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왕이신 예수님의 분노
본문: 누가복음 19장 45절 ~48절
설교자: 조정의

지난주에 이어 예수님의 감정이 확실히 드러나는 본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예루살렘 성을 보고 통곡하셨던 장면을 살펴봤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소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백성의 무지함과 그로 인해 받게될 심판을 미리보시고 슬피 우셨습니다.

이번주에는 성전 안에 들어와 불같이 화를 내시는 예수님을 살펴볼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이 분노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설명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거룩하고 공의로우시며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예수님이 분노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세 가지 기준점을 가지고 예수님의 분노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분노의 이유, 분노할 권리, 분노의 방법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 기준을 통해 첫째, 그분에게는 분노할만한 이유가 있으셨고, 둘째로 주님께 분노할 권리가 있으셨으며,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표출한 분노의 방식은 오히려 자비롭고 은혜로운 방식이었다고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시 85:4)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구원의 하나님 예수께서 왜 분노하셨는지 살펴보고 우리가 돌이켜야 할 삶의 방식은 없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1. 분노할만한 이유가 있었는가?

최근에 기사를 보니 원하는 약을 처방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인 병원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지르려고 했던 환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 어떻게 이유같지도 않은 이유로 화를 낼 수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반면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영화속 주인공을 보면서도 지지하고 응원하는 이유는, 그 주인공이 부모님을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한 합당한 이유로 분노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분노에는 그것을 설명할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분노할만한 이유가 있었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어떨까요?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5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이 분노하신 장소는 성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어 열 두 제자를 데리고 감람선 너머에 있는 베다니로 돌아가셨습니다(막 11:11).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이튿날 성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고난주간 중 월요일이었습니다.

전날 이미 성전을 둘러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일을 하신 것같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이 분노할 이유가 될까요? 이들은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희생제물을 죽이고 바치는 성전, 그 밖에는 여러 기둥으로 둘러쌓여있는 큰 광장이 있었는데, 그 광장을 이방인의 뜰이라 부릅니다. 바로 그곳에 곡식과 가축을 팔고 환전을 해주는 작은 시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런 장사는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이 아니라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부터 제단에 바칠 제물을 가지고와야 하는데 이는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포도주, 기름, 소금은 그렇다 해도 소, 양, 비둘기 등 가축을 살아있는 채로 성전까지 몇달에 걸쳐 가져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밖 광장에서 돈을 내면 제물로 바칠 것들을 살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상인들을 내쫓은 것일까요?

이 말씀을 오해하면 교회 안에서 사고 파는 모든 행위를 부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이블타임을 신청받아 나눠주고, 좋은 책이나 음반이 나오면 싸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때로는 채소, 야채도 사고 파는데, 예수님이 교회에 들어오셔서 그런 사람을 보고 분노하며 내쫓을 것이라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유로 분노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분노하셨다면 예수님의 분노는 부당한 분노입니다.

성전 밖에 있던 장사꾼들은 사실 대제사장 안나스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나스는 대제사장으로 일하면서 막강한 부와 권력을 취하다가 총독 구레뇨에게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여 예루살렘의 공직을 쥐락펴락했고 그의 자식과 손자가 대제사장직을 이어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안나스의 사위 가야바가 성전을 통솔했습니다.

안나스는 자기 가족의 돈줄로 성전에 장사를 이용했습니다. 자기의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게 해주는 자금줄이었습니다. 희생제물은 반드시 흠이 없고 정결해야 했는데,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아 가져온 제물은 넘기고 장사꾼이 파는 제물을 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수익을 남겨 안나스의 배를 불려주었습니다.

성경학자 바클레이 말에 따르면 성전 밖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약 2000원이었다면, 여기 장사꾼이 파는 가격은 30,000원 가까이 되었습니다. 15배의 이득을 남기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유대 남자는 매년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했는데, 이는 노동자의 이틀 노동임금입니다. 성전 밖에서는 모든 화폐가 통용되었는데, 이 장사꾼들은 성전 안에서 오직 갈릴리 세겔만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환율을 이상하게 적용하여 소득을 남겼고, 추가로 교환 요금을 두배로 물렸습니다.

완전 “날 강도가 따로없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46절 후반부에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매복해 있다가 여행객을 습격하여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은 다음 죽도록 버려두는 강도처럼 이 장사꾼들, 그리고 그들 위에 있는 제사장 가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을 무자비하게 벗겨 먹어 자기 배를 불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일 유평교회에서 특수제작한 성경만을 사용하겠다고 선포하고 여러분이 가지고 온 성경을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반입불가시킨후, 특수제작 성경 값을 100만원으로 부른다면, 그리고 그 수익을 모두 제가 갖는다면 어떨까요? 다른 교회로 가겠죠?

여기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교회가 없습니다.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이곳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이들은 여기 무조건 와야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자기 집 앞에 산당을 지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 이곳에 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사랑하여 지키는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을 악용하여 자기 배를 불리려는 것, 그것도 예배자를 섬기는 직분인 제사장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그에 합당한 분노를 표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노할만한 이유가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충분했습니다.

  1. 분노할 권리가 있는가?

