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좋아서 예배합니다

본문: 시편 92편

설교자: 최종혁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장 많이 부딪혔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대제사장 같은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메시아가 오면 가장 먼저 알아보고 사람들을 메시아에게로 인도해야할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가장 적대적이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앞장섰다.

그들과 예수님이 계속 부딪혔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안식일’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아일 수 없다고 주장했고,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심지어 안식일에 아픈 사람의 병을 고치지도 못하게 하는 등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의 과도한 목록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일로서 하나님은 이 날을 일주일의 다른 날과는 구분하여 안식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주셨다. 이 날은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날이고 기쁜 날이 되어야 했다. 그런 날을 종교 지도자들은 가장 힘들고 괴로운 날로 만들었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바로 잡으셔야 했던 것이다.

안식일이 처음부터 그런 날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어야 했던 것도 아니다. 안식일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다.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그들에게 기쁨이 되고 그 기쁨은 자연스럽게 예배로 이어진다. 매일의 순종의 삶이 생생하고 치열한 예배의 현장이라면, 같은 기쁨을 공유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함께 예배하는 공적인 예배는 예배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감사와 기쁨의 예배, 축제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는 좋아서, 기뻐서, 즐거이 하는 일이고, 안식일이 바로 그런 기쁨의 예배의 날임을 오늘 시편이 증명한다. 시편 92편은 유일하게 “안식일”이 표제에 포함된 시편으로서 안식일에 불려졌던 시편이다. 포로기 이후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 예배 에 특정 시편이 할당되어 있었는데, 시편 92편은 토요일 아침, 즉 안식일 아침에 불려졌다. 물론 내용을 보면 안식일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안식일이 어떤 날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서 이 시편이 안식일에 불려졌을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규례는 오늘날 교회에 더 이상의 구속력은 없지만, 예배에 대한 명령은 그렇지 않다. 초기의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에 모여서 함께 예배한 후로 교회는 계속해서 이날을 ‘주일’로 부르며 그날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를 계속해 왔다. 일요일이 예배의 날이 된 것이다. 따라서 시편 92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배의 원리는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 적용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한다. 예배는 의무감 이전에 좋아서 드리는 것이다.

시편 92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좋아서 드리는 예배의 3가지 원리

  1. 예배자는 예배의 가치를 알기에 좋아서 예배한다(1-3절, 찬양).

  2. 예배자는 기쁨의 근원을 알기에 좋아서 예배한다(4-11절, 간증).

  3. 예배자는 은혜의 목적을 알기에 좋아서 예배한다(12-15절, 전도).

 

찬양 – “좋으니이다”(1-3절)

92:1–3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먼저 시편 92편을 읽으면 특이하다고 생각되는게 1-3절이 나누어져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말의 어순과 구성 방식이 히브리어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번역이 된 것 같다. 대부분 이런 찬양과 감사의 시편은 “여호와를 찬양하라”와 같은 명령으로 시작하거나 “감사하리로다”와 같은 개인의 고백으로 시작하는데, 92편은 그런 면에서 독특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그런 명령이나 고백보다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라고 선언한다고 할 수 있다.

92:1-3 [사역] 지존자여, 이것이 좋은 일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2아침에는 주의 인자하심을 밤에는 주의 성실하심을 선포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3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가락에 맞추어 그렇게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좋으니이다”라는 표현이다. 히브리어로는 ‘토브’인데, 상황에 따라서 온갖 좋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다. 시편 147:1에 비슷한 말씀이 있어서 이 맥락에서 ‘토브’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147: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여기서 찬양하는 일과 찬송하는 일은 대조되는 일이 아니라 비슷한 일을 지칭하기 때문에 “선함이여”와 “아름답고 마땅하도다”도 비슷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선함”이 ‘토브’다. ‘아름답다. 기쁘다. 합당하다. 올바르다’는 의미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피조물을 보시며 “좋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그런 의미였다. 단순히 ‘기분 좋네’ 보다는 만드신 것들이 제자리를 잡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대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아름답다. 합당하다.’ 그래서 ‘기쁘다’는 의미로 좋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어지럽혀져 있던 물건들을 정돈하고 나서 ‘좋다’라고 말하는 것도 유사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물건이 있는 위치만 바뀐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그래 원래 이랬어야 해. 이게 맞지’라고 생각하면서 거기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느낀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선포하는 것이 ‘좋다’라고 시편기자가 말하는 것도 그런 의미이다. 그것이 옳은 일이고 따라서 합당한(마땅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름답고 기쁜 일이고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부당한 것이다. 추하고 슬픈 일, 안타까운 일이다. 더 나아가서 악한 일이다.

