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라 

본문 : 출애굽기 20장 8절~11절

설교자 : 최종혁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원하셨던 하나님 중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다. 잘 아는 것처럼 이 계명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대로 애굽의 고통에서 건져낸 이스라엘 백성과 공적으로 언약의 관계를 맺으시면서 주신 계명들이다. 즉, 이 계명은 수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명령들이다.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이 명령들은 율법이고 율법의 핵심이다.

사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오늘날의 교회에게는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부지 중에 지은 죄 때문에 양이나 염소를 잡아 제물로 드리지 않는다. 유월절같은 절기를 지키지도 않고, 희년의 되었다고 모든 빚을 탕감하고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지도 않는다. 살아야할 곳이 정해져있지도 않다. 살고 싶은 곳에서 살면된다.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상관없이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미간에 난 털을 깎는 것도 상관없고 머리 가를 둥글게 깍든 수염 끝을 자르든 아무 상관이 없다. 불순종하는 자녀를 돌로 치지 않는다.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언약의 백성이지 옛언약의 백성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살펴본 십계명의 명령들을 아무렇지 않게 우리에게 적용했던 것이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방금 위에 언급한 그런 율법들은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키지 않으면서,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은 지켜야 한다고 무슨 근거로 말할 수 있을까? 그냥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 같은 것은 지키고 못할 것 같은 것은 지키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지키지 않아도 상관은 없는데 지키는게 더 좋은 것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이 계명들은 더 이상 명령이라 할 수 없고 이에 따르는 것도 순종의 문제는 아닌 것이 된다.

사실 이에 대한 논쟁은 꽤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새언약의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구약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적용하는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가 먼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우리는 구약의 율법에 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당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들에게 주셨던 명령들이다. 다른 백성들에게 같은 요구를 하신 적은 없다.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에게 미국이나 중국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법의 기본 원리다.

여기에 더하여 신약 성경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성도의 관계를 명확히 말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8:2에서 구약의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 칭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바로 그 율법으로부터 “해방”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로마서에서 여러차례 바울은 우리가 “법 아래” 있다 않다고 단언한다. 갈라디아서 5:1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경고한다.

율법에서 자유하게 된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울의 비유에 따르면 남편이 죽어 재혼한 여자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그에게 순종하려는 것과 같은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되는 것이다(롬 7장). 율법은 그 전부든, 그 일부든 오늘날 우리가 그 자체로서 지킬 의무가 없다.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가진 자들은 더 이상 구약의 율법에 매여있지 않다. 이것이 구원 받은 자들이 누리는 자유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 부분은 굳이 성경에서 없어도 상관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율법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명령은 아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우리는 율법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온 세상의 왕, 주권자이시기에 그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구속력을 가진다. 우리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말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는 말이다.

십계명의 지난 3개의 계명들도 우리는 그렇게 살펴봤다. 우리가 애굽에서 종되었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약속의 땅으로 향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계명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드러내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은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라’는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라’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다. 율법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분명한 구속력을 지닌다. 즉, 우리가 잘 알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이다.

“잘 알고” 순종해야한다. 잘 알고 순종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잘못 알고 순종하는 것도 큰 문제다. 잘못 알고 순종하면 스스로는 순종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로 잡기가 더 어렵다. 특히 구약의 율법은 신약에 비해 우리에게 적용되기까지 건너야할 강이 더 넓어서 좀 더 주의가 필요하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4계명이 그렇다. 사실 1-3계명이 그렇듯, 5계명부터의 명령들도 어렵지 않게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고, 탐내지 않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뜻임을 우리는 깊게 연구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문제는 4계명이다. 이에 대한 두 극단의 견해가 있다. 하나는 이 계명도 다른 9개의 계명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동일하게 지켜야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실제로 이들은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킨다. 다른 하나는 이 계명은 ‘날’에 대한 계명으로서 오늘날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에게 있어 십계명은 사실 구계명이 되고 안식일에 관한 나머지 모든 말씀들도 우리에게 불필요한 말씀이 되어 버린다.

