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주님을 따르는 길
본문 : 누가복음 9장 57-62절
설교자 : 이병권

지난 시간에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장면을 봤습니다. 51절에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기를 결심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향해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이라는 배경 속에서 말씀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따라 그 길을 가려고 하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세 사람과 관련해서 특별히 ‘따르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57절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59절에는 예수님께서 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61절에는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에게 자신을 따르는데 있어서 미리 생각해야 할 것,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뿐만 아니라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말씀해주십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는 중에 정말 감사하게도, 우리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똑바로 보게 되었고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인생의 길은 바뀌었습니다. 가는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이 계신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길을 좀 더 잘 걸어가기 위해서, 이 길이 어떤 길인지, 또 어떻게 가는 것이 좋은지, 무엇이 요구되는지 잘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목적지만 알고서 ‘어떻게 가든 알아서 되겠지!’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 그분을 따라 가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이 길을 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돌이키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주님을 따르는 길은 어떤 길인가요? 첫째로 주님을 따르는 길은 희생이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고 있는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라다녔지만, 지금 이 사람처럼 놀라운 말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말합니까?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사실 이 말은 그냥 생각 없이 쉽게 하면 안 되는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보고 해야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는지, 그 길이 어떤지 잘 모르고서 이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오해하고, 잠시 동안 그분을 따르다가 떠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그분을 따릅니다. 하지만 아무런 저항 없이 잠잠히 고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떠납니다.

제가 외출을 할 때, 저희 아이들은 저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아직은 아빠를 따라 다니는 게 더 좋은가 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빠가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러 가는지 모르고, 무작정 따라간다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야기합니다. 아빠가 가는 곳은 차타고 멀리가야 되고, 재미있는 것도 없고,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도 없는 곳이야!‘ 아이들은 단순히 마트에 가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따라가려고 했지만, 사실을 알고 나면 생각을 바꾸기도 합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지금 예수님께 나온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치러야할 대가가 어떤 것인지 계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이 어떠한지 알려주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은 자신의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쉼 없이 계속해서 이곳, 저곳을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고, 늘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셨습니다. 희생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이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마냥 장밋빛 인생, 그분을 따르면서 얻을 인기와 겉멋에만 관심이 빼앗겨 그 길에서 치려야할 대가와 감당해야 할 희생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기대한 것과 다르기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가는 중에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희생이 따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삶에서 그분을 믿음으로 경험하는 어떤 희생도 없다면 그 길은 아닙니다. 잘못된 길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길을, 예수님을 따르는 길로 착각하며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멸시와 조롱과 시련과 고난을 참고 견디며, 그분이 가신 길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라간다면, 우리에게는 마땅히 싸워야만 하는 내안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있습니다. 마땅히 달려야하는 내 몫으로 주어진 경주가 있습니다. 마땅히 내가 해야 할일이 있고 인내하며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그분을 따라감으로 따라오는 희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러한 희생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뭔가 대단한 희생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숨을 버리기 전에 자존심부터 버리십시오. 그게 희생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겠다 말하지 말고 내 안에 있는 이기심부터 내려놓으십시오. 그게 희생입니다. 뭔가 대단한 것을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한 작은 섬김부터 시작하십시오. 희생은 다른 사람을 배려함으로 내가 조금 더 수고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누군가가 내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더라도 담아두지 않는 것입니다. 희생은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희생은 내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희생이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이런 희생이 따르는 길입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가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을 따라 가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희생을 각오하십시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어떤 길인가요? 첫째로 희생이 따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주님을 따르는 길은 헌신이 따르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먼저 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 이 사람은 자신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 그 일을 먼저 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평생에 단 한 번 있는 중요한 일인데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너무 냉정한 거 아닐까요?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도 치를 수 없는 걸까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 이 사람이 요청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허락을 구한 것은 지금 장례를 위해 가봐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가시면 유산을 정리하고 그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나이가 많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일을 계속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일을 기약 없이 연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59절에 나오는 이 사람의 말을 이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핑계” 예수님께 이런 핑계는 안 통합니다.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지금 이 사람의 모습은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다른 제자들의 모습과는 확연하게 차이 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가장 높은 우선순위에 있는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장례를 치르는 일은 다른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즉시 따라야 했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헌신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누구에게나 이러한 핑계가 있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대해서, 그분의 요청에 대해서, 그 명령에 대해서,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당장 내게 있을 득과 실을 따집니다. 생각해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더 괜찮은 날이 올 거라고 내일로 미룹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계속 반복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때는 오지 않습니다. 결국 생각으로만 끝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핑계를 뛰어넘는 것이 헌신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것, 그것이 헌신입니다. 그래서 헌신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즉시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핑계를 아시고, 그가 핑계를 넘어 헌신할 수 있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가족에 대한 의무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먼저”인지 우선순위를 올바르게 잡아주신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은 항상 가장 우선순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첫째 자리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수시로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가장 우선적인 헌신의 대상이 예수님인지, 그분에 대한 헌신이 나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인지 살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내가 원하는 다른 것을 하기 위해 헌신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기를 잘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헌신의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상황이 되면 자신은 언제든 그런 헌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다만 상황이 아직 여의치 않아서 못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착각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상황이 아니라 나의 상태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나의 삶이 말해줍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상황이 되면 할 수 있다는 달콤한 속삼임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나중은 오지 않습니다.

