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본문: 누가복음 20장 9~18절
설교자: 조정의

 

지난 주 우리는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간에 있었던 첫 번째 논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았고, 예수님은 “요한의 권위”를 통해 자기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반문하셨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차마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요한의 권위도, 당신의 권위도 어디서 왔는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떠나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더 말씀하기 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 비유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임할 심각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그를 보내신 자, 그에게 권위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합당한 권위를 계속해서 무시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 하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도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입니다. 이 비유 속 ‘주인’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며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비유의 발단(9-10a)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비유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에게 들려주기 원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마 21:33). 이 비유를 꼭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9절에 예수님이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고 말하는데, 마태와 마가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예수님의 청자가 종교지도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마 21:28, ‘너희’; 막 12:1, ’그들’). 이렇게 서로 다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방금전까지 자기의 권위에 문제를 제기한 종교지도자들을 주요 타켓으로 삼고 있지만, 주변에 모여든 수 많은 백성 가운데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면에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권위을 다양한 입장과 태도로 받아들이는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발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9…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예수님의 이야기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주인”입니다(마 21:33). “주인”이라는 말은 어떤 소유물에 대한 온전한 권위를 갖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땅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땅에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었습니다(마 21:33).땅, 포도원, 그에 딸린 모든 부대시설, 모두 누구의 것입니까? 이 “주인”의 것입니다. 모든 권위가 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주인은 다른 나라에 가서 오래 머물러야 했는데, 그래서 자기 포도원을 맡아서 경작해줄 소작농이 필요했습니다. 포도원을 경작하여 소출이 나면 그 중 일정 비율을 소작농에게 지불하고 나머지는 세로 주인에게 바치도록 계약을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열매를 거둘)때가 되었고”(마 21:34), 포도원 소출 중 얼마를 소작농에게 받기 위해 주인은 종 하나를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이것이 비유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듣는 이들에게 아주 익숙한 소재로 이야기를 만드셨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땅을 포도원으로 만들었는데, 예수님의 주요 사역지인 갈릴리 지역은 포도가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습니다(오스본, 727). 예수님이 사역하는 지역 곳곳에 이런 포도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 당시 자신의 땅을 소작농에게 맡긴 부재지주가 실제로 많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소작료로 소작농에게 지불되는 것은 흉년이든 풍년이든 관계없이 총생산물의 1/4정도였고, 나머지 3/4은 주인에게 바쳐야 했습니다(바클레이, 334). 

이런 상황이 익숙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서 “주인은 그 합당한 권리로 농부들에게 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들의 기대와 달리 막장으로 흘러갑니다.

 

2. 비유의 전개(10b-12)

10…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농부는 종을 빈 손으로 보냅니다. 주인이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농부에게 얼마를 요구했지만, 그냥 거절한 것도 아니고 보낸 종들을 심하게 모욕하고 때리고 심각한 부상을 입히면서까지 거절했습니다. 주인의 권위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면 이런 짓을 할까요? 주인을 얼마나 무시하면 이렇게 나오겠습니까?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이 괴씸한 농부들은 세 명의 종만 이렇게 막대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냈는데” 어떤 종은 죽이고, 어떤 종은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마 21:35; 막 12:5). 여러분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에 맞게 각색해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집 앞에 세븐 일레븐이 제 소유인데 제가 미국에 공부하러 가면서 알바생과 고용계약을 맺습니다. 그들이 편의점을 저를 대신하여 경영하면 수익금의 일부를 그들에게 주고 나머지를 주인인 제가 갖는 것입니다. 

미국에 머물면서 그들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요구하는데 그들이 보내지 않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고 카톡에 답도 하지 않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아는 친구들을 대신 보냈는데 편의점에 가서는 여기 저기 얻어 맞고 빈손으로 돌아와 저에게 울면서 전화합니다. 

아는 인맥을 총 동원하여 여러 사람을 보냈는데 글쎄 알바생이 서로 똘똘뭉쳐서 제가 보낸 사람 중 여럿을 죽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주인인 저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여러분이 편의점 주인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이야기는 여기서 절정에 이릅니다. 두 가지 놀라운 이야기의 전개로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3. 비유의 절정(13-16)

먼저 주인의 반응입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날법한 주인이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합니다.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포도원 주인은 “어찌할까?” 고민을 합니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응징할까?”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군대를 보내어 진멸하거나 보낸 종들에게 행한 것의 몇 배로 갚아줄텐데, 주인은 농부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기 원합니다. 참으로 인자하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는 성품의 소유자라고밖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주인은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풉니다.