대부분은 이 둘의 중간쯤에 있는 견해를 취하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이 되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온 것 같다. 그래서 ‘주일성수’라는 말도 많이 사용한다. 물론 주일성수라는 표현을 다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말에 주일을 안식일로서 ‘엄격하게 지킨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래서 모든 세속적인 일, 자기가 좋아서 하는 취미 같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하고 주일 예배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등의 규정을 만들고 지켜야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코로나로 대면 예배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교회들은 ‘주일성수’의 명령을 어긴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다시 모이려고 할 때도 ‘주일성수’를 해야한다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나왔었다. 정말 옛언약의 안식일을 성수하라고 하신 명령은 오늘날 새언약의 주일을 성수하라는 명령으로 바뀐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안식일에 관한 다른 여러 규례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될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다른 계명들에 비해 4계명에 대해 논쟁이 있는 이유는 ‘안식일’에는 분명히 의식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다른 계명들에 비해 우리에게 적용하는데까지 건너야할 강이 더 넓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강을 건너다가 도착지가 달라지는 경우들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잘 알고 순종하려면 4계명이 어떤 의미인지를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계명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I. 명령

명령 자체는 이해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다. 8절은 명령이 무엇인지가 기록되어 있고, 9-10절은 명령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그리고 11절은 그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무엇

명령은 두 개의 중요한 동사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하라는 것과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말 번역에는 “거룩”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지키라는 동사가 추가된 형태가 되었다. 거룩은 다른 것들과의 분리를 의미하고, 그 분리는 나쁜 방향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되어야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은 “특별하게 구분하라”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다. “거룩하게 지키라”는 표현은 마치 그날에 뭔가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일을 해야할 것 같은 뉘앙스를 주지만, 본래 의미는 그날을 다른 날과는 다르게 보내야한다는데 강조점이 있다.

주된 명령은 오히려 그렇게 하기위해 안식일을 “기억하라”는데 있다. 사실 반복되는 일은 우리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하게 된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일을 그냥 하던대로 했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 매일 학교에 가니 개교기념일 같이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 휴일 같은 날은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려고 준비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직장인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반복되는 일은 우리가 그냥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말고 반드시 “기억하라”고 명령하셨다. 단순히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의도적으로 그날을 특별한 날로 보내기 위해 기억해야 했다. 그리고 준비해야 했다.

하나님은 이미 이들을 훈련하고 계셨었다. 그들에게 만나를 내리실 때도 만나는 6일 동안 내리고 안식일인 7일째에는 내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5일 동안은 매일 만나가 내릴 것이니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셨고, 6일째에는 7일째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을 것이니 두배로 거두라고 명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평일에 만나가 계속 내릴 것을 믿지 못하고 더 거두기도 했고, 7일째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을 믿지 않고 만나를 거두러 나가기도 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의 문제였다(출 16:28).

안식일을 기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안식일을 특별하게 구별된 날로 보내기 위해서는 그날을 기억하여 준비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마치 우리가 특별한 사이에서 특별한 날을 기억하고 준비하고 기념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 날이 ‘자주’ 돌아온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매주 하다보면 앞서 말한 것처럼 그냥 하게 된다. 습관처럼 아무 생각없이 ‘아, 오늘이 안식일이구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에 기억하라는 명령을 더하셨다.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매일을 살아가지만 특별히 일주일의 하루를 하나님을 위한 날로 구별하고 그날을 기억하고 준비해야했던 것이다. 이 날을 다른 날과 똑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됐다.

방법

방법에서 강조된 것은 ‘일’과 관련되어 있다. ‘안식’이라는 단어의 기본 의미가 ‘그만두다. 멈추다’다. 그래서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어떤 일을 멈춰야하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만들었다.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얼마인지, 들수 있는 물건의 무게는 어느 정도인지, 사람이 아프면 어느 정도의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규칙을 만들었다. 하지만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이런 규칙들을 모두 어기셨다. 하지만 안식일 계명을 어기지는 않으셨다. 즉, 이들이 만든 안식일 규정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과 달랐다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4번째 명령의 방법으로 십계명에서 말씀해주신 것을 보면 어떤 ‘일’을 멈춰야하는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먼저 말씀하셨다(9절). 그리고 그 일을 멈추는 것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기본이다.