도약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헌신함으로 한걸음 더 높이 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헌신할 수 있는데, 무엇을 두고 고민하십니까? 주님을 위한 최선을 앞에 두고 고민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인생에서 최선을 선택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을 향한 최선을 위협하는 것은 최악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과 최악을 두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향한 최선을 위협하는 것은 차선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선택하십시오. 차선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그것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좋은 것보다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십시오. 가치 있는 것보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주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최선의 일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우리는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 가운데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선하시며, 그분은 언제나 옳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진리이고,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따르는 길은 헌신의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성령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실 때, 그 역사하심을 피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통해 그분이 우리에게 명하는 것들을 믿음으로 반응하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핑계를 버리고 헌신하십시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어떤 길인가요? 첫째로 희생이 따르는 길입니다. 둘째로 헌신이 따르는 길입니다. 셋째로 주님을 따르는 길은 결단이 따르는 길입니다.

61절에 보면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기에 그 일을 한 후에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자기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원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요청에 대해서 ‘안 된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왜 이번에도 예수님은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작별 인사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이제 가족들과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야 할 것이고,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가족들과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는 것도 안 된다니요! 너무 매정하신 것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가 이 대화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은 지금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기에는 부족합니다.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태도는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누어진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61절에 나오는 이 사람의 말을 이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망설임” 예수님은 이 사람의 내면에 주저하는 마음을 아셨습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께 요청대로 가족들에게 작별을 하러 돌아간다면, 어쩌면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본다면 밭을 똑바로 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운전대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좀 전에 스쳐지나간 것이 궁금해서 자꾸 뒤를 돌아보며 운전한다면 가려던 길을 제대로 갈 수 있을까요? 너무도 위험한 일입니다.

예전에 저는 어떤 분의 차를 얻어 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운전을 하시고 전 뒷자리에 타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분은 운전을 하면서 저와 이야기를 할 때 자꾸만 뒤에 있는 저를 돌아보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저랑 아주 편한 사이였다면 얼굴을 때려서 돌렸겠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는 타를 차는 동안 너무 불안했고, 되도록 말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운전에 집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더 시급하고 더 중요하고 더 우선되어야 하는 일을 앞에 두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운전대를 잡고서 한 눈을 팔면 안 되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도 시선을 그 길에 고정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내가 가는 길에 집중하며 마음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우리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계속 이 길을 가는데 있어서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우리는 딴 곳을 보며, 곁눈질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빼앗기고 기웃거릴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나를 따라오너라!”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왕상 19:19-21). 엘리사는 밭을 쟁기로 가는 중에 엘리야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엘리사는 그 즉시 밭을 가는데 쓰던 도구를 불사르며 쟁기질을 하던 소를 잡아서 사람들에게 주었고 돌아가려는 유혹조차 받지 않도록 스스로 다른 길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사는 전심으로 부르심에 따라 그 길을 갔습니다. 그 부르심 이후 엘리사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도 이러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믿음으로 걸어가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한결같은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결단함으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태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먼저 이것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러면 왜 주라고 부르는 겁니까? 여전히 내 마음대로 다하면서, 여전히 내 뜻대로 살면서, 왜 주라고 부르며, 왜 주를 따른다고 말합니까?

이 땅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뒤를 돌아본 자들을 볼 수 있고, 그들의 선택에 대한 결과가 어떠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멸망에서 건지심을 받았지만, 소돔을 더 사랑함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출되었지만, 광야 생활 중에 애굽을 그리워했고 불평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세상이 주는 만족과 즐거움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 대해서 오해한 사람들이고, 여전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만나는 여러 망설임의 순간에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결단하십시오. 날마다 주를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결단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단함으로 그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보다 나은 자세로 하루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그 하루는 주님을 따라가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그 결단을 통해 주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우리가 필요할 때 잠깐하고 마는 아르바이트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며, 우리의 전부이며, 우리가 평생토록 충성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삶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전부가 되셨기에, 내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 내 삶이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이제 주님 뜻대로 저를 사용하십시오.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가 주중에는 나를 위해 살다가 주일이 되면 주님을 위해 산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마치 스위치를 가지고 켰다가 껐다가 하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회사에서든 어디서나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의 스위치는 주님을 위해 사용 중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자로 내 모든 인생을 이제 주님께 걸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내 인생을 좀 더 즐겁게 하기 위해, 좀 더 만족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된 것입니다. 나의 건강, 나의 재물, 나의 자녀, 나의 성공, 나의 꿈, 나의 가족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예수님 다음에 자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고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입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고, 가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을 예수님이 먼저 걸어가셨고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그 길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편안하고 쉽게 갈수 있는 잘 포장된 길이 아닙니다. 희생의 길이고, 헌신의 길이며, 결단이 따르는 길입니다. 쉬운 길이 아닙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쉽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우리 주님이 먼저 가셨고, 또한 주님이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때에 우리가 받을 보상은 크고 영원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보여주신 본을 좇아서 그 길을 따라 가십시오.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셨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셨고 온전히 헌신하셨으며 그 결심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사명의 쟁기를 굳게 잡으셨고 가장 값진 희생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갈 차례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들

  1.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58절)
  2. 왜 예수님은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의 요청(59, 61절)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3. 당신이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겪는 어려움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4. 주님의 길을 갈 때에 특별히 당신에게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5. 주님을 더 잘 따라가기 위해서 당신이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나누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