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주의 길을 준비하라
본문 : 누가복음 3장 1~6절
설교자 : 이병권
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의 길을 준비하라”입니다. 이제 누가복음 3장이 되었습니다. 3장은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장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의 이야기를 마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질문입니다. 2장의 마지막과 3장의 시작은 얼마간의 시간 차이가 있을까요? 3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의 나이가 삼십 세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장에서 예수님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습니다. 30에서 12를 빼면 몇 년이 지났는지 답이 나옵니다. 그 답은 제가 강단에서 발음하기 어려운 숫자라서 굳이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럼 이 때에 예수님이 삼십 세였는데, 오늘 본문의 요한은 몇 살일까요? 요한은 예수님보다 여섯 달 정도 일찍 태어났으니까, 같은 나이겠죠. 이렇게 시간이 흘러서 오늘의 본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은 1교시 역사로 시작해서 2교시 지리와 3교시 사명으로 이어지고, 4교시 기도와 찬송으로 마치겠습니다. 먼저 1교시 “역사”입니다. 3장 1절과 2절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역사적인 배경을 제공합니다. 요한이 언제 사역을 시작했는지, 그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모두 일곱 명의 사람이 소개되는데, 다섯 명의 정치 지도자와 두 명의 종교 지도자가 나옵니다. 이렇게 왕이나 중요인물을 언급하는 것은 당시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구약에서 선지자가 부르심을 받을 때 왕들의 이름도 함께 나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언제, 어떤 배경에서 말씀을 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보면, 지금 누가는 구약에서 선지자를 소개했던 방법대로 요한을 선지자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물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시대, 그 속에서 모세를 생각합니다. 그 인물을, 그가 살았던 시대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그렇게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많은 기적을 행하며 우상 숭배자들과 싸웠던 엘리야를 그 시대 속에서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를 지금 우리 시대로 그대로 가져와서 따라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 신자들과 싸우고 절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며, 만들어 놓은 불상을, 우상이라며 목을 자르고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무례한 기독교가 되는 겁니다.
역사적인 배경 안에서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왕들의 이름이 나오고, 역사적인 배경을 알려줄 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냥 건너뛰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누가가 이 정보를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이것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1교시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그의 사역을 시작할 때는 디베료가 아구스도의 뒤를 이어서 로마 제국의 황제로 통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 황제였던 아구스도가 죽고 그를 이어 디베료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디베료는 원래 아구스도의 의붓아들입니다. 디베료의 어머니는 이혼을 하고, 아구스도와 재혼을 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구스도는 디베료의 새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황제가 된 아구스도는 의붓아들인 디베료를 자신의 친 딸과 결혼시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둘 사이는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아구스도는 디베료를 자신의 양자로 삼습니다. 이렇게 디베료는 아구스도의 의붓아들이자 사위이자 양자가 되는 특이한 관계를 통해 황제가 되었습니다.
1절 말씀에 디베료 황제 다음으로 총독과 분봉 왕들이 언급됩니다. 이 당시 로마에 황제가 있고 그 지배 아래에 있는 여러 왕들이 있었습니다. 총독과 분봉 왕을 이해하기 위해서 헤롯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 태어날 당시의 유대의 왕은 헤롯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헤롯이 나오는데 구분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의 헤롯을 헤롯 대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오는 헤롯들은 그의 자녀와 자손들입니다.
헤롯 대왕은 로마의 정치 상황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했습니다. 정치적 수완이 아주 뛰어난 자였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면 눈치 보기와 뇌물, 줄타기에 능한 인물이었습니다. 헤롯 대왕은 이스라엘 영토의 대부분을 통치했는데, 그의 통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포악하고 잔인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열 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아내가 열 명인데 어떠했겠습니까? 헤롯의 아내들은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려고 싸웁니다. 그래서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고 고소하고 복수할 기회를 노립니다. 그리고 헤롯은 자신의 왕위를 병적으로 집착합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헤롯은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이하 남자아기들을 모두 죽이는 일을 저지릅니다. 그의 병은 점차 악화되어 갔고, 얼마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컸는지, 헤롯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는 유서를 여섯 번이나 변경합니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들을 서슴없이 죽입니다. 한 아들은 헤롯이 죽기 닷새 전에 헤롯의 명령에 의해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헤롯이 병으로 죽자 많은 사람들이 안도하며 기뻐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세 명의 아들이 헤롯이 통치했던 땅을 나누어서 다스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분봉 왕, 지역 통치자라고 부릅니다.