먼저는 힘써 모든 일을 해야 한다. 6일의 평범한 날들을 성실하게 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일할 때 놀지 말고 해야할 일들을 해야한다. 일은 죄의 결과로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저주가 아니라, 창조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맡겨주셨던 책임이었다. 에덴 동산을 생각하면 아담과 하와가 유유자적하면서 하하호호 뛰어다니고 동물들과 놀고 있는 모습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이라는 것을 주셨고 부지런히 그 책임을 다하게 창조하셨다. 죄의 결과로 그 일이 고된 노동이 된 것이지, 일 자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한 것 중 하나다. 일 자체가 필요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6일 동안 성실하게 할 것을 하나님은 먼저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일들을 멈출 것을 말씀하셨다(10절). 가정이 경제 활동의 중심이었던 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정의 구성원을 언급하신다. 가장 뿐 아니라 아들, 딸, 남종, 여종도 모두 일을 멈추라고 하셨다. 더 나아가 가축까지도 일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늘날로 따지만 고용주, 직원, 작업 기계들을 다 쉬라고 한 것이다.

당연히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고 다들 누워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밥도 먹지 말고 옷도 갈아입지 말고 씻지도 말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다. 그런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여느날처럼 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안식일을 평일처럼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날은 특별한 날로서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날이다.

필요를 위해서 일을 해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마 12:5). 식사를 준비하는 등의 필요한 일들은 안식일이어도 해야하는 일이었다. 즉, 안식일 규례는 “누구든 어떤 일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평소에 하는 일들을 성실하게 하고 하루는 그 일을 쉬는 것이 핵심이다.

그럼, 일을 안하면 뭐를 할까? 먼저 이 명령이 주어진 이유를 생각해 보자.

이유

이유로서 언급된 것이 조금은 의외다. 일하느라 힘드니까 좀 쉬기도 해야지와 같은 내용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막 2:27,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근본적인 이유로서 제시되지는 않았다. 안식일을 특별한 날로서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있다(11절).

하나님은 여기서 창세기 2장 3절을 말씀하셨다.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마치고 안식하셨다. 하나님에게 쉼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쉬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마치셨고 그날을 특별한 날로 구분하셨다(“거룩하게 하셨으니”). 즉, 하나님의 안식(쉼)은 피로로 인한 것이 아니라 끝마친 일을 기념하는 시간이었다.

그것이 창조 기사의 패턴이었다. 하루하루의 창조를 마치실 때 성경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 모든 창조의 일을 마치셨을 때 하나님은 일부러 그 다음날을 구별하셔서 그날을 복되게 하셨다. 이 날은 다른 여느날과는 다른 날이었다. 하나님은 일을 멈추셨고 안식하셨다.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보시면서 만족하셨고 기뻐하셨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아마 그들도 이런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며 기뻐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안식일을 “하나님의 안식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10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안식일이 아니다. 6일 동안 힘들게 일한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하루가 아니라는 것이다. 안식일이 선물 같은 하루인 것은 맞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하신 선물 같은 하루다.

죄를 범하기 전 아담도 일을 하는 자였지만 참된 안식을 하나님과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런 선물을 주신 것이다. 물론 죄가 없었을 때와 같이 온전한 안식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수록 더욱 그들은 에덴에서의 안식과 비슷한 모습으로 안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창조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서 지으신 피조물을 바라보며 그분을 예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안식일 하루는 그냥 쉬는 날, 재충전의 날이 아니라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날,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날이다.

