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죄와 징계_죄로 인한 고통 가운데 있는 자녀의 기도
본문: 시편 38편
설교자: 최종혁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징계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랑은 그 대상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신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 12:5-10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징계하신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 육신의 부모도 우리에 대하여 그렇게 했고, 우리도 우리의 자녀에 대하여 그렇게 한다. 자녀의 유익을 위해서 자녀를 유익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사랑과 징계를 함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가 올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유는 징계에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징계를 당할 때는 그것이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는 것이다. 나의 유익을 위한 일은 즐거운 일일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랑이라는 개념과 고통의 개념을 함께 이해하기가 어렵다. 사랑과 고통은 함께 있으면 안 될 말들 같은데, 사실은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고통스러울 수 있을까? 우리는 시편 38편에 기록된 다윗을 말을 통해 그 고통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보다 더 큰 징계의 고통도 있을 것이다. 오늘은 다윗이 경험한 징계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사실, 그 고통의 크기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녀의 삶 가운데 있는 죄를 미워하시는 지를 보여준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셔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다윗이 죄로 인한 고통 가운데서 드리는 탄식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런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배우기 원한다.
표제에 [다윗의 기념하는 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기록한 시로서 기념 혹은 기억하는 시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레위기에 나오는(레 5:12-13) 기념 제물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단지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상황을 기억하기 위한 시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시편에서 자주 볼 수 없는 제목이다. 그런데 같은 제목이 시편 70편에도 나온다. 두 시편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인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라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금의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상황에 두신 것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드는 그런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라고 볼 수 있다.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1-14절에서 볼 수 있다.
징계와 탄원(1~14절)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탄원으로 기도를 시작한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1절)
이 탄원은 시편 6편 1절과 거의 같다. 비슷한 상황에서 기록한 시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시편을 보면 때론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시편에서 다윗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고 있고 징계를 당하고 있다.
원인은 자신의 죄다.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3절)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4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5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18절)
어떤 죄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다윗은 분명히 자신이 죄를 지었고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죄가 항상 그렇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무엇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인지 안다. 다윗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에는 죄를 택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참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죄를 범하는 그 순간에는 그 ‘정신’이라는 것이 없다. 순간의 쾌락을 원하는 감정이 있고, 이건 어쩔 수 없고 뭐 나라고 대단한 그리스도인이냐는 자기 합리화가 있고, 누구나 이런 죄는 가지고 살아간다는 변명이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셔서 죄를 죄로서 보게 하시면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알게 된다.
다윗은 지금 그런 상황에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로 인한 죄책감이 자신을 짓누른다(4절).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에 다윗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다윗이 이렇게 자신의 죄의 무게를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책망하셨을 뿐 아니라, 징계하셨기 때문이다. 이 징계는 눈으로 보이는 것이었고 다윗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2절)라고 표현한다. 찌르는 듯한 고통, 압사될 듯한 압박감이 그에게 있었다. 그의 살에는 성한 곳이 없었고 뼈에 평안함이 없다(3절). 그의 상처가 썩어서 악취가 난다(5절). 다윗은 몸을 펼 수조차 없었다(6절). 고통 중에 평안히 쉴 수 없었고 슬픔 중에 다녀야 했다. 그의 허리에는 열기가 가득했다(7절). 아마 타는 듯한 고통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다윗은 고통 중에 기운을 잃었고 상했다(8절). 몸이 부서졌다는 말이다. 그의 마음은 불안했고 신음했다(8절). 여기 신음은 시름시름 앓는다는 의미보다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으로 몸부림치며 소리치는 모습에 더 가깝다.
다윗이 말한 이런 고통의 하나만이라도 내 삶의 어느 순간에 지속된다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아마 심한 두통으로 고생하거나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다윗의 이런 표현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보이지 않는 곳만 아팠던 것이 아니고 보이는 살까지도 엉망이 되어 몸에서 악취가 날 정도였다. 그 상처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멀리할 정도였다.
이것이 다윗이 처한 상황이었고 그가 당하고 있는 징계였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지만 또한 동시에 그 직접적인 책임은 자신의 죄 때문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어리석은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이런 징계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다윗을 버린 것처럼, 다윗을 진노 가운데 심판하실 것처럼 대하셨다. 다윗의 죄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때 비로소 다윗은 자신의 죄를 바로 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그럼 왜 다윗은 1절에서 “책망하지 마시고, 징계하지 마소서”라고 기도할까?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묵묵히 견디지 않고 왜 이런 탄식을 하고 기도를 할까? 9절에서도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 지금 제 상황을 잘 아시고 제가 무엇을 구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재차 1절의 탄원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통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에, 이유여하를 떠나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기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씀을 보면 다윗은 책망과 징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주의 ‘노하심’으로 책망하시는 것, ‘분노하심’으로 징계하는 것에 대해서 말했다. 주의 노하심, 분노하심의 결과는 징계가 아니라 형벌이다. 징계와 형벌은 다르다. 형벌은 죄에 대한 대가를 모두 치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원칙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의 상태와는 관계가 없다. 죄를 짓게 된 상황이나, 그 후의 뉘우침 등에 관계없이 죄 자체를 보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형벌이다.