왜 그럴까? 감사와 찬양, 선포, 한마디로 예배의 대상 때문에 그렇다. 어떤 미술품은 누가 봐도 그 가치를 인정할 만한 예술적 미가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거대한 폭포나 산 같은 것은 굳이 누가 무슨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선포한다. 요즘처럼 별을 제대로 보기 힘든 때에 정말 맑고 깨끗한 밤 하늘에 별들이 쏟아질듯이 가득한 장면을 보면서 ‘별 몇 개 더 있는게 뭐 별거야?’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 몇년간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BTS에 대해서 누군가 진지하게 부정적인 말을 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매장당할 수도 있다. 그만큼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그보다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 없다. 스타(아이돌)를 좋아하고, 그들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지를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모두가 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의 예배의 대상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예로 든 것들은 전우주적으로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 것들은 아니다. BTS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정말 모든 사람이 그들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그들을 칭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대상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도 마찬가지다. 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난 여기보다 저기가 더 좋아”라고 말할 수 있다. 미술 작품, 음악은 말할 것도 없다.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가 있을 수 있다.

모두가 다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반응할 수 있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참된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이 고백들은 다윗의 고백이지만 다윗만의 고백은 아니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얻고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했고(빌 3:8)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은 차라리 이 땅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고백했다(고후 5:8). 계시록을 보면 하늘에서도 이런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끊임없이 성도들과 천사들을 통해 드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들은 당연한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하고 싶어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구원하신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치, 하나님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알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 당연한 일, 자연스러운 일, 좋은 일인 것이다.

그래서 시편 92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지존자’로 부른다. 지난 시간에 봤던 것처럼 하나님의 높으심,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하나님이 피조물과는 다른 높은 분이시기에 다른 어떤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속성)을 찬양하는 것이 좋은 일인 것이다. 게다가 그 하나님은 스스로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인자하고 성실하신 하나님, 즉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찾아와 사랑을 맹세하시고 사랑을 영원히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내가 만든 신과 나를 만든 신, 누구를 예배하는 것이 맞을까? 당연히 나를 만든 신이다. 내가 만든 신을 예배하는 것은 취향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다.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고, 이성과 어리석음의 문제다. 하나님의 가치를 안다면, 예배의 가치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예배의 가치를 안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좋아서 예배하게 된다. 스타를 좋아하는 팬들이 자신들이 인정하는 스타의 가치 때문에 그들을 위한 모든 일들을 가치있게 여기고 따라서 기꺼이 그런 일들을 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치다. 남들은 어떻게 그렇게 수고스러운 일을 하느냐고 묻지만 정작 본인들은 전혀 수고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아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배가 만약 이렇지 않다면 이유는 하나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좋다고 선포한다. 아침마다, 밤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선포한다. 하루 종일, 그리고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예배에는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이 함께 한다. 모두 현악기들이다. 이런 악기들을 동원해서 즐겁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다. 잘 알려진 종교 개혁자 칼빈은 예배에 악기 사용을 금하면서, 악기는 미숙한 단계의 예배였던 구약에서만 허용되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시록에 기록된 하늘의 예배에서도 이런 악기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계 5:8; 15:2).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재능을 주셨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신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음악이고 악기이기에 예배에 도움이 된다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악기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하나님께는 이런 예배가 어울린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하기에 우리가 이런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좋아서 즐겁게 드리는 예배다. 때로 우리는 좋아하지도 않는 가수의 콘서트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사람처럼 예배드릴 때가 있다. 당연히 그런 예배시간은 지루하고 힘들기만 하다. 내가 왜 여기있지하는 생각만 든다. 끝나는 시간만 기다린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 그런 예배가 어울리냐다. 하나님이 그 정도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냐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예배가 달라져야 한다. 여러 노력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을 더 알고 사랑하게 된다면, 다윗이나 바울처럼 그 아름다움을 더 사모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좋아서 하는 예배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렇게 예배의 자리로 나아올 때, 우리가 함께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좋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간증 – “기쁘게 하셨으니”(4-11절)

4-11절에서 두드러지는 단어는 “나(1인칭 단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개인의 ‘간증’이라고 할 수 있고, 이 간증을 통해 우리는 “예배자는 기쁨의 근원을 알기에 좋아서 예배한다”라는 예배의 또 다른 원리를 배울 수 있다. 1-3절에서는 좋아서 드리는 예배의 이유를 하나님 측면에서 찾아 봤다면 4-11절에서는 우리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핵심은 4절에 있다.

