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
본문 : 누가복음 5장 17~26절
설교자 : 최종혁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예수님께서 공적인 시역을 시작하시고 그 기록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하셨던 일은 크게 두 가지로 가르치시는 일과 병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파하셨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사람의 병을 고치신 기적들을 몇 번째 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고치셨다는 병고침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긴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지만 복음서 저자들은 기록 목적에 맞는 필요한 내용을 선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를 통해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 목적과 배워야 할 진리가 숨어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날 병자는 중풍병자입니다. 이 기록은 누가복음뿐만 아니라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배경으로 제시되었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명해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죄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누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자연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고 말합니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죄인이라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혹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다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 말씀은 우리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선언은 입법자와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내리신 선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선고가, 너희가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만히 두면, 또는 시간이 가면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는 그냥 두어도 내 생활에 큰 지장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잘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현재 삶뿐만 아니라 영원의 삶을 좌우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모두라고 할 때 이 말은, 죄인인 것 같은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법에 반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분의 법을 거스르는 것, 반대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요한은 요한일서 3장 4절에서 “죄는 곧 불법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지 않고 다른 이에게 있지 않습니다. 죄라는 것은 어떤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 동기, 본성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법에 거스르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본성으로 태어나 그것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51장 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저희 집에 갓난아이가 있는데 굳이 나쁜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순진무구한 아기도 죄악 중에 태어난 것입니다. 지금은 그 아기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없는 것이지 할 수 있게 되면 곧 그렇게 죄를 범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로마서 8장 7절에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인으로 살아갑니다. 그에 대한 결과는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로마서 2장 6절에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말하며 로마서 6장 23절에선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포합니다. 육신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고 그 결국은 지옥의 형벌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까요? 우리가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에 비교해서 조금 착하다고 하는 정도입니다. 나의 죄를 상쇄하기 위해 좋은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고행을 통해 죄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속세를 떠나서 살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지 안다면 그렇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입법자와 재판관이시라면 그분이 정한 대로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주신 해결책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해결책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죄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해결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함에 따라 하시는 일이고 죄인은 겸손히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죄 사함, 과연 예수님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었는가가 주요 논쟁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17).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 주 무대가 되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가르치셨고 병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파송하시고 70명의 제자를 파송하실 때 그동안 예수님이 해 오셨던 ‘가르치고 병 고치는 일’을 그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가장 주된 것은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병 고치는 일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가버나움 근처에서 온 사람들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도층이 모여 있었던 곳에서 사람들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들었고 사람을 보내 예수님의 사역하는 곳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처음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처음 하셨던 것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일들을 쫓아내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은 적대감을 가지고 비판적인 자세로 예수님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해 우리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자들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면서 어떻게 삶에 적용하며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사람들입니다. 규례와 규정을 만들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연구하고 살아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기가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빠지고 순종에 대한 부분만이 남아 형식적인 순종을 자신들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그런 멍에를 씌웠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변질된 바리새인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순수함은 사라지고 종교성과 형식만이 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욱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자들인데, 대부분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에 영향력 있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당시에는 이들 중에도 사두개인, 에센파 등이 있었고 열심당원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바리새인은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이들이 오늘 말씀에 등장하고 예수님과의 논쟁이 일어납니다.