흥미롭게도 십계명이 다시 계시된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일이 주어진 다른 이유가 언급된다.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속해내신 그 구원을 안식일을 지킬 이유로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창조 뿐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여 안식하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날은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23:3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모이는 날)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이것이 안식일의 핵심이다. 마치 창조 때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다. 매일의 삶이 그러해야하겠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특별히 하루를 구별하여 기억하면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참된 안식 안에서 참된 예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안식일은 궁극적으로 예배에 대한 명령이고 그렇게 하기 위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에 대한 명령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안식일을 언약의 표징으로 주셨다(출 31: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무지개가 노아 언약의 표징이었고 할례가 아브라함 언약의 표징이었던 것처럼,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표징은 안식일이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 안식일에 대한 명령을 주심으로 이스라엘이 절대 이 언약의 관계를 잊지 않기 원하셨고, 그 사랑의 관계 안에서 즐거워하며 쉼을 누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셨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을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안식일을 기억하지 않았다. 평일과 다르지 않게 안식일을 보내기도 했고, 매우 형식적으로 안식일을 지키기도 했다. 안식일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이 경험하신 안식일은 병자를 고칠 수 없는 안식일, 가난한 자를 돌보고 자비를 베풀 수 없는 안식일이었다. 아무도 쉴 수 없고 아무도 하나님을 기억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안식일이었다. 그런 안식일을 만들어낸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께서 의분을 쏟아내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고 그것은 참된 예배를 막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십계명의 제 4계명인 안식일의 핵심은 예배와 그것을 위한 쉼이다. 따라서 안식일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참된 쉼을 주시는 분이시며 예배의 대상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매일 그런 삶을 살라는 명령을 주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런 삶을 살 필요는 없고 일주일에 한번만 제대로 예배만 드리면 되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그런 삶에 대해서는 앞선 계명들과 다른 계명들이 말하고 있고, 안식일은 그런 삶을 기억하게 하는 장치이자 참된 안식과 예배를 누릴 수 있는 날로서 하나님 께서 그들을 위해 제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참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은 즐거운 날, 그래서 기다려지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II. 적용

이제 이 계명의 의미를 잘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에 화답해야할까?

먼저 안식일을 이스라엘 백성처럼 지켜야하는 것은 아니다. 또는 안식일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고 어떤 교훈도 주지 않는다는 것도 틀린 얘기다.

그럼, 주일이 신약의 안식일이고 그래서 우리가 거룩하게 지켜야한다는 견해는 어떤가? 이 견해도 성경의 지지를 얻는다고 말할 수 없다.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주일과 안식일을 연결짓지 않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대한 명령이 오늘날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그 명령의 핵심에서 찾아야 한다. 참된 안식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 하나님과 함께 온전한 쉼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평안함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했다. 창조하신 하나님을 예배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쉼을 누릴 수 없었다. 그들은 애굽의 종들로서 끊임없이 일해야만 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구원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쉼을 주셨다. 그들의 육적인 쉼은 영적인 쉼으로 이어졌다. 안식일은 끊임없이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일깨워주는 언약의 표징이자, 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창조하신 하나님 뿐 아니라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은 바로 그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분 안에서 안식하면서 그분을 예배하라는 말이었다.

구약의 다른 의식적 요소들이 그러하듯, 안식일도 그림자로서 실체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즉,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골 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안식일은 참된 실체인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아담이 죄를 범한 후에 잃어버린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온전한 안식이 회복될 수 있음을 안식일이 보여주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해졌다.

4:10-11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구약의 안식일과 우리를 연결해주는 다리다. 좀 돌아온 것 같지만 제대로 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안식에 들어가기에 힘써야 하고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그 안식을 누려야한다.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참된 안식을 잃었다. 힘들게 일해야 하고 각자가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그치지 않는 염려와 걱정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어느 정도 이뤘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히려 가진 자들이 우울증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의 안식을 찾으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나 미신을 찾는 이유도 그런 이유다.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작게 자신의 기준에서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을 해도 참된 안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 참된 안식은 하나님 밖에서 발견할 수 없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먼저는 이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지셨고 우리를 쉬게 하겠다고 부르신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을 참된 안식으로 부르신다.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세상도 살만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속이지 말라.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정말 이 세상이 당신이 가장 살만한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런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지금의 세상도 훨씬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고 벅찬 소망을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와 안식하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이 온전한 안식에 들어왔다. 정말 잘한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물론 안식을 온전히 누리는 것은 좀 더 후의 일이겠지만,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하기위해 힘쓸 필요가 있다. 구약의 성도들은 율법 아래서 계속해서 그 율법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에서 하나님을 구원자보다는 재판관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을 구원자로서 예배할 수 있다. 확신 가운데, 평안 가운데, 참된 안식 가운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일을 멈추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아직도 안식을 찾고 있는 자들처럼 살 때가 있다. 계속되는 염려와 걱정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일하고 초조해 한다. 때로는 여전히 내가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산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마치 매일 만나가 내리는 것을 알면서도 필요 이상의 만나를 거두고 만나가 내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7일째에 만나를 거두러 나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지금 참된 안식을 맛볼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뿐이다. 내가 너희를 쉬게하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분께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주일이 그러하다. 우리는 주일에 우리를 구원하여 참된 안식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안식하고 예배한다. 주일이 안식일은 아니다. 꼭 주일에만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을 말처럼 이 날이나 저 날이다 다 똑같다. 하지만 지금의 주일은 그렇게 하기에 정말로 적합한 날이다. 주님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셨고, 성경께서도 주일인 오순절에 처음 제자들에게 임하시고 교회가 시작되었다. 초기의 성도들이 처음에는 매일 모였지만 점차 주일에 정기적으로 모였다. 결정적으로 매주 주일은 빨간날이다. 이보다 더 즐겁게 우리를 참된 안식으로 이끄신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좋은 날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기억하게 하고 또 그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날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주일도 그러하다. 우리는 매일을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일은 그런 삶의 하이라이트이자 동력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삶의 짐을 모두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여 예배하는 이날은 하나님의 전부를 나의 전부로 삼은 우리에게 정말 기대되는 날이고 기쁜 날이다. 하늘나라에서 매일 그렇게 하기를 지금도 매일매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주일은 이땅에서 우리가 그날을 맛볼수 있는 날이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3가지 교훈을 나누길 원한다.