92:4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우리말 번역에서 순서가 달라지긴 했지만, 지난 주일에 배웠던 ‘샌드위치 구조’ 형식의 문장이다(대차 대구법, 키아스틱 구조). 따라서 강조되는 것은 중간에 있는 “주께서 행하신 일”, “주의 손으로 행하신 일”이다. 예배자는 기뻐서 높이 외치리라라고 말하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기쁘고, 그렇기 때문에 기쁨으로 예배할 것이라는 고백이다. 그냥 기분이 좋아서 오늘은 즐겁게 예배할게요가 아닌 것이다. 그 기쁨의 이유,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즐거이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편 기자는 이 일이 정확히 어떤 일인지 아직 밝히지 않는다. 아직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할 말이 남아있다.

92:5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이는 감탄이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그 일이 위대하신지, 또한 그 일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결과에 있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얼마나 치밀한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 모두를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하나님의 생각이 너무 깊었고 그 하신 일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때로는 화려한 수식어보다 그저 진실된 말 한마디가 의미를 더 정확하게 전달할 때가 있는데, 바로 5절이 그렇다. 크신 하나님 앞에 선 조그마한 인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한마디의 말과 같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정말 큽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정말 깊으십니다.

어쩌면 바로 이 직전까지 그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7절이 간접적으로 그가 겪은 상황을 묘사한다.

92:7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이 표현은 73편에서 아삽이 사용했던 표현을 떠오르게 한다. 어쩌면 이 시편기자도 악인이 풀 같이 무성히 자라고 흥왕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삽처럼 거의 넘어질뻔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악인들을 무너뜨리시고 영원히 패할 것 같은 자신에게는 은혜를 베푸셔서 승리하는 일을 그가 경험하게 된다.

92:9–11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10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11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10절에서 뿔은 ‘승리’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신선한 기름은 그 기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흥왕하던 하나님의 원수들은 패망하고 흩어졌지만, 하나님의 편에 있던 자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베풀어 주셨다. 시편기자는 이 공의의 현장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고 말한다. 아주 구체적인 상황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런 승리를 직접 경험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았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전쟁의 상황이었다면 실제로 전쟁을 한 것은 자신과 군사들일 것이다. 실제 전쟁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음모로 인한 어려움이었다면 이렇게 상황이 역전된 것은 자신이나 혹은 다른 누군가의 뛰어난 지략 덕분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그 깊으신 생각과 크신 능력으로 이루신 일이라고 간증하면서 기쁘게 하나님을 높인다. 그의 짧지만 매우 합당한 기쁨의 고백이 바로 8절이다.

92:8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도저히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 이렇게 바뀐 것은 시편기자가 상상도 못할 노력을 해서도 아니고 그저 상황이 운좋게 잘 맞아떨어져서도 아니다. 이 모든 상황은 만들어진 상황이고, 그렇게 한 분이 바로 영원토록 지존하신 하나님이심을 시편기자는 인정하며 그 하나님을 높이 외친다. 기꺼이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좋아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패망한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 대해서 시편기자는 6절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92:6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어리석은 자”, “무지한 자”는 시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으로 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거절하는 악인을 의미한다. 한 때 흥왕하다가 멸망하게 된 이 사람들은 여전히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뭐를 모른다는 것일까? 하나님이 영원토록 지존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계획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잠시 흥왕하게 하셨고 영원히 멸망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이 잘해서 잘 됐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운이 나빠서 망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깨닫지 못한다.

여기 ‘어리석은 자’는 문자적으로는 ‘짐승같은 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단어다. 한 주석가는 이 표현을 두고 많은 동물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다. 동물도 이런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보다 지혜롭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성이 없는 동물들은 최소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기가 했다며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람만큼 어이없는 피조물도 없다. 타락한 천사는 최소한 알면서 하나님을 대적한다.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신을 높인다. 인류의 발전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가장 쉽고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다. 바로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모르고 있다. 정확히 말하고 애써 부인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예배자와 하나님을 부정하는 우상숭배자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것 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심을 인정하고 그것을 보고 듣고 있느냐다.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하나님의 깊으신 생각이 있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이 있음을 믿느냐가 가장 큰 차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예배자가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행사에 별로 혹은 아무 관심이 없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저 자기가 어떤 일을 잘 했고 또 어쩌다보니 상황이 좋지 않아 일이 나쁘게 되었다고만 생각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 당연히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는다. 잘되면 내 덕이고 안되면 상황 탓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배는 무미건조할 수 밖에 없다. 죽어 있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성경이라는 글로만 살아계시고 내 삶에서는 죽어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배당에 예배 받는 자리에 앉아 계시지 하늘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지 않기 때문이다.

