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좋은 교회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장 2-4절
설교자 : 최종혁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 사람마다 혹은 교회마다 가지고 있는 기준이 다르다. 선교 혹은 전도하는 교회, 양육하는 교회,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 성도들이 서로 친한 교회 등등… 목회자들의 목회 철학에 따라서 교회는 이 중에 어느 쪽으로 조금씩은 더 집중하기 마련이다. 예전과 다르게 교통이 발전하면서 성도들도 자신들이 더 ‘좋아하는’ 교회를 찾아간다. 하지만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교회의 모습들은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지만, 그 자체가 좋은 교회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때로 선교나 전도를 매우 강조하는 교회를 보면 역설적이게도 교회가 세상과 많이 닮아 있는 경우들이 있다. 구도자들이 오기 좋은 교회, 불편하지 않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교회 안으로 가져온다. 음악은 길어지고 말씀은 짧아진다. 심판과 경고의 말씀은 사라지고 위로와 격려, 사랑에 대한 말씀만을 전한다. 회개는 선택이고 ‘네 모습 그대로’만 강조된다.
때로 성도 양육을 강조하는 교회를 보면 세상과의 다름을 강조하면서 정죄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교회들을 미성숙한 교회로 판단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회 봉사하는 교회는 다른 봉사 단체와 별반 다르지 않기도 하다. 성도들이 친한 교회는 성도들만 서로 친한 친목회 같은 교회가 되기도 한다.
교회란 무엇인가? 무엇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가? 선교를 하면 교회인가? 선교는 어쩌면 선교 단체가 더 잘할 수도 있다. 양육을 하면 교회인가? 성경 학교가 더 잘 할 수도 있다. 사회 봉사는 전문적인 단체가 더 잘할 수 있다. 성도 간의 교제도 마찬가지다. 즉, 이런 것들은 우리가 교회로서 하는 일들이지 궁극적으로 교회를 정의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왜’ 하느냐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는 그 다음 문제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불러낸 자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그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이며, 그에 합당하게 행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다. 어떤 하나의 일이 아니라 부르심의 목적을 최우선에 두고 나머지의 일들을 그 안에서 결정하고 행하는 것이 좋은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가? 선교인가? 양육인가? 사회 봉사인가? 성도들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함인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그분의 영광을 위하는 것처럼,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궁극적인 목적도 동일하다. 교회는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드러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그 중심에는 어떤 사람이나 사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 이것이 ‘왜’에 대한 해답이고 이것이 ‘무엇을 어떻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한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이 그렇게 드러나시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목적에 합당하게 행하고 있지 않은 것이며 좋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선교사를 많이 보내거나 교육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면 좋은 교회가 된 것 같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리 잘 돌아가도 그 교회는 단지 사람이 많이 모이고 돈이 많은 교회일 수 있다. 단지 종교적 열심이 넘치는 교회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다. 정말 좋은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다. 그럼 어떤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일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며 이런 교회의 모습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표현한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2절)
“기억함은”
단순히 머릿속으로 기억만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도할 때 기억했다는 것은 그들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의미도 된다.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할 때에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기도 중에 언급했다.
“항상”, “끊임없이”(3절)
계속해서 그렇게 했다. 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가 필요하기도 했겠지만, 주로 그 기도의 내용은 감사였다. 바울은 이들에 대한 소식을 들은 이후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워진 교회였다(행 17장).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정치, 상업의 중심지였고 그 당시 이미 20만명정도가 그곳에 살고 있었던 큰 도시다. 그곳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고 그곳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선포했다. 바울의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이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그 일행을 쫓아냈다.