다음으로는 분노할 권리가 있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유가 합당해도 권리의 문제가 남습니다. 예를 들어 아파트에 가끔 장이 섭니다. 분식, 완구, 문구류 등 다양한 물건을 파는 장이 들어서는데, 제가 어떤 아파트에 들어가, “당신 여기서 장사하지마!”라고 한다면  그 장사꾼은 뭐라고 제게 말할까요?

“당신이 무슨 권리로?”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은 지금 아파트 관리자에게 권리를 얻어 장사를 하고 있는데, 당신은 무슨 권리로 나에게 하지 말라고 하느냐?라고 물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노했던 상황도 이와 비슷합니다.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고 장사를 하는데, 예수님이 무슨 권리로 그들을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20장 2절에 보면 실제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모두 이 장사와 관련된 이들)이 찾아와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 어디에 있을까요?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사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그 뒤에 책망하시는 말씀은 예레미야 7장 11절을 인용하셨는데,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두 말씀 모두 강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 집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쉽게 말하면 “내 명의로 된 내 집”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기 집에 오셨습니다. 성전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성전의 모든 행위의 대상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전을 통해 백성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와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예배자가 예배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세운 일꾼입니다. 그 일꾼들이 집 주인인 하나님의 의도를 왜곡하고 오히려 예배자들을 갈취하다니…집 주인이 화날만하지 않습니까? 화낼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만일 유평교회 건물을 주중에 많이 사용하지 않으니 선교사가 쉬고 공부할 수 있는 장소로 사용하겠다고 결정하여 좋은 의도로 선교사들의 쉼터로 운영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관리하고 한 사람이 선교사들에게 전기세, 수도세 등 각종 이유를 가지고 돈을 뜯어낸다면, 우리가 그것에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건물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분노할 권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모든 만물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특별히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는 곳으로 큰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곳입니다. 그 성전을 맡은 일꾼들이 주인의 뜻을 완전히 왜곡하여 자기 배를 불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것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은 주인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1. 분노의 방법은 합당했는가?

마지막으로 분노의 방법이 합당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분노할 이유가 충분하고, 분노할 권리가 있다 해도, 방법이 과하지 않았는가?입니다.

누가는 장사꾼을 내쫓았다고 요약해서 말했지만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성전에서 이렇게 하신 적이 있는데, 그땐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 소까지 내쫓으셨습니다(요 2:15). 꼭 이렇게 하셔야만 했을까요? 분을 내어도 온유하게 “나가거라”라고 말씀만 하시면 안됐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분노 방식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 우리가 그분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위치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22). 계시록 말씀을 보면 큰 보좌 위에 앉으셔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님이 나옵니다(계 19:11-15).

예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왕으로서 백성을 심판할 권리를 갖습니다. 죽이고 살릴 권한이 그분에게 있습니다. 8명을 남기고 모든 인류를 수장시켜도 그분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을 통치하는 왕, 모든 만물을 자기를 위해 창조한 하나님으로서 그분에게 그럴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를 부당히 여기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제사를 멸시하는 행위는 사형으로 다스렸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여 죽임을 당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전, 성소, 성물을 함부로 보거나 만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로 죽임당한 이들도 있지만, 때로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죄인은 이런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에 따라 공의로 우리를 대하신다면 모두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R. C. 스프로울 이야기)

성전을 더럽히고 악용하는 이들에게 합당한 정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죽이지 않으시고 책망하셨습니다. 처단하지 않으시고 징계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자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히 여기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내쫓은 것도 은혜 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은혜와 자비는 금요일에 십자가에 오르셔서 자기 몸을 죄인을 위해 대신 내어주셨을 때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죄인들, 그리고 다른 모든 죄인들이 합당하게 받아야할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께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의 분노 방식이 너무하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은혜와 자비의 꾸짖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분노를 세 가지 기준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분은 분노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분노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분노하신 방식은 오히려 은혜와 자비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남은 며칠을 날마다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드디어 성전이 강도의 집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기도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다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백성이 예수의 모든 말에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싶을만큼 분노했습니다.

그들에겐 분노할 합당한 이유도, 권리도 없었지만, 가장 부당한 방식으로 그들의 분노를 쏟아낼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불법으로 잡아다 심문하고 죽이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은 논쟁으로 예수님을 책잡기 원했습니다. 그것이 20장에 나오는 논쟁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분노와 예수님의 분노를 비교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합당한 이유도 없이, 권리도 없이, 부당하게 화를 낼때가 많습니다. 원수갚는 것이 나에게 있다고 하셨지만 우리가 그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당당하게 화를 냅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합니다(엡 4:26). 우리의 분노가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고 합당하고 정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성전”이라 부릅니다(고후 6:16,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기 원했는지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를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우리 가운데 내어쫓을 죄가 있지 않은지 생각해봅시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삶이 되야 하는데,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주가 피로 사신 나의 지체를 악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봅시다. 기도하는 삶, 예배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셨는데, 우리는 잘먹고 잘 사는 삶, 이 땅에서 누리는 삶, 세상이 알아주는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지, 그것이 삶의 변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도 예수님은 분노하여 그것을 내쫓으신다는 것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합당한 분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분을 죽기까지 미워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가운데 계신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들께 한 가지 말씀을 드리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그분이 다 받으셨습니다. 그분을 밀어내지 마십시오. 그분께 부당하게 분노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이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만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고, 그렇게 돌이키라고 여러분께 계속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 말씀에 달라붙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믿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