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죄인이 회개할 때 2

본문 : 시편 51편

설교자 : 최종혁

 

죄 문제를 해결하고 온전히 회복되기를 구하는 것이 시편 51편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 근간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다윗이 실제로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다. 시편 51편이 회개의 시편으로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유는 다윗이 누구보다 큰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회개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인이 우리도 같은 회개를 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 회개에 있어 정말 중요하다. 이 시편을 읽을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편 51편은 크게 나누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9절에서 다윗은 죄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구하고, 10-19절에서는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회복을 구한다. 오늘은 1-9절을 중심으로 다윗이 어떻게 회개 중에 그 죄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구했는지 살펴보자.

 

죄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구함(1-9절)

온전한 해결(1-6절)

1-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하여 죄 용서를 구한다. 그가 자신과 죄의 문제를 바라볼 때 그 안에서 해결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3절 – 다윗은 자신의 죄과를 안다고 말했다. 자신이 범한 죄가 자신의 앞에 있기에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4절 – 우리가 보는 죄는 드러난 죄로서 그 대상이 사람들이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죄는 그 마음이 왕이신 하나님께 반역하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떠나고,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기준에 이루지 못한 것의 결과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고백한다. 온전한 선이신 하나님을 떠나서 행한 모든 것이 악이고 그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도 악으로 드러났다.

이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판결이 옳다는 것도 알고 있다.

5-6절은 보다 더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다윗이 인정한다. 자기가 평소에는 원래 잘 했었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건데, 이번 한번만 어쩌다보니 실수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본래 죄인임을 고백한다.

5, 6절의 시작은 사실 같은 단어다. 6절의 “보소서”가 5절에도 있다. 다윗은 자신이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5절에서 말하고 6절에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이런 말이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제 안에 진실함과 지혜가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저는 그냥 죄인일 뿐입니다.”

이것이 죄의 문제다. 공의로우신 재판관 앞에 서서 자신을 변호할 아무런 증거도 논리도 없다. 자신의 죄가 앞에 있고, 마음을 아는 재판관 앞에서 내 과거의 동기를 정당화 할 수도 없고 내 미래의 삶은 다를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럼 뭘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죄인들의 궁극적인 고민이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상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뭐라고 해라다. 뭐라도 하면 좀 낮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다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말한다. 마치 아버지를 떠난 탕자처럼 그렇게 하는 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염치 없지만 아버지께 돌아간 것처럼, 죄인인 우리가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다.

1-2절에서 다윗이 구하는 것을 들어보라. 용서를 구하는 기도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다윗은 죄 문제의 해결을 “용서”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죄악을 지워주소서, 죄악을 말갛게 씻으소서, 내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구한다.

“지워주소서”

책 내용의 일부를 지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 43:25에서는 이 단어가 “허물을 도말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무언가를 발라서 가리는 것, 그래서 그 아래 있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그렇게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가리셔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기를 구하는 것이다.

“말갛게 씻으소서”

옷을 씻는 것, 빨래(세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때로 죄를 지은 것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여기서 다윗도 그렇게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더러운 옷을 입고 있어서 깨끗한 곳에 갈 수 없는 사람처럼 다윗은 자신이 이 죄를 가지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더러워진 옷을 깨끗이 씻어주실 것을 구한다.

“깨끗이 제하소서”

이것은 제사적 용어로 정결의식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의식적으로 부정하지 않은 상태로 나아가야 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그렇게 정하게 해달라고 구한다.

이 표현들은 온전한 죄 용서를 구하는 표현이다. 다윗에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책으로 치면 틀린 글자가 있다. 옷으로 치면 오물이 묻었다. 제사로 치면 부정한 상태가 되었다. 온전하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이다. 본래의 의도한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그런 상태로 만든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기쁨을 누릴 수 없게 한다.