바울과 실루아노, 디모데는 베뢰아로 가서 전도를 했고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그곳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핍박했다. 이에 바울은 먼저 아덴으로 건너가고 후에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교회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로 다시 가고자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살전 2:18).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만 따로 보내서 그들이 어떠한지를 알아본다(살전 3:1-2).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디모데를 만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디모데를 통해 듣게 된 소식은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살전 3:6). 바울의 예상처럼 그들은 환난 중에 있었지만 믿음을 잘 지키고 있었다. 여전히 더 배울 것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칭찬받아 마땅한 교회, 성도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교회로 자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빌립보 교회가 그러했듯 데살로니가 교회도 어린 교회였지만 바울에게는 자랑거리이자 기쁨이 되었던 교회였다(살전 2:20). 그들은 바울의 기도 제목이었겠지만, 지금은 감사제목이 되었다(살전 3:9).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좋은 교회로서 자라가고 있었다. 이 좋은 교회의 특징을 바울은 세 가지로 표현한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3절)
바울은 단순히 너희 안에 있는 믿음, 사랑, 소망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매우 중요한 것들이지만 동시에 모호한 말이 될 수도 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너희를 통해 역사와 수고와 인내를 보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중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역사는 믿음으로 인한 것이었고, 수고는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인내는 소망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역사했고 사랑은 수고했으며 소망은 인내했다.
바울은 그것을 기억하고 감사했다. 그에게 있어서 더 큰 자랑거리와 기쁨이 없었다. 바울은 말과 삶으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께 합당히 행”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2:12).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4:1). 긴 시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이런 진실된 성경의 가르침에 올바르게 반응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이다.
I. “믿음의 역사”
먼저 바울은 “믿음의 역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바울만큼 의롭다 함을 받는데 있어 믿음과 행위를 구별한 사람이 없다. 물론 다른 서신서의 저자들도 같은 진리를 가르쳤지만, 특히 바울은 이 부분에 있어 누구보다 분명하게 가르쳤던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바울만큼 구원받기 위해 행위에 몰두했던 사람도 없다. 그는 누구보다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있었고 그 열심에 따라 행했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고 그는 그 확신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가 천성적으로 폭력적이거나 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만한 확신과 열심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이 모든 것들을 버렸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방해만 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 후에도 그것이 그가 전파했던 복음의 핵심이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율법을 더하려고 하자 그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겼고 갈라디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탄식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전해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한다며 그들을 강하게 책망하기도 했다.
이런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과 관련해서 율법이나 행위를 언급하는 것은 정말 원하지 않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구원받는 믿음은 단순히 믿는다는 고백이 아니라 전적인 신뢰이기때문에 그 믿음에는 분명한 행위, 삶의 변화가 따라온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도 분명하게 가르쳤다. 숨기려 하거나 모호하게 말하지 않았다.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이런 부분이 분명하게 드러난 편지들이 많다. 갈라디아서에서 조차도 그는 자유한 자로서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할 것을 말했고,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면서 성령으로 행할 것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진정한 믿음은 언제나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전히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구원에 기여한 바가 없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믿음이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데살로니가인들의 믿음은 그런 믿음이었다.
