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주를 의지한다면…
본문 : 시편 20편
설교자 : 최종혁

1[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4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6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7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를 모르고 하거나 알아도 개의치 않고 합니다. 저는 가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할렐루야’라는 말을 하면 깜짝 놀랍니다. 저는 그 말의 의미인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로 듣기에 이상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주님 뜻이면’이나 ‘주님 의지하고 이렇게 하세요’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주님 의지하고’라는 말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주로 하는 말인데,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시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에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축복하고 위로해주는 기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읽어보면 그것은 개인의 어려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5). 여기서 개가를 부르고 깃발을 세운다는 것은 전쟁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시편 20편의 배경이 되는 상황은 개인의 어려움이 아니라 한 민족, 또는 한 나라의 어려움인 것입니다. 현재 전쟁을 앞둔 상황입니다. 시편 20편과 21편은 짝을 이루는 시편인데, 20편은 전쟁을 앞두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고, 21편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시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전쟁을 앞두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라는 표현은 ‘왕’을 가리킵니다. 백성들이 왕을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백성들의 그 축복을 받아 확신 가운데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이 시편의 내용입니다. 이 상황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함’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인지 같이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1-5절은 백성들이 왕을 향해서 축복의 기도를 하는 내용입니다. 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승리하게 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1). 이것은 축복의 기도인데, 앞의 기도들과 달리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기도하기 보다는, 한 대상을 놓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여호와여’라는 부름은 없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복을 비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를 높이 드시며”에서 ‘높이 든다’는 것은 높은 곳에 있어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도록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왕을 보호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는 “여호와”이고 또 하나는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둘 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에서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적인 의미로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기에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2). 도움은 성소와 시온에서 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름을 두신 곳, 하나님의 임재를 두신 곳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6절 참고) 또한 동시에 성소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장소의 제약을 받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소를 단지 상징적인 의미로 보시지 않고 그곳에 실재하셨으며 또한 그곳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성소가 있는 시온산)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했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처소였기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고 허가받은 사람도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규율을 어기면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어야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나는 그런 것 필요없다’ 하시지 않고 다윗의 그 마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다윗이 지금 그 성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관심 없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3). 여기서 말하는 제사들(소제, 번제)은 인간의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헌신의 의미를 가지고 드렸던 제사입니다. 그 예는 사무엘상에서 볼 수 있는데 사무엘이 전쟁 전에 번제를 드리고 기도했던 것들과, 우리가 잘 알기로 사울왕이 사무엘이 오기 전에 상황이 위급하여 스스로 먼저 제사를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사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삼상 13:12).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이러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어떤 거래의 의미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시편 51편을 보면 하나님께서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제사들은 진정한 마음에서 나오는 제사였습니다. 이러한 번제가 드려질 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헌신했을 때 그 제사를 받으시고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4). 이 기도는 참으로 담대한 기도이면서 한편으로 당돌해 보이기도 합니다. 왕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이뤄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에 원했던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7). 이 모든 전쟁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과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의 삶과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영향력이나 영토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기 위해 모든 계획을 세우고 지금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5). 왕이 마음에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뤄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들의 축복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주를 의지한다면 환란 중에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그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지금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구할 때 그것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있을 때 의지할 만한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정말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환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주를 의지한다면 주의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20편에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표현이 세 번 등장합니다(1,5,7절).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거나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상관없이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과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경험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그분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해야 할 하나님은 분명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하고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행하며 그 결과로 그분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6-8절은 내용이 조금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제는 “나”로 바뀝니다. 5절까지가 다수(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들을 대변하는 대표)가 말하는 내용이었다면 이제는 그 축복의 대상이 되는 ‘왕’이 직접 말하는 부분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주를 이뤘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의 말들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6). 왕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부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구절이 개역성경에는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를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는 ‘왕’을 가리킵니다.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6). 하나님이 능력의 손으로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 땅의 능력이 아닌, 거룩한 하늘의 능력이고 육신의 능력이 아닌 영적인 능력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왕이 있었지만 왕정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신이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신정국가가 있었지만 그들은 가짜 신을 만들어놓고 이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정국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왕을 세워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려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서 거절한 것입니다. 왕을 세우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신명기에서 왕에 대한 규례를 주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 같은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대체자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사울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원했던 그들의 왕 사울은 실패했습니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실패한 이후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다윗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기를 원했던 왕입니다. 자신이 왕이었지만 자신 위에 궁극적인 왕이 있음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말하고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적들의 손에서 구원해내셨고 그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7). 다윗은 “어떤 사람”들과 “우리”를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그들은 병거나 말을 의지하는 자들이고 우리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8), 다윗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당시의 전쟁은 얼마나 병거와 말, 좋은 무기가 있느냐가 성패를 가늠했습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더 많은 군대를 모으고 더 많은 말을 키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런 나라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모든 나라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병거가 많은 나라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나라가 승리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시 33:16-19) 왜 많은 군대가 승리를 보장하지 못할까요? 왜 군마가 많은 것에 대해 헛되다고 말할까요? 전쟁의 성패와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을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그 편에 서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 31:1-3).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병거가 많고 말이 많으면 패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병거가 많거나 말이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는 유혹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에게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할 유혹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이스라엘의 왕이었다면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쉬웠을까요? 바로 옆의 나라에서 수많은 병거를 만들고 군사 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보는데 말입니다. 그것들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을 신뢰할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과 병거를 준비하고 하나님도 의지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지 않은 증거입니다.