첫번째는 이날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기억할 것을 강조하셨다. 쉽게 잊고 잊지 않더라도 아무 생각없이 안식일을 지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일에 대해서 우리도 같은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6일을 열심히 일하지 못하면 7일 째 온전히 구별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계속해서 해야할 일들이 생각났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방해받기 쉬운 사람들인지 잊어서는 안된다. 또 우리가 얼마나 바쁜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도 잊어서는 안된다. 준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온전히 구별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계속해서 끝내야할 일들이 생각날 것이다. 해야할 일들이 떠오를 것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 염려들이 우리의 참된 안식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니, 이날을 기억하여 잘 준비해야한다. 평일에 해야할 일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는 주일에 해야할 일들도 포함될 것이다. 주일에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려면 하나님과 관련된 일들은 평일에 잘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두번째는 이날에 안식하라는 것이다. 이 하루를 안식하며 예배하는 날로 드려야 한다.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것을 보통의 일, 당연한 일로 여기지 말고 최대한 이 날 전체를 안식하며 예배하는 날로 드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혹 그것에 방해되는 일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끊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냥 주일 오전에 교회에 왔다 가면 하나님께 할 도리를 다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 그냥 말씀 영상만 보면 다 끝난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날의 일부만 구분하고 나머지는 평소와 똑같은 날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최소한 이날 하루는 하나님과 안식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삼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히 중요하다. 요즘 같으면 남는 시간에 보지 못했던 성도에게 연락을 해보는 것도 좋다. 그동안 잘 읽지 못했던 성경을 읽거나 신앙 서적을 읽는 것도 좋다. 무엇이든 내 영혼이 쉴 수 있고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고 직접적으로 예배할 수 있는 그런 시간으로 이 하루를 채워보라. 우리의 참된 쉼은 거기에 있다.

세번째는 이날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졌던 가장 큰 함정은 율법주의였다. 안식일에 있는 의식적 요소들은 그렇게 율법주의에 빠지기 쉬운 요소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도 조심하지 않으면 비슷하게 그런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다. 주일에 뭐는 해도 괜찮고 뭐는 하면 안좋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자신이 그런 기준을 정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강요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율법의 멍에를 다시 메는 일이다.

안식일도 그렇게 하라고 주어졌던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졌다. 지금의 주일도 그렇게 되기 쉽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 이날에 무엇을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이미 우리의 마음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무엇을 하든, 이날은 하나님과 안식하는 날이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날임을 잊지 말라.

우리가 지켜야할 안식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누려야할 안식은 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이고 성도들과 함께 하는 안식이다. 이 참된 안식 중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함께 예배할 뿐 아니라 따로도 예배한다. 안식의 날이며 예배의 날이다. 이런 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것이 구약의 안식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다.

도전

십계명의 첫 네 계명들을 통해 하나님 중심의 삶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 한 분 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모든 일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참된 예배다. 하나님을 중심에 둔 우리의 이 모든 마음과 삶과 예배가 하나님을 잃은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높이 선포할 수 있기를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