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본문: 요한계시록 14장 6-13절
설교자: 조정의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지 않기로 결단했다’라고 말하며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를 떠나는 탈교회, 탈기독교 현상이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외부의 탄압이나 내면의 타락에 의해 믿음을 잃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는다. 결국엔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다(딤전 1:19). 배교한다.
대환난 기간만큼 성도들의 인내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는 없을 것이다. 온 세상을 통치할 적그리스도가 참 그리스도께 믿음을 두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핍박으로 밤낮 쉼 없이 괴롭히고, 온갖 거짓으로 미혹하여 어떻게든 배교하게 만들기 위해 무섭게 달려들 것이다.
가장 믿음이 약해질 수 있는 시대, 인내가 요구되는 마지막 때, 주님은 성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13절). 주 안에서 죽으라는 말, 죽기까지 주 안에 있으라는 말이다. 주 안에 복이 있으니 절대로 떠나지 말라는 호소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라는 명령이다.
주님은 모든 시대 자기 백성에게 인내할 것을 요구하셨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 “이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먼저, 성도들의 인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알아보자.
1. 인내 하는 삶은 영원히 승리하는 삶이다(12-13절)
성도들의 인내가 무엇인지 요한은 분명히 밝혔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2절).
성도의 인내하는 삶은 적극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이나 환경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많은 핍박과 유혹 중에도, 항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 순종의 동기는 기복이나 두려움 또는 의무감이 아니라 경외심(떨며 즐거워함)이다. 순종의 삶은 매 순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이고, 인내하는 성도는 중심 없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중심의 진실함으로 순종의 예배를 드린다.
성도의 인내하는 삶은 또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삶이다. 믿음이 흔들릴 때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의지적으로 나의 믿음을 나 자신이나 환경, 타인이나 그 어떤 것에 두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는 말이다. 또한 이 믿음은 이기는 믿음이다. 죽임당할지라도 “주 안에서 죽는 자들”로 남기 위해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11, 13절). 단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싸우고 지켜낸다. 멈춰있는 삶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 계속해서 달리는 삶이다(고전 9:25-26).
이렇게 인내하며 순종하는 성도, 이기는 믿음을 가진 성도가 최후 승리, 영원한 승리를 얻는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3절).
하늘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다. 죽기까지 충성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이를 변하지 않는 약속으로 기록하라고 명령하셨다. 성령님도 아멘(그러하다)으로 화답하시고, 성도에게 약속된 영원한 승리 곧 안식과 보상을 확증하셨다. 이 땅에서 밤낮 쉼 없이 믿음을 지키느라 수고한 성도는 이제 영원히 안식할 것이다.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의 행한 일(선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닐 것이다. 다시 말해 수고한 모든 일에 관한 상급을 영원히 누릴 것이다.
안타깝게도 성도 중에는 인내하는 믿음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처음 사랑을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죽도록 충성할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 회개하지 않아도 상관없고,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지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미지근한 신앙을 가져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고,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빼앗지 못하도록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틀렸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정확하게 이것을 요구하셨다.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켜 ‘이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그런 자들에게만 영원한 승리가 주어진다고 약속하셨다.
요한이 본 세 천사를 통해 하나님이 경고하신 말씀도 동일하다. 하늘 높은 곳에서 땅에 거주하는 모든 자들이 듣도록 큰 음성으로 천사들이 외친다. 인내 없는 삶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2. 인내 없는 삶은 복음을 부정하는 삶이다(6-7절)
첫 번째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친 것은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이다(6절).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복음,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복음이다. 복음의 내용은 아주 명료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7절).
임박한 심판을 알리며 천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고 촉구한다. 창조주 하나님 곧 세상의 기초인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시작으로 거기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을 계획하신 그대로 창조하신 주권자를 인정하고 오직 그분만을 경배하라고 명령한다.
마귀와 악한 세상 권세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 복음은 마지막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은혜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다(대환난 때).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이 복음은 계속해서 인내해야 할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다. 인내 없는 삶은 복음을 부정하는 삶이기 때문이다(인내하는 삶이 복음에 합당).
믿음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성도, 믿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은 성도의 삶은, 그 원인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실제적 무신론자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입술로는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고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인정하지만, 실제 삶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아무것도 감찰하지 않으시고 판단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자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 믿는 자는 “반드시 그가(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히 11:6).