이들의 믿음의 역사에서 두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분명한 역사
살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전파된 복음은 그들에게서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확성기와 같았다. 복음이 전파될 때, 어떤 사람들은 매끈한 대리석처럼 어떤 말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반사해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흡음제처럼 잘 흡수하지만 들어간 소리가 다시 나오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인들은 확성기 같았다. 좋은 음향 시스템 같았다. 그들에게 들어간 복음은 마치 좋은 마이크가 소리를 잘 흡수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잘 흡수되었을 뿐 아니라, 좋은 앰프와 스피커가 소리를 잘 퍼뜨리는 것처럼 더 넓은 곳으로 더 큰 소리가 되어 퍼져 나갔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는 데살로니가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다. 이미 주변에 있는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생긴지 겨우 몇 달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교회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특별한 전도 프로그램을 도입했을까? 그들이 생업을 다 버리고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복음 전하는 일만 했을까? 아니다. 그런 일들이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핍박 중에 있었고 바울은 그들이 핍박으로 인해 믿음을 버리거나 흔들리지 않을까 염려를 해야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난 사람들이 마치 선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변화는 분명했고 강력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고,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그들의 소문을 자연스럽게 퍼뜨렸던 것이다. 그들이 마치 선교사처럼 복음과 그 능력을 전하게 된 것이다. 누구는 긍정적으로 누군가는 부정적으로 말했을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가 분명했고 그들 주변의 사람들은 그것을 놓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소리가 얼마나 분명하고 강력했던지,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그 소문을 이야기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굳이 할 얘기가 없을 정도였다(9절,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어떻게 복음이 이 어린 교회를 통해 그렇게 퍼져 나갈 수 있었을까? 그들의 믿음이 분명하게 역사했기 때문이다. 그 분명한 역사를 본 자들은 조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살전 1:9-10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이들의 믿음의 역사는 분명했고 극적이었다. 그들은 과거의 삶을 청산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겼다. 고난 중에서도 오히려 그들의 구원자 예수님을 기다리며 소망 가운데 살았다. 이들의 변화는 모호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서 이전과 다른 점이 뭐가 있는지 찾아봐야 하지 않았다. 믿음의 역사가 분명했고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변화된 삶의 이유도 분명했다. 여러 요인들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에게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을 변하게 했다. 그들이 어떤 새로운 철학 사상을 알게 되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단지 바울을 만나서도 아니었다. 그들이 단체로 어떤 특별한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서도 아니었다. 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을 영접했다. 예수님을 믿은 것이 이 모든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의 믿음이 극적으로 역사한 것이다.
성경적 역사
이들의 믿음의 역사에는 또한 분명한 방향성이 있었다. 단순히 과거와 삶이 달라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역사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자신의 생각이나 다른 유명한 철학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어느 곳에 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 그 외에 어떤 다른 것을 전하지 않았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삶에 있어 좋은 변화를 일으키는 요인들은 많이 있을 수 있다. 어떤 큰 사고나 병을 만나서 사람이 변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좋은 책, 글이 사람을 변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바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 가운데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렇게 전해진 말씀을 듣는 자들은 그것이 바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였고 그랬을 때 그 말씀이 믿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했다.
믿음이 역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방향을 보여주고 경계를 정하고 균형을 잡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화의 기준이 된다. 그저 우리가 원하는, 혹은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일들이 믿음의 역사가 아니다. 때로 그런 것들이 우리 눈에 믿음의 역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단순히 교회에 잘 나오고 봉사에 빠지지 않고 하는 일들이 믿음의 역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찬양을 잘 하고 기도를 잘하는 것이 믿음의 역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누군가 절대 TV를 보지 않고 성경만 읽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역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술, 담배를 끊는 것이 믿음의 역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을 우리는 ‘분명한 역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분명한 역사도 하나님 말씀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믿음의 역사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어떤 변화를 말하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고 하면서 그것을 알아야 한다. 내 생각이나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삶을 바꿔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알게 된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삶을 바꿔가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믿음의 역사다.
중간 정리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그 첫번째 특징은 이런 믿음의 역사가 계속해서 나타나는 교회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과거와는 다른, 즉 구원받기 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때 교회는 부르심에 합당한 일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런 믿음의 역사가 전혀 없다면 그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다. 진정 구원받은 성도라면 이런 믿음의 역사가 어느 정도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역사에 분명하지 않거나 성경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우리 각자의 그런 부분을 다듬어 가는 것이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어 가는 과정이다.
모두의 믿음의 역사가 동일할 수는 없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믿음의 역사를 나타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믿음은 동일하고, 따라서 그 믿음이 역사한다는 것도 동일하다. 그들의 믿음이 분명하게 그리고 성경적으로 역사했다.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한다.
우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모두 퍼지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이 언제까지나 나에게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 않던 우리가 우상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돈이나 세상의 평판, 다른 사람의 시선, 자녀, 나의 행복과 같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버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