하지만 징계는 죄를 깨닫고 돌이켜서 회복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재판관은 죄수에게 형벌을 내리지만, 부모는 자녀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징계를 한다. 단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것이다. 재판관은 죄수가 형을 다 치르고 다시 죄를 지으면 또 형벌을 내리면 그만이다.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부모는 자녀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래서 징계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상황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징계하고 계시다면 이젠 그만 멈춰달라는 것입이다. 물론 징계의 끝은 징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징계를 하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닌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그에게 합당한 것은 죄에 대한 대가이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그것을 거둬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재판관이 아닌 아버지로서 자신을 대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다윗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 그의 유일한 희망이 지금 그를 징계하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10절부터의 말씀이 이것을 말한다.
그 스스로도 무능력하다(10절). 심장은 빨리 뛴다. 고통과 불안으로 초조해 하는 상태를 말한다. 기력이 없고 눈의 빛이 없다. 구약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 다윗 자신은 마치 죽은 자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지금 상황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를 도울 만한 사람도 주변에는 없다(11절). 다윗의 상태가 그와 가까운 자들을 그와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자들이 다윗이 이런 상황에 처하자 그를 떠나갔다.
TV나 미디어를 통해서 혹은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을 돌봐야 할 사람들이 그러지 않고 떠나는 경우를 본다. 그런 것을 보면서 쉽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사람이 그렇다.
그의 주변에서 그를 해하려는 자만 있다(12절). 다윗의 원수들은 기회를 잡았다. 그들은 그저 다윗의 죽음을 원하지는 않았다. “괴악한 일”은 파멸을 의미하는 단어다. 그들은 이 기회를 통해 완전히 다윗이 파멸에 이르기를 원했고 그렇게 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않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않았다(13절).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14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돌보시는 것이지 다윗이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윗의 상황은 정말로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육체의 질병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주위에는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은 없고 오히려 이 기회에 자신을 파멸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이 왜 이런 상황에 있느냐다. 다윗 스스로가 인정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의 어리석은 죄 때문이다. 그가 그 죄를 범할 때 그는 죄를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 죄를 심각하게 보셨다. 그냥 두면 그 사랑하는 자녀가 더 좋지 않은 길로 갈 것을 아셨다. 그가 계속해서 하나님보다 죄를 사랑하게 두실 수는 없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다. 고통 중에 자신의 죄가 얼마나 중한 것인지 깨닫고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원하셨고, 정확히 지금 다윗이 그 과정 중에 있다. 다윗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길 원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구원과 확신(15~22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15절)
다윗의 기도는 탄식에서 확신으로 바뀐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유 1 – 하나님의 이름(평판)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16절)
먼저 다윗은 지금 같은 상황이 지속되고 결국 다윗의 대적들이 원하는대로 이루어지면 그들이 다윗을 향하여 스스로 교만하여 질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신이 수치 당하는 것을 곧 하나님의 수치로 생각했다. 왕이 되기 전 골리앗과 싸울 때도 그는 하나님의 군대가 모욕 당하는 것을 참지 못했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그 이름을 그 백성에게 두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더 기고만장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유 2 – 다윗의 급박함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17절)
다윗은 넘어지게 되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서 간섭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스라엘의 군대가 모욕당하는 것을 자신이 모욕당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유 3 – 다윗의 회개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18절)
다윗이 회개하고 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한 또 다른 이유는 징계의 목적이 달성되었다는데 있다. 징계는 죄인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다윗은 지금 자신의 죄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는 죄책감이 컸지만 그것에 억눌리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죄를 가져와 자백했다.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그 징계를 끝내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유 4 – 하나님의 공의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으며 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19~20절)
마지막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다. 다윗이 비록 죄를 범하긴 했지만, 그는 궁극적으로는 선을 따르는 자다.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날 것을 확신한다.
‘확신’이라고 표현했지만, 이것은 다윗 입장에서의 확신이다.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다. 하지만 다윗은 여러 이유를 들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구를 들어주셔야 함을 강조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간구한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절)
결국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 있다. 죄로 인한 징계 가운데서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가 속히 임하기를 구한다.
죄는 죄다.
우리는 죄를 가볍게 보는 죄들이 있다. 이 정도는 다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죄들이 있다. 삶의 윤활유라고 생각하는 죄들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하신 일을 보라. 주님께서 그 몸으로 친히 담당하셨던 고통이 바로 우리 죄의 무게다. 결코 가벼운 죄는 없다. 구원 받은 자는 죄의 짐을 벗었지만, 그렇다고 죄의 무게를 잊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죄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이다. 다윗의 상처에서 악취가 나고 그로 인해 사랑하는 자들이 그를 멀리 했던 것처럼,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그런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다시 한번 괴롭고 수고로운 일을 하신다.
그렇다고 모든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여기 다윗에게 하셨던 것처럼 하시는 것은 아니다. 병에 걸렸다고 해서,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다고 해서 다 죄의 결과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징계로서 그런 일들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죄는 죄다. 하나님은 죄를 언제나 죄로서 다루신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
결국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께 소망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분께 구하고 부르짖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너무 고통스럽고 어려운 그런 징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이끄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복될 뿐 아니라 더 연단되어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더 달려가기를 원하신다.
히 12:12-13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지금 어떤 이유에서든 고통 중에 있다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열매 맺게 하신다. 그러니 피곤한 손과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 하나님께서 다시 힘을 주시고 달리게 하실 것이다. 연약함에 익숙해지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힘을 내라.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시고 우리의 구원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