건강을 잃고 나서 과거에 아주 건강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회상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옛날 자기 몸 상태를 떠올리며 지금 나빠진 건강을 돌보지 않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회심했던 특별한 순간을 떠올리며 지금 나빠진 신앙 상태를 돌보지 않는다. 믿음을 거의 잃어버린 것처럼 살면서 과거 뜨거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아무런 경각심을 갖지 않는다.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환난, 곤고, 박해, 기근(굶주림), 적신(헐벗음), 위험(위협) 칼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주신다(롬 8:35).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사망도 생명도 천사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과 높음과 깊음과 다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주신다(롬 8:38-39). 복음의 능력으로 무한한 사랑을 항상 받으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으실 것처럼 사는 자가 바로 십자가의 원수다.
3. 인내 없는 삶은 세상을 동경하는 삶이다(8절)
요한이 본 둘째 천사는 앞선 천사 뒤를 따라 말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8절).
큰 성 바벨론은 고대 시대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이끌었던 나라다. 신약 성경엔 로마 제국을 같은 이유로 바벨론이라 부르기도 했다(벧전 5:13). 다니엘은 적그리스도 왕국을 바벨론이라 불렀다(단 4:30). 세상의 임금 마귀는 모든 시대 세상 권세를 통해 사람들을 반역의 길로 이끌어 왔다. 특별히 대환난 시기, 온 세상을 통치할 적그리스도를 앞장세워 모든 나라를 우상숭배로 인도할 것이다(음행). 세상에 속한 모든 자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도록(사 21:9; 렘 51:8), 마귀는 세상 풍조를 따르는 모든 자를 심판으로 몰아넣는다.
둘째 천사가 외친 소리는 진노의 자녀를(엡 2:3) 생산하는 마귀의 나라가 마침내 최종적으로 확실히 무너졌다는 선언이다. 이 메시지는 인내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준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믿음이 결국 승리한다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한편 인내 없는 삶에 관하여 무서운 경고를 하는데, 인내 없는 삶이 무너질 세상을 동경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를 무섭게 책망한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당신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귈 수 없다. 세상과 하나님이 원수지간이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만 섬겨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인내하지 않는 성도의 삶에서 하나같이 발견되는 것은 그 마음에 다른 경외의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예배하는 대상은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성령이 아니라 육신이 기뻐하는 것, 영혼이 아니라 눈을 즐겁게 하는 것, 주님이 아니라 세상이 알아주는 것. 그것을 동경하고 추구하고 얻으려는 삶을 사는 자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애써 참고 절제하고 싸워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성도의 인내가 당신의 삶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를 절대 가벼운 신호로 받지 말라. 당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4. 인내 없는 삶은 영원히 심판받는 삶이다(9-11절)
요한이 본 셋째 천사는 앞선 천사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외쳤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9-11절).
적그리스도와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결단으로 이마나 손에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에게 영원한 심판, 세세토록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다(영원한 지옥 형벌, 막 9:48). 요한은 심판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라고 했는데, 특별히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 조금의 은혜나 긍휼이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순수한 분노(눅 16:24), 거룩한 공의만 담긴 끝이 없는 심판이 마귀 편에 속한 자,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원수에게 내려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대환난 때,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는 최후통첩이다. 반대로 참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인내하는 성도들에게 이는 최후 승리의 선포다. 예수께 둔 믿음을 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약속의 성취를 마침내 맛보게 된 것이다(요 3:16). 이 말은 곧 인내 없는 성도의 삶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을 받는 삶에 가깝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목사가 교회 계속 출석하지 않는 성도 때문에 고민이 되어 바울과 베드로에게 물었다. ‘교회 계속 출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자 바울과 베드로가 답했다. ‘나는 왜 당신이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예화가 주는 교훈은 성도의 삶은 마땅히 복음을 부인하는 삶이 아니라 시인하는 삶이어야 하고, 세상을 동경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미워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내하는 성도만이 영원히 심판받지 않고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과 함께 승리자의 자리에 앉아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2절). 이것이 모든 성도에게 요구되는 인내다.
신학적으로 ‘성도의 견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은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반드시 영화롭게 하신다(롬 8:30). 중도하차 하는 성도는 없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혼 중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요 18:9). 하나님 편에서 구원은 그분의 주권적인 역사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우리 편에서 구원의 역사는 우리의 인내하는 삶을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나를 견인하고 계신다는 은혜의 증거가 삶에 분명히 나타난다.
죄를 미워하고 회개한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실질적 무신론을 버리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한다. 불평·불신·불안을 버리고 감사, 신뢰, 기도에 힘쓴다. 세상에 잠시 눈길을 줄 수 있지만, 완전히 몸을 돌리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기로 다시 결단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고 그분과 달콤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말씀을 간절히 찾는다. 성도와의 교제를 원한다. 함께 모인 그 자리에 주님을 만나러 온다. 주 안에서 죽는 그날까지, 성도는 인내한다. 끝까지 ‘이기는 자’, 인내하는 성도만이 어린양이 약속하신 것들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