좋아서 예배하려면 내 삶의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주일에 교회에 오기 전 아침이든 혹은 전날 밤이든, 한 주를 돌아보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나는 어떤 간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지 생각해 보라. 우리 각자가 그렇게 내 삶의 제물을 가지고 기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가 드리는 노래는 새노래가 될 것이고 우리의 예배가 정말 살아있는 예배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시편 92편을 통해 예배에 대한 두 개의 원리를 배웠다.

  1. 예배자는 예배의 가치를 알기에 좋아서 예배한다(1-3절, 찬양).

  2. 예배자는 기쁨의 근원을 알기에 좋아서 예배한다(4-11절, 간증).

이제 마지막 세번째 원리다.

  3. 예배자는 은혜의 목적을 알기에 좋아서 예배한다(12-15절, 전도)

전도 – “선포되리로다”(12-15절)

92편의 마지막 4구절에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복을 주신다는 약속을 시편 1편과 비슷한 이미지를 통해서 기록한다. 그렇게 하여 풍성한 삶의 약속은 악인이 아니라 의인에게 주어졌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나무’가 비유로 사용되었는데, 표현을 보면 그 나무가 번성, 성장, 결실, 풍족, 청청(푸름)할 것을 말한다. 정말로 생명력과 활력이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92:12–14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13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14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악인의 경우는 풀에 비유되었지만 의인은 나무에 비유되었다. 풀은 금방 자라지만 또 금방 시든다. 하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다. 특히 여기서는 종려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이 언급되어 있다. 종려나무는 생명력이 강한 나무로서 사막성 기후에서도 잘 자라며 달콤한 열매로 유익을 끼치는 나무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성경에서 종종 좋은 건축재료로 언급되는데 키가 40미터까지 자라는 크고 튼튼한 나무다.

물론 어디에 심기운 나무인지가 중요하다. 시편 1편에서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였는데, 여기서는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뜰 안에 심긴 나무다. 하나님께서 직접 돌보시는 정원수인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결실하고 진액도 풍복하고 그 빛도 청청(푸름)하다.

나무가 자라는 것이 다양하듯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의인의 삶도 다양한다. 본토 친척을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의 삶이 있다. 여기 약속한 것 같은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빼앗겼던 욥의 삶도 있다. 나름 평탄했던 이삭의 삶도 있고 본인이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했던 야곱의 삶도 있다. 형들에게 팔렸다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삶도 있다. 나이 80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했던 모세의 삶도 있다. 다윗의 삶, 사무엘의 삶, 다니엘의 삶, 모두 다 다른 삶을 살았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돌보셨고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이다. 모두 다른 삶을 살았지만 아마 15절의 고백은 모두 동일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92:15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하나님의 정직하심, 하나님의 바위 되심(보호하심), 하나님께 불의가 없으심이 어떻게 선포된다는 것인가? 바로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그들의 삶을 통해 선포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를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알고 기뻐하여 1-3절과 같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그분의 인자와 성실을 알리게 하는 것, 곧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 은혜의 목적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선포’라는 개념이다. 2절에서도 동일한 개념이 나왔었다. 우리가 좋아서 하는 예배는 우리끼리만 좋아서 하는 예배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가장 좋은 전도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예배를 대하는 태도와 모습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예배의 자리에 함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그 기쁨을 나누는 모습을 통해 그 기쁨으로 그들을 초대할 수 있는 것이다.

전도 집회가 그런 시간이 될 수도 있겠고, 간접적으로 예배를 준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세상의 친구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대상은 우리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매주 예배 시간을 통해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하고 있다. 그분이 주시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있다. 우리가 예배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듣는다.

예배 시간을 소중히 하고, 기쁨으로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고 순종한다면, 자녀들은 그런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반대로 예배 시간에 계속해서 늦거나, 진행되는 예배에 집중하지 않고 졸거나 다른 일을 하고, 말씀은 듣는 둥 마는 중 한다면, 자녀들은 그런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선포’이기 때문이다.

좋아서 하는 예배는 훌륭한 전도가 된다. 하지만 싫어서 억지로 겨우 하는 예배는 전도의 치명적인 장애물이 된다. 우리 각자가 은혜의 목적을 알아 좋아서 예배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을 다음 세대에게 또한 세상 가운데 바르게 선포할 수 있다.

도전

당신에게 주일은 어떤 날인가? 좋아서 예배하는 날인가, 아니면 쉬고 싶은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날인가. 주일에 많은 사역으로 인해서 어쩌면 힘이 들 수도 있지만, 제사장으로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예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으로 인한 예배의 가치를 알고,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목적을 알아 우리 모두가 좋아서 함께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감사와 찬양, 그리고 선포를 통해 지존하신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이 이 땅 가운데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