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삶 – 3

본문 : 시편 9:13-20

설교자 : 최종혁

시 9:13-20 [13]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4]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5]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17]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편 9편 1-1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우리의 찬양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분의 속성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다짐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어지는 13-20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기도
시편 9편의 뒷부분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앞의 말씀들에서는 상황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제 살펴보려는 말씀들은 자신의 상황 속으로 가까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3절),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12절). 그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무시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가난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고 있습니다.

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사람은 무엇이 됐든지 양이 많으면 가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참 공감이 갑니다. 공기가 없으면 순간도 살 수 없는 인간인데 공기의 가치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소중하다는 것은 그것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너무 많으면 가치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그렇습니다. 공기와 물을 비롯하여 하나님은 하루 하루 우리가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푸시는데 그 은혜가 너무 많으니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어지면 마치 자신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을 빼앗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가 받지 못할 것을 하나님께서 호의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다윗은 은혜를 구합니다. 다윗이 지금까지 한 번도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혜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다시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여”, “주여”라고 부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편을 살펴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각해보면 몇 가지 생각나지 않는데,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참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자”(시 3:3)라고 표현하며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구합니다. 또한 4편에서 다윗은 억울한 상황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5편에서는 고난 중에서 구하는 상황에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그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오직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6편에서는 신음하고 탄식하는 중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 말씀에는 “여호와여”라는 구절이 5번이나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7편에서는 계속되는 억울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라고 말합니다. 시편 9편에서도 원수들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을 “심판자”로 표현하고 의인에 대해서는 “요새”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었고 늘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기초해서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13절). 다윗은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통에서 “구해 달라”고 하지 않고 나의 고통을 “봐 달라”고 기도합니다. 고통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잘못된 기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1-1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셨던 일,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까지, 믿음의 눈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다윗이 “보소서”라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말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또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다윗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통이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거기서 구해달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구하는지는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14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주를 찬양하고 전하리라고 말합니다. “딸 시온”이라는 것은 이사야, 예레미야에도 등장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바로 예루살렘과 그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성문에서 공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 구원을 기뻐하고 전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6편에서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4,5).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전하는 것은 오직 이 땅에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통에서 구해달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찬양하고 그 구원을 기뻐하고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을 구원하셨던 이유가 그것이고,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다윗은 불의를 목격하고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돌아봐 달라고, 그리하시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을 이루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근거
이런 기도에도 역시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일과, 그분의 속성을 통해 알 수 있는 미래에 하실 일들이 그것입니다. 먼저 다윗은 과거에 하신 일들을 언급합니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15,16절). 동사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이뤄진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심판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출 7:4,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그냥 그들을 옮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행하셨던 이유들 중 가장 큰 것은, 그 사건들을 통해서 애굽 사람이 하나님이 진정한 신(神)인 줄을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4-16). 바로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출 10:2),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출 14:4,18).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라는 경고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바로는 끝내 거절했습니다. 많은 이방 나라들이 끝내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믿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라합입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9-11). 그녀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심판을 행하시는 것은, 공의를 드러내심과 동시에 자비를 나타내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심판을 보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회를 거둬 가실 때가 되면 큰 공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고 구원의 날입니다. 무서운 심판을 당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에 대해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15절)고 말합니다. 악인이 한 일에 대한 정확한 응보를 받는 것입니다. 악인의 입장에서는 나쁜 짓을 하고 그 일로 화를 당할 때, ‘내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절했습니다. 재앙들을 통해 잠깐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처럼 보였으나 끝내 거절했습니다. 그에게 돌아갔던 심판은 그가 믿고 섬기던 신들—신이라 생각했던 자연 만물—에게 행해졌습니다. 생명의 근원으로 경배하던 나일강이 피로 변했고,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었던 개구리가 썩었습니다. 곡식을 내야 할 땅이 이로 들끓었고, 하늘과 날씨를 주관하는 신을 섬기던 그들에게 우박을 내리시고, 낮을 어둠으로 바꾸셨습니다. 바로가 믿던 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왕, 바로는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재앙으로 그의 아들, 장자가 죽게 된 것입니다. 바로가 유대인의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출애굽이 시작했다면, 이제 바로의 장자가 죽음을 당하므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정확하게 되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메랑 심판, 악인이 행한 것에 대해 해를 당하는 심판입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은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꾀에 빠져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준비했던 나무에 자신이 달려서 죽게 됩니다. 그가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에스더서에서는 한 번도 하나님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조서가 내려졌을 때 그들은 울고불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에 대한 말은 없고 그냥 ‘부르짖었다’고만 나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도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 이름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때가 되었을 때 공의를 나타내셨습니다. 믿음의 눈이라는 것은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기도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하나님께 진정으로 은혜를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영원하시며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고, 하나님의 속성에 반해 행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공의로우신 분은 공의를 행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은 자비를 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두 부류의 사람들의 결말이 나옵니다. “악인들은”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17절). 그들에게 예비된 것은 영원한 형벌, 영원한 심판입니다. 스올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원래 자리였던 것처럼 말합니다. 18절에서는 “궁핍한 자”, “가난한 자”, “압제를 당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의 이름을 아는 자, 주를 찾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은 이런 사람들이 손해보고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18절). 하나님께서 마치 그들을 잊으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언약을 잊어버리셨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강성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베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애굽에서 그들을 낳으셨습니다. 자신의 영광과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청
19-20절에서는 직접적으로 요청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마치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일어나 달라고, 공의를 나타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19,20절). 다윗은 ‘인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인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노스’입니다. 에노스의 이름의 뜻은 ‘약함’입니다(창 4:26). 시편 8편에서 “사람이 무엇이관대”에 쓰인 단어도 에노스입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연약한 죄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인생이 남들보다 조금 더 가졌다고 힘이 더 있다고,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상황에 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함은 단지 정치, 사회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들을 바로잡으면 다시 그런 일들이 없을까요? 그렇게 할 수도 없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이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에게 있고 해결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죄인들이 사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20절).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인생이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 때문에 핍박을 당할 때, 믿는 자들이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멸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보지 못할지 모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기다려야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불의를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그 하나님을 믿고 요새 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지난 번 저는 여러분들에게 ‘믿음으로 사십니까, 보이는 것으로 사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제 시편 9편을 마무리 하면서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움직이는 것은 믿음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를 바라보고, 이 땅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이 땅에 나타낼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