 지위나 물질, 인종과 같은 외적인 것에 기초한 올바르지 않은 판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별”이라는 단어는, ‘외모를 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복합어입니다. 즉, 사람의 외적인 것으로 다르게 대우하는 거나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차별 하지 말라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러한 명령을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마땅히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람을 향한 차별은 동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차별은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남자든, 여자든, 과부든, 병든 자든, 어린 아이든, 종교인이든, 죄인이든 관계없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을 받아주셨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두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진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차별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차별에 대해서 두 가지로 살펴보고 차별하면 안 되는 이유를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차별은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2,3절). 야고보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예를 들어서 이 진리를 설명합니다. 여기 너무도 대조적인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 두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태도를 보여주면서 사람을 차별하는 그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먼저 그들이 예배드리는 곳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옵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는 부자입니다. 당시 금반지를 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는 아름다운 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빛나는 옷이라는 의미인데, 이 단어가 사도행전과 계시록에는 천사가 입은 옷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당시는 요즘처럼 세탁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이타이나 옥시크린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빛나는 옷을 입은 것은 이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과는 너무도 차이나는 또 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낡고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제 이 두 방문자를 대하는 성도의 태도를 묘사합니다. 이 두 사람을 안내함에 있어서 차별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부자가 왔을 때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며 VIP자리로 안내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무시하며 경멸을 표하며 앉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하라는 겁니다. 나는 너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일 오전에 저는 학생들 몇몇 명과 함께 예배실 앞에서 주보를 나눠드리며 들어오시는 성도님들께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다음 주부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저보다 잘 생긴 분들에게만 주보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보다 못 생긴 분들에게는 주보를 주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은 과연 주보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차별에 대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4절) 여기서 우리는 차별이 무엇인지에 분명히 알게 됩니다. 차별은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차별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4절에 “차별”로 번역된 단어는 1절에서의 “차별”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4절의 “차별”은 1절과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고 기본적으로 구분한다. 나눈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1장 6절에서는 마음이 나뉘는 것, 의심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차별의 의미를 생각할 때,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교회를 구분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둘로 나누는 것이 차별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를 분리하는 것이 차별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찢어 놓는 것이 바로 차별입니다. 내가 행한 차별로 인해 교회가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차별하며 판단하는 자가 된다면 교회는 바로 설수 없습니다. 내 차별로 인해 교회가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게 되고, 내 차별로 인해 교회가 잘난 자와 못난 자로 나뉘게 되고, 내 차별로 인해 교회가 성공한 자와 성공하지 못한 자로 나뉘게 됩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과 반대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판단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 된 본성은 악한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우리 권한 밖의 일입니다.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차별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기어 올라가서 기어이 그분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판관이 아니라 법에 따라 그 법을 지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재판관이 되어 판단하게 될 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사람을 판단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직 공정한 재판관이신,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올바르게 재판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고,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보내셔서 이새의 아들 중에 새로운 왕을 찾으십니다. 잘생기고 정말 멋있는 아들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마지막에 다윗을 찾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우리는 하나님과 달리 사람을 볼 때 사람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외적인 모습,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 그 사람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장 중요한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사람의 중심을 보며 차별 없이 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로서 차별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로 차별은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기에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이유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차별하면 안 되는 이유, 둘째는 차별은 죄를 짓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8,9절). 차별이 무엇입니까? 차별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차별할 때 죄를 짓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범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살인이나 간음을 죄라고 말하며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차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차별에 대해서는 죄라고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가끔 차별 정도는 할 수 있지 라고 생각합니다. 차별하는 것, 그쯤은 당연한 것이고,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뭐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고, 하나님의 법을 어긴 범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돈 많은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마음에 드는 사람, 너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너와 성격이 잘 맞는 사람, 너에게 좋은 말을 하는 사람, 너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차별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믿음을 가진 자답게 말씀을 좇아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십시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로서 긍휼을 행하며 살아가십시오. 참된 믿음은 “긍휼”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그리고 이 긍휼은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여러분이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긍휼을 행하는 자로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우리 주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격 없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차별 없는 사랑을 받은 자로서 나도 다른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다양한 분들이 함께 모여서 가족을 이룹니다. 하는 일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기질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재능이나 은사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나 경험도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셨고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평화의 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한다면 여러분은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한다면 여러분은 죄를 짓는 자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판단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죄를 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긍휼을 행하는 자가 되십시오.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정말 믿는 자답게, 믿음의 증거를 드러내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흑인이 예배당 밖에 주저앉아서 울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 예배당에 들어가고 싶지만, 제 피부색 때문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저를 이렇게 낳으셨나요?” 이 때 예수님께서 조용히 다가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거라.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너와 함께 있단다. 나도 너처럼 이 예배당에는 들어갈 수 없단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어떠한 태도로 맞이할까요? 정말 정성을 다해서 진심으로 환영하여 봉사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하며, 식사할 때도 제일 좋은 것을 드리며, 혹시 불편하지 않을까 유심히 살피며 최고의 예우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교회에 직접 오시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모습으로 오십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 대해서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대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차별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형제를, 그리고 자매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차별의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없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내가 모르는 부분은 없는지,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고, 은연중에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어떤 부분에서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있는지 깨닫게 해달라고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 내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지, 누구에게 사랑을 전해야 할지, 어떤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의 악한 생각을 기준으로, 나의 편견으로, 사람을 부당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주님의 마음으로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을 대하십시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차별이 이기고 우리의 믿음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