18절-19절에 보시면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몸의 일부나 전부가 마비되었을 것입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혼자 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데려왔는데 예수님께 가까이 올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집 안에 계셨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문을 뚫고 들어갈 수 없어서 지붕을 뚫었습니다.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우리의 옛 문화, 기와집을 상상한다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붕은 평평한 지붕이었고 시멘트가 아닌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지붕이었습니다. 건기에는 나무 정도로 덮고 우기에는 진흙을 이겨 만들었습니다. 지붕으로 가는 계단을 바깥쪽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더위를 피해 지붕으로 가서 쉬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뜯기 어려운 지붕이 아니었고 무거운 짐을 나를 때는 지붕을 뜯어서 옮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지붕을 뜯은 것은 지나치게 상식을 벗어난 행동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평범한 일은 아닙니다. 자기 집도 아닌데다가 그 집 안에서의 상황을 알면서도 지붕을 뜯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상황이라고 생각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병을 고치는 예수님이 계셨고 중풍병자는 병 낫기를 사모하고 있는 상황,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방해하더라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특별한 상황을 더 특별하게 만드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20).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십시오. 지붕을 뚫고 침상이 내려왔고 누워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 상황을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원칙주의자들인 그들은 이 상황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시는지 궁금해 하며 지켜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저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을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는 말을 하십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다른 번역본에는 “친구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작은 자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어린 아이나 아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친근하게 부르시면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으려고 왔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정황상 그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 나온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죄 사함이나 병 고침이 그렇게 다른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병이나 장애가 있는 것,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죄와 연관지어 생각했습니다. 심각한 상황일수록 더욱 그러했습니다. 욥에게 친구들이 와서 회개하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자에 대해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볼 때, 이 사람이 맹인된 것이 그의 죄 때문인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물어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았던 나병환자도 그런 죄책감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큰 장애를 가지고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치신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어서 이런 중풍병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리라” 이 말을 들었을 때 중풍병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중풍병자는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사람의 죄 사함을 선포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는 왜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을까요? 무례를 무릅쓰고 지붕을 뚫고 내려온 이유는 예수님이 병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충분히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구원받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리라” 이미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가랴가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그를 보고 예언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눅 1:77). 실제로 요한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눅 3:3). 그는 계속 죄 사함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제 그 죄사함을 선포하는 일을 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중풍병자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 죄 사함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의 죄가 사해졌다는 선언을 받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 사함을 받습니까?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선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고 로마서 4장 5-8절에선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죄 있는 사람을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죄에 대한 형벌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로마서 3장 25절-26절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예수님의 피로 드린 화목제물, 그 피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가 없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가가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신 일입니다. 지금 본문의 시점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죄 사함은 십자가 사역에 기초해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십자가 사역에 기초해서 중풍병자에게 죄가 사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변하지 않을 선포입니다.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선포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입니다. 구약성경에 정통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도대체 예수님이 누군데 중풍병자의 죄를 사한다고 말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을 사칭해서 말하는 사기꾼처럼 여겼습니다. 이들이 잘못된 결론을 내린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죄를 사하노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마치 중풍병자의 죄를 사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받아들였을까요?

이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를 빌려서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구약에서 나단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죄 사하심에 대해 말할 때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단 자신이 다윗의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다윗의 죄를 사하셨고 나단은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권위 말씀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고 그 이후에야 백성들의 죄가 사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런 절차가 없이 바로 너의 죄가 사해졌다고 했기에 자신의 권위로 죄를 사하고 있다고 문제 삼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친히 희생제사가 되실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중풍병자의 죄가 사해질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22절에서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면서 23절에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것이 쉽습니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쉽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은 금세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죄 사함이 있을 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침으로 그것을 증명하겠다는 것입니다. 24절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어려운 말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줌으로 죄를 사함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하는 것과 병을 고치는 것 두 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마귀도 병을 어느 정도는 고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순간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병은 즉시 나았습니다. 긴 세월을 누워있던 자가 즉각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병의 회복기간이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하나님은 이 사람의 병은 즉각 고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 중풍병자에게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면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일어나지 않으면 예수님은 신성모독의 사기꾼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25) 예수님이 하셨던 명령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 말씀 그대로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졌습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6절에 보시면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동일하게 이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마태복음을 보시면 이들의 반응에 대해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기록합니다. 이 사람들은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본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이렇게 하시는구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이 사람의 몸속에 와 계시다는 것은 놓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 깨달았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 일 자체에 대해서만 놀라워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 중에 어떤 이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책잡고 잡아 죽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증거가 없어 못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이적에 대해 이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능력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 신성모독의 죄를 씌워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이 치유 사역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은 인색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래 참으시고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십니다.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회개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시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죄 사함도 필요없이 여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스스로 의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중풍병자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죄 사함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모두가 죄 사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그분께 나오십시오. 주님께서 그런 자를 절대 내어 쫓지 않으십니다.

죄 사함을 받으신 분은 우리가 어떻게 이 죄 사함을 얻게 되었는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과 은혜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그 복을 누리고 계시다면 그 하나님을 찬양하시고 그분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