정말 의지할 데가 없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쉽습니다. 히스기야와 여호사밧은 적군이 그들을 둘러쌌을 때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의지할 것이 많았던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병거나 말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병거나 말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를 의지한다면 주만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보험처럼 다른 것을 두고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의지할 것이 많은 세상에 살아갑니다. 그것에 대한 유혹이 강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물과 하나님에 대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무엇을 두고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 위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7절에서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라고 번역되었지만 여기서 “의지하다”는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미를 위해 끼워넣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은 병거와 말을, 우리는 여호와를 자랑한다”입니다. 다윗이 만약 하나님과 병거를 동시에 의지했다면 그래서 전쟁에 나가 승리했다면 그는 하나님과 함께 병거도 찬양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 찬양하고 그분을 자랑하기 원한다면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싸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뤄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랑할 것이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도 의지하면 하나님만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의지할 것이 많은 세상에 삽니다. 꼭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나 싶은 시대를 삽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넘쳐나 하나님을 의지할 생각조차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기울이며 그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다른 말들이 들릴 때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제시하시는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할 때 주변의 사람들이 들었다면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병마는 있어야지” “이래서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어?”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다윗은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따라 살 때 세상은 다른 얘기를 합니다. 그것보다 이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학원에도 보내야 한다고 말하고, 일을 그렇게 해서 되겠냐고 말하며, 돈이 최고라고, 가족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스펄전은 주석에서 “모든 능력의 하나님은 모든 능력들보다 강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고 있다면 다른 어떤 수많은 능력들이 있든지 그것이 얼마나 강하게 보이든지 상관없이 이 하나님이 언제나 더 그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지혜의 하나님은 다른 모든 지혜들보다 더욱 지혜롭습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9). 이 말은 백성들이 왕을 구원해달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에는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라고 번역되었고, 킹제임스 성경에는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께서는 우리 말을 들으소서”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 왕을 구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과 백성들이 함께 드리는 기도일 것입니다. 인간 왕이 그 자리에 있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는 궁극적인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9절의 내용입니다.

오늘 살펴본 시편 20편은 전쟁을 앞둔 자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실제적인 전쟁을 했고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눈에 보이는 전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실재하는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전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주님께 구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신다면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성경을 통해 발견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한다면 주님만 의지하시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주인되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 의지하고’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곤 합니다. 그것이 입에서만 맴도는 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찾고 의지할 때 그 이름이 세상에서 찬양받고 우리가 그분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