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차별은 죄가 아닌가?
본문: 여러 본문(약 2:1-13; 엡 4:25)
설교자: 조정의
오늘은 지난 6월 29일 정의당이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관점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기 원한다.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가 땅에 세워진 정부의 정책에 일일이 관심을 두고 관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번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 어떤 때보다도 기독교 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회 밖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차별을 찬성하고 조장하는 ‘혐오집단’이라는 비방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는 참된 교회는 오히려 사랑으로 차별을 적극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말도 교회 안팎에서 나온다. 무엇이 정말 옳은 것일까?
먼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23개의 차별금지 사유(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 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고용 형태, 병력 또는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로 4가지 차별 영역인 고용, 재화&용역, 교육, 행정서비스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차별이 발생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다. 추가로 23개 차별금지 사유로 육체적 정신적 괴롭힘을 가하거나 4가지 차별 영역에서의 성희롱도 차별에 해당하며, 간접차별이 발생할 때 역시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보호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성경은 차별에 관하여 뭐라고 말할까?
1. 모든 종류의 차별은 죄다(약 2:1-13)
먼저 성경은 모든 종류의 차별을 죄라고 규정한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ἔχετε, 현재형, 명령형).
야고보는 당시 초대교회가 모였던 회당에서 일어날법한 사례를 들어 묻는다.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는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그게 곧 차별이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냐고 강력하게 꾸짖는다(2-4절). 이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다. 신분이 높으면 귀한 사람, 낮으면 천한 사람이라는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여 사람을 차별 대우한 것이다.
그러면 왜 차별이 죄인가? 야고보는 8절에 이렇게 말한다.
만일 너희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예수 그리스도께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최고의 법을 주셨다(롬 13:9). 자기 몸을 차별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이웃을 다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절대로 차별하여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주신 최고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어서 9절에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차별의 문제를 더욱 밝혀준다.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12절에 나오는 “자유의 율법”을 의미한다. 자유의 율법이 무엇인가? 바로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 그리스도의 법을 말한다(약 1:25; 롬 8:2).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그 크기가 무엇인지에 따라 우리를 차별하여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롬 3:22).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은 자 중에는 헬라인, 유대인, 할례파, 무할례파, 야만인, 스구디아인, 종, 자유인의 차별이 없다(골 3:11).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모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갈 3:28). 그런 차별 없는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은 자들이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건 죄다. 우리가 차별할 때 그리스도의 법이 “차별 없이 그리스도께 긍휼을 입은 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라”고 정죄한다. 12절 말씀을 보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그러므로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교회는 마땅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한다(1절).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법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다. 긍휼을 입은 자처럼 긍휼을 베풀라.
포괄적 차별금지법에서 선정한 23개의 차별금지 사유를 야고보가 제시한 사례에 넣어보자. 가장 이슈가 되는 성적지향, 성 정체성을 들어 예를 바꿔보자.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가 교회에 왔을 때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한가? 교회 밖으로 내쫓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서 선정한 4개의 차별 영역을 생각해보자. 당신은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라는 이유로 취직이 안 되고 물건을 구매하거나 팔 수 없으며 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행정서비스를 받을 수 없게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그 어떤 이유로든 차별을 받지 않기를 간절히 원한다. 교회 방문한 사람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든지 어떤 차별금지 사유를 가지고 있든지 그 이유로 차별하여 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도(차별 없이)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처럼(벧후 3:9) 참된 교회는 아무도(차별 없이)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출신 민족, 피부색, 나이, 언어, 용모, 신체 조건, 종교, 사상, 정치적 성향, 심지어 성적 지향과 성적 정체성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회개하고 그분을 믿으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처럼 그 은혜를 입은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기 원한다.