13…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주인은 마지막 대책으로 농부들이 그 권위를 차마 무시할 수 없는 대상을 보내기로 합니다. 바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이 아들 외에는 또 다른 상속자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주인이 보낸 아들은 독생자 즉 하나뿐인 외아들이었습니다(막 12:6). 주인은 아들을 보내며 ‘혹 그는 존대하리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친히 내 아들을 보내면 그들이 ‘부끄러워 돌아설 것이다’ ‘주인의 아들을 대하면 그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스윈돌, 569). 그런 일말의 기대를 품고 주인은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자비와 은혜를 이 불한당같은 농부들에게 베풉니다. 농부들은 마침내 회개하고 돌이킬까요? 주인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을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이것이 예수님 비유의 절정에 나오는 두 번째 충격적인 반응입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외아들을 보고 서로 의논합니다. “이 아들은 주인이 보낸 외아들이 아니냐, 우리가 그를 무시하면 진짜 주인을 무시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회개하자” 이런 이야기를 나눠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생각해봐, 이 아들이 죽으면, 그 유산을 상속받을 사람이 없다. 그러면 우리가 이 포도원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주인은 정말 넘치는 은혜와 자비로 자기 독생자를 그들에게 보냈는데, 그들은 그 아들을 거절할뿐만 아니라 죽일 방도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포도원 밖으로 아들을 내쫓고 죽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백성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15…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여러분, 포도원 주인이 이 사악하고 교만한 농부들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인의 권위를 무시하고, 보낸 종들마다 때리고 죽이고 능욕하며, 모든 것을 참고 자비를 베풀어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을 때 그를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인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너무나 당연한 결말 아닙니까? 합당한 처사가 아닙니까? 주인의 권위를 무시하기를 그 아들을 죽이기 까지 한다면, 주인이 이렇게 그들을 대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와서 그 사악하고 교만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자기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권위가 있고,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주인의 행동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던 이들도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라고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마 21:41). 그들이 보기에도 주인이 가진 권위로 할 수 있는 마땅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누가복음 본문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1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들중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죠? 주인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사도 바울이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말할 때 자주 사용하던 신약성경에서 가장 강력한 부정의 표현입니다. ‘당치 않아!’, ‘어림 없는 소리! 그런 일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돼!’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농부의 편에서서 이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으면서 이 것이 자기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절을 보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 예수님과 논쟁했던 유대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비유속 사악하고 교만한 농부들이 바로 자기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포도원을 비유의 소재로 삼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을 꾸짖으실 때, 포도원 주인으로 하나님을, 포도원을 이스라엘로 묘사하여 말씀하셨습니다.주인이신 하나님은 땅에서 돌을 제거하고 망대를 세우고 술을 짜는 틀을 만들고 좋은 포도 맺기를 기대했지만, 포도원은 아무 쓸모 없는 들포도를 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 권위를 무시하고 온갖 포학을 행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 포도원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그들을 짓밟히게 하고 황폐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사 5:1-7).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이사야의 포도원 이야기를 가져와 각색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추가로 농부가 등장하는 것은 포도원을 잘 경작할 책임이 있는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 권위 아래 순종하게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을 죽이고 멸시하고, 종국에는 하나님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포하신 예수님을 쫓아내고 죽이려 논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넌지시 하나님의 외아들인 자신을 그들이 내쫓고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내어 그곳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계속해서 그분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분을 멸시하다 못해 그분이 보낸 사랑하는 독자를 부인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나서서 “그런 자는 죽이고 포도원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야죠”라고 하는데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무지함, 사악함, 그리고 교만함의 끝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지 종교지도자들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눅 13:34-35)

예수님을 거절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 비유 속 농부들이었습니다. 스데반도 예수를 미워하는 유대인에게 돌로 맞아 죽기 전에 이렇게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 7:51-53)

이스라엘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선지자를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그리고 의인인 독생자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들이 잡아 빌라도에게 넘겼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쳐 그를 죽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부인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에 대해 말하는 성경의 증언을 무시한다면 그는 성경의 저자,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훌륭한 성인, 좋은 선생, 모범이 되는 삶을 산 영웅, 종교지도자, 사람 좋은 사람 등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은 그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마치 죽은 것처럼 착각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기쁨을 위해 살면서 하나님께는 감사하지도 영광을 돌리지도 않는 인생들… 그들에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부르십니다. 

수많은 은혜의 손을 내미십니다. 은혜의 절정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보내어 그를 통해 측량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아들을 거절하는 자, 그 아들을 보낸 하나님의 권위를 비웃는 자, 여전히 자기 삶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하며 삶의 모든 소출을 자기 기쁨을 위해 갈취하려고 하는 자, 주인에게 조금도 주려고 하지 않는 자, 그런 자가 바로 포도원 비유에 나오는 악한 농부입니다. 이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모두 진멸하고, 포도원의 소출을 주인에게 성실하게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세를 줘야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말씀으로 주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렸던 축복과 특권을 상실한 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질 때까지 우둔해집니다(롬 11:25).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축복과 특권을 확장하여 아들을 믿는 모든 자(이방인 포함)에게 넘기셨고, 이스라엘을 국가적, 정치적, 영적으로 심판하셨습니다.

 

4. 비유의 결말(17-18)

이제 이 비유의 결말입니다. 사실 비유는 16절에서 모두 끝이 났습니다. 17-18절이 남아있는 이유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비유의 결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림도 없어,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아!”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셨습니다(17절). 그들이 그 결말을 절대 피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예수님은 시편 118편 22-23절을 인용하셨습니다(사 8:14-15; 단 2:34-35). 여호와께서 건축자가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의 찬양입니다. 모퉁이 돌은 건물의 전체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기반입니다. 기초석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이 자기에 대한 증언이라고 그들에게 밝히고 계십니다.

너희가 거절하고 버린 내가 사실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집의 고귀하고 보배로운 모퉁잇돌이다! 나를 인정하고 내 권위 아래 순종하여 내 위에 세워진 인생은 무너지지 아니하겠지만, 내 권위를 무시하고 나를 버린 인생은 깨어지고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파괴적인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여 베드로전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예수를)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7-9)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여러분 오늘 포도원 농부 비유 속에서 우리는 은혜와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노하기를 더디하는 분입니다. 베드로의 표현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참으시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그 분명한 증거가 우리에게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지만 그 사랑하는 아들을 끝까지 거절함으로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심판입니다. 진멸입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여러분은 교만과 겸손 중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미 회개하고 돌이킨 분들께 이 말씀을 드리기 원합니다. 은혜에 합당한 반응은 방종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바울의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그 아들에게 굴복하고 주인의 권위에 순종하는 자, 이제는 인자하고 자비로운 주인에게 기쁨으로 열매를 거두어 바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