먼저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물려받았는데, 그는 아버지 헤롯을 닮아 가혹하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통치했습니다. 마태복음 2장 2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요셉이 아켈라오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서워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유월절에 성전에서 폭동이 있었는데, 아켈라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3000명의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의 포악함 때문에 서로 대적관계에 있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협력해서 황제에게 호소합니다. 그 결과 아켈라오는 2년 만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유대와 사마리아는 로마의 행정장관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는 왕이 아니라 로마가 파견한 총독이 통치하게 된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의 다섯 번째 총독이었는데, 10년 동안 다스립니다. 빌립은 비교적 온건하고 평안하게 통치를 했습니다. 헤롯(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는데 훗날 요한을 참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재판했던 헤롯이 헤롯(안디바)입니다. 루사니아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에 대한 정보가 매우 적고 그 내용도 불분명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이와 같은 정치적 배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어서 2절에서 누가는 동시대의 인물로 안나스와 가야바를 언급합니다. 그들은 가장 높은 종교 지도자,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최초의 대제사장은 아론이었고, 그리고 그의 자손이 직무를 계승했습니다. 율법에 결격 사유가 없으면 장자가 대를 이어서 사역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대제사장이 통치자들에 의해 임명되기도 합니다. 특히 로마 지배 아래에서 대제사장의 임명권은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대제사장의 자리는 정치적 이해관계나 이익에 따라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할 경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파직되는 대제사장들도 있었고 대제사장 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이 시기에 공식적인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입니다. 하지만 전임 대제사장으로서 안나스는 자신의 사위인 가야바의 배후에서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셔서 심문당하십니다. 안나스는 공식적으로 대제사장 직을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라고 기록합니다. 잘 보시면, ‘대제사장들’이 아닙니다. 두 명인데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누가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권력 구조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가 언급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당시 상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던 때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권력을 휘두르며 각자의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고, 힘없는 백성들은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메시아의 대한 기대와 기다림은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아를 간절히 갈망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때에 요한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럼 1교시를 마치고 2교시를 시작하겠습니다. 2교시는 “지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 지명이 나옵니다. 이 지역을 세 명의 왕과 총독이 나누어서 통치하는 겁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는 빌라도가, 갈릴리와 베레아는 헤롯이, 그리고 그 위에 지방은 빌립과 루사니아가 다스리게 됩니다.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요한에게 주어졌음을 묘사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가 될 것을 그의 아버지 사가랴를 통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1:76). 그리고 그 말씀대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요한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 말씀이 어디에서 주어졌습니까? 빈 들입니다.
2절에 나오는 빈 들이라는 말은 4절에 나오는 광야라는 말과 같습니다. 둘 다 같은 단어입니다. 빈 들을 그냥 광야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요한은 이 빈 들에서, 광야에서 성장했습니다.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하나님은 때가 이르기까지 거친 광야에서 요한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합니다. 지금까지 광야에 있던 요한이 드디어 이스라엘에게 나타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감독되시는 하나님이, 그 만드신 역사의 무대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요한을 출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시나리오대로 그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요한을 부르시고, 요한에게 메시지를 주시고, 그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했습니까? 그리고 어디에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당시 신으로 숭배되던 로마 황제도 아니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내세웠던 왕들에게 임했던 것도 아니고, 종교 지도자로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제사장들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던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그곳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화려한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때마다 백성들이 모여서 제사를 드렸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도 아니었습니다. 광야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보통 이 일이 어디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까요? 헤롯 대왕이 보수한 그 으리으리한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거라고 대제사장이나 그 당시 종교 지도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에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있던 요한에게 그 말씀을 주십니다.
광야는 척박하고 힘든 곳이지만,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가장 좋은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경험하기에는 가장 좋은 곳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한 번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함께 살펴볼 내용은 사명입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이 했던 일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근거가 4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구약의 말씀은 요한의 사명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구약,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요한의 사명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4절에 ‘길을 준비한다’ 또는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은 절대 주권을 지닌 존재가 오기 전에, 그 일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길을 준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군대에서 사단장이 방문한다고 했을 때, 병사들이 청소하느라 비상이 걸리는 것처럼, 그렇게 준비하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실제로 삽자루를 들고 단체로 땅을 파고 길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요? 이 말씀을 단지 길이라는 외적인 의미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더 중요한 영적인 측면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도덕적인 면에서 준비하라는 요구입니다. 자신의 죄에서 회개함으로 돌이키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7절부터 이어지는 요한의 메시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 그 구원의 하나님을 소개하며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오실 메시아에게 반응하도록 마음을 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가정에게 요한을 허락하셨고, 광야에서 요한을 준비시키셨고, 때가 되어서 요한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시며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명에 따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요한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섭리와 그분의 능력을 통해 주어진 자신의 사명을 알고, 그 사명에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요한을 통해서 사명에 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사명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목적에 따라 그 사명에 헌신할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헌신한다면, 우리 교회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 일에 헌신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그 사명에 헌신하며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삶을, 더 아름다운 삶을, 정말 사는 것 같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사명에 사로잡혀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십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위해, 사명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에 헌신하고 계십니까?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교회를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명 공동체인 교회로서 함께 이 일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을 위해 사십시오.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하는 일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명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귀에 이 소리가 들리십니까? “주의 길을 준비하라!” 광야에서 울려 퍼졌던 이 소리는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혼란했고, 영적으로 어두웠던 때에 요단강 각처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던 요한의 소리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에 따라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속한 곳에서 어떤 소리입니까? 갈수록 타락하고 영적으로 어두워지는 이때에 지금 여러분은 어떤 소리를 내고 계십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에게서 어떤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소리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을 닮아서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입술로 예수님의 소리를 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가 속한 곳에서 하나님을 전하는 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 들리도록 돕는 소리로,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궁금해 하는 소리로 전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전하는 아름다운 소리가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따라 그 일에 헌신하며,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