2. 진리를 말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다(엡 4:25)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신 명령 중 하나는 “참된 것을 말하라”는 것이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 곧 진리를 말하는 것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행위 중 하나다(거짓 증언하지 말라, 마 19:18).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신적 사랑인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님은 동시에 진리가 충만하셨다(요 1:14).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다(벧전 2:22).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교회 안에서도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라고 명령하고(엡 4:15, 우리말성경), 교회 밖에서도 “거짓을 버리고 ‘각자 자기 이웃과 더불어 진실을 말하’라고 명령한다(엡 4:25, 우리말성경).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진리를 사랑 가운데 말해야 한다. 이웃 사랑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차별 없는 사랑이 거짓을 눈감아주는 사랑 그냥 덮어주는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예수님.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거짓의 크고 작음, 죄의 크고 작음을 차별하지 않고 용납하는 사랑이지만, 그 거짓과 죄에서 해방해주는 사랑이다. 환자를 가리지 않고 받아주는 의사는 사랑 많은 의사다. 하지만 병든 것을 고쳐주지 않는 의사가 사랑 있는 의사인가?(마 9:12-13).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으로 용납하셨지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8:11). 죄인과 세리를 멀리 두지 않으시고 함께 식사하셨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셨다(눅 19:9-10). 종교지도자들을 업신여기거나 말도 섞지 않거나 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기꺼이 대화 나누셨지만, 항상 그들을 진리로 강력하게 꾸짖으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출신 민족, 국가, 종교, 인종, 신분 등에 차별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 모두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고 말했다(골 3:9-11). 차별은 죄라고 지적한 야고보 역시 바로 이어지는 본문에서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묻는다(약 2:14). 무슨 말인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 없는 은혜와 긍휼을 맛보지만, 그 은혜를 맛본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이 말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다(요일 1:6). 차별은 죄다. 하지만 진리를 말하는 건 차별이 아니다. 진리를 말하는 건 사랑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적용하여 생각해보자. 우리는 23가지 차별금지 사유를 가진 이들이 4가지 차별 영역에서 차별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교회에 온다면 우리는 차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감추는 것이 아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해야 한다.
교회에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가 방문한다면 홀대하거나 면전에 대고 곧바로 ‘동성애는 더러운 죄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차별 없이 영접하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강단에서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굽혀서 가르치거나 가르치지 않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거짓을 퍼뜨린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을 책임도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하고 지키게 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사랑이다.
신학교는 이 진리를 바르고 담대하게 가르칠 일꾼을 키우는 곳이다. 만일 그곳에서 진리를 말할 수 없게 된다면, 거짓을 말하는 자를 허용하는 것이 차별 없는 사랑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차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말할 수 없게 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녀가 학교에서 거짓을 배우는 것을 우리는 반대할 수 있다. 누군가를 차별해서가 아니다. 아이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구든지 어떤 배경을 가졌든지 무엇을 믿고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지 차별 대우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베푸신 십자가 사랑의 본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않고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요 8:40, 45). 사람들은 예수님이 차별 없는 사랑을 베푸셔서 죽인 게 아니다. 그 사랑 가운데 충만한 진리를 사람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그 또한 우리가 배워야 할 그리스도의 진리의 본이다.
3.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금지하지만 진리를 말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면 포괄적 차별금지법, 우리는 지지하는가? 지지하지 않는가? 지금 발의된 법은 소위 ‘독소조항’이라는 것이 있다. 단지 사람을 차별하지 못하게 하는 조항만 있는 게 아니라, 진리를 말할 수 없게 막도록 만드는 조항도 있다.
지금의 법이 통과될 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하여 여러 분석이 있지만, 확실한 건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가 분명히 생긴다는 것이다.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SNS나 소셜 미디어에 공유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신학교에서 성경의 관점과 다른 성적 지향, 성 정체성을 주장하는 교수 채용이나 학생 치리를 할 수 없게 된다. 외국에서는 빵집에서 동성부부의 결혼식 케이크 제작을 거절했다가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빵을 팔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차별). 동성 부부의 결혼을 지지하고 축복하는 메시지를 거부한 것이다(진리). 학교 교육은 어떤가?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성 정체성으로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고 반대할 경우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면 결국 거짓을 교육받고 진리의 입을 막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 사람을 차별하고 특정 범죄를 혐오해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되 진리와 함께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법을 통해 역리를 순리로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소수를 어떤 비방과 조롱을 받더라도 진리와 함께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이 법에 반대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수가 하나님께서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하신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고 부끄럽고 상실한 마음에 내버려 지지 않길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법에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