그 죄를 범한 사람은 다윗이다.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으시다. 오직 다윗에게 있다. 그래서 다윗이 다시 온전한 상태가 되려면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가 필요하다. 죄의 문제가 온전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전혀 해결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다윗은 지우는 것, 씻는 것, 제하는 것과 같은 표현을 통해 온전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7-9절에서 다윗은 같은 표현들을 반복하며 그 결과도 언급하여 그가 지금 구하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밝힌다.

 

해결의 결과(7-9절)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절)

우슬초는 묶어서 붓처럼 사용하던 식물이다. 출애굽시에 문 주위로 피를 바를 때도 사용했고 제사 시에 정결의식을 할 때도 사용했다. 특히 나병으로 인해 격리되었던 자가 회복될 때 우슬초를 사용하여 정결 의식을 행했고 그 후로는 정한 자로서 대우를 받았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온전히 용서하셔서 죄에서 자유롭게 하여 주시기를 구한다. 그러면 자신의 눈보다 더 희게, 즉 온전히 거룩하게 될 수 있고 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다시 즐겁게 예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8절)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이 다윗에게는 무엇보다 즐겁고 기쁜 소리였을 것이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을 “주께서 꺾으신 뼈”라고 표현한다. 시편 32편에서 그는 범죄한 후 회개하기 전까지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었다.

시 32:3-4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많은 학자들이 시편 32편도 시편 51편과 같은 사건을 배경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윗이 범죄한 후 같은 고통을 겪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뼈를 꺾으시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실제로 몸이 아팠다는 말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영적인 고통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다. 뭐가 되었던 그런 고통의 시간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온전히 용서하셔야지만 가능하다.

여기서 잠시 사울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그의 죄에 대하여 변명만 늘어놓았을 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사울은 약간의 회개의 모습을 보이며 용서를 구한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것을 거절한다. 그러니까 사울은 이렇게 말한다.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이것은 사울이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예배 전에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범죄하였을지라도”라고 말할 수 없다. 범죄하였기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이것이 올바른 순서다.

다윗은 여기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다시 하나님께 기쁨의 예배를 드리는 것,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그렇게 하는 것은 그냥 “범죄하였을지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정결하게 하시고 죄를 씻어주시고 용서하셔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9절처럼 하나님께서 이제 그의 죄에서 얼굴을 돌이키시고 그의 모든 죄악을 지워주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느냐는 것이다. 죄를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냐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분이 아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다. 죄 지은 사람은 죄 용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안된다. 용서를 구할 수는 있지만, 용서를 당연하게 여기면 그만큼 용서 받기도 어렵다.

다윗은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를 구하면서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말갛게 씻으소서, 깨끗이 제하소서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먼저 사용한 표현이 있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절)

용서 받는 것은 은혜를 받는 것이다. 내가 회개했고 용서를 구했으니 당연한 결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죄로부터의 회개는 죄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야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된다. 용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이지 죄인의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

그래서 다윗은 1절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시작했다.

시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다윗은 용서를 은혜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두 가지 근거를 언급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인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많은 긍휼”이다.

“주의 인자를 따라”

인자는 우리가 잘 하는 헤세드이다.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말한다. 사랑의 약속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중 한 사람으로서 이런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결혼 관계를 생각해 보라. 혼인 서약을 할 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사랑의 약속을 한다. 이 약속은 두 사람에게 구속력이 있는 약속이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잘못을 범했다고 가정해보자. 잘못을 한 사람이 와서 용서를 구한다. 그런데 용서를 구하면서 “당신은 나를 어떤 상황에서든지 사랑하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약속에 따라 이제 용서해야 돼”라고 말한다면 어떻겠는가? 그것이 당연하고 나의 권리라는 식으로 주장한다면 어떻겠는가? 관계의 회복은 더욱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그 언약을 먼저 깬 사람이 와서 언약을 들먹이며 용서를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사랑을 언급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며 계속해서 그런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 언약의 관계를 끊지는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없다면 다윗은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을 것이다.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이다. 데릭 키드너는 탕자의 비유를 들어 다윗의 이런 복잡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탕자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하겠다고 다짐한다.

눅 15:18-19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자신의 상태를 볼 때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 이 관계를 끝내버린 사람이 나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는 끝낼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시 아버지께로 돌이키면서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인자를 따라 은혜를 구하는 것이 바로 그 모습이다.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약의 구체적인 실천 명령, 즉 율법에 따르면 다윗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 다윗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16절). 다윗은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구하기 위해 언약을 언급했다. 하나님, 그래도 하나님은 저의 하나님이시니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이다.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다음으로 다윗은 보다 더 하나님의 기본적인 속성을 근거로 제시한다. 바로 그분의 많은 긍휼이다. 긍휼은 특별히 도움이 절실한 자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바탕에 있는 사랑이다. 자신의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감정, 즉 모성애와 같은 것이 바로 이 긍휼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런 긍휼이 많다고 말한다. 그냥 용서 받기 위해서 하는 아부성 발언은 아니다. 하나님은 직접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으로서 긍휼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패역했을 때 모세의 중보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 시내산을 떠날 때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그들과 가실 것을 확답 받으며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요청한다(출 33:18).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피조물과는 구분되는 그분의 속성을 말한다. 그 요청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출 33: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모세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분은 선하셔서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에 숨기시고 자신을 드러내실 때도 이렇게 자신을 선포하셨다.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앞으로도 금송아지와 같은 사건이 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이 그것을 원하지는 않겠지만 반복적으로 넘어지고 하나님께 죄를 범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그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래야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아신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이 놀라실까? 쟤는 어떻게 또 저렇게 넘어질 수 있지? 전에도 그랬었는데 또 그러네? 구제불능이군. 내가 다 부끄럽다. 그러실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아신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선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긍휼하신 분이시다.

죄인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바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한다. 그럴 때 온전한 죄 문제의 해결을 경험할 수 있다.

다윗의 죄를 생각해보라. 정말 끔찍한 죄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았다. 그 사람을 속이고 죽였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하를 이 죄에 관여하게 만들었다. 왕으로서 자신의 나라에 큰 위험을 가져왔다. 만약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몰랐다면 다윗은 그 죄에서 평생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기억했을 때 그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

시 51:1-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이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시 한번 경험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교훈

두 가지 질문으로 말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 다윗은 왜 그렇게 그의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기를 구했을까? 왜 죄악을 지우고 말갛게 씻고 깨끗이 제해달라고 구했을까?

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절대로 조금의 죄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지, 어느 정도만 해결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죄의 문제를 절대 가볍게 생각하면 안된다. 구원 받을 때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했다면 계속해서 그러해야 한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 거해야 한다. 구원 받은 자들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 자기 죄를 자백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하신다.

어차피 용서 받은 죄라는 생각을 혹시나 한다면 버려야 한다. 그런 가벼운 죄는 없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 우리는 죄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범한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그래야 빛 가운데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둘째, 다윗은 왜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을까?

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기 때문이고 그 외에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그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죄를 용서하시는 것 뿐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복음이었다.

사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복음이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온전한 죄 문제의 해결의 길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이 복음이 우리들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이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들이다. 다윗처럼 자신의 죄, 죄책, 무능력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빈손으로 나와서 긍휼을 구하는 자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이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믿은 자들도 마찬가지다. 삶에서 반복되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해야 한다. 그 죄가 우리를 아버지와 누릴 수 있는 온전한 기쁨에서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이 괜찮다면 문제가 있다.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나의 염치없음보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을 더욱 원하기 때문에 긍휼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것이 긍휼하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의 회개다.

죄인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 죄인을 긍휼하게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다. 다른 사람도 다 알 수 없고 나 자신조차도 다 알 수가 없는데, 하나님을 다 안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죄로 힘들어 하고 있다면, 죄와 싸우고 있다면, 그 하나님께 회개하며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풍성히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