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자들이 하나도 깨닫지 못한 말씀
본문: 누가복음 18장 31~34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 설교 제목은 특이합니다. “제자들이 하나도 깨닫지 못한 말씀” 그 말씀이 무엇일까요? 바로 32-33절의 말씀입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32-33절)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주 자기를 가리켜 “인자”라고 칭하셨기 때문에(누가복음에서만 26번) 제자들은 다른 누군가를 떠올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내가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인데 ①고난 받고, ②죽임 당하고, ③부활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까?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오묘한 신비인가요? 양면의 진리처럼 논리적으로 모순 같아 보이는 교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일 학생도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매 주일 우리가 떡과 잔을 가지고 기념하는 내용 아닙니까? “이 떡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찢기신 몸을, 이 잔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흘리신 피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특별히 선출한 열두 명의 제자들, 삼 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받아온 그들은 왜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을까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너무 빨리 순식간에 딱 한 번만 말씀하셔서 잘 듣지 못했고,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일까요? 아무리 쉬운 내용도 여러 번 들어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처음으로 죽음을 예고하신 것일까요?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만 예수님은 네 번이나 자기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눅 9:22; 9:44-5; 17:25)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9:22)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9:44)

그뿐 아닙니다. 인자의 날을 가르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17:25)

이 외에도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것이다”(5:35), “나는 받을 세례가 있다”(12:50),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13:33).

이런 암시를 합치면, 7번이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의 죽음을 확실하게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못 들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처음 들어서 알아듣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확실히 들었고 또 그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 묻기를 두려워했습니다(9:45).

그렇다면 제자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새로운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너무 놀라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그들이 항상 읽고 믿었던 하나님의 말씀, 구약성경에는 메시아의 고난이나 죽음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데,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이 ‘내가 곧 죽고 부활할 것이라’고 하시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과 부활이 선지자들이 기록한 것, 즉 구약성경에 이미 기록된 내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31절)

구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예언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승천하실 기약(때를 정한 약속)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제자들과 지금 이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눅 9:51). 가는 길에 많은 제자 가운데 열두 제자만 따로 불러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20:17).

‘얘들아, 우리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지? 거기서 내가 당할 일을 알려주겠다(막 10:32-3), 나는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이고 고난당하고 죽을 것이며 부활할 것인데, 그것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이미 오래전에 예언한 내용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은 갑자기 튀어나온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서, 돌아가는 상황이 넉넉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래전부터(창세 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일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바르게 읽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읽었던 구약성경에 정말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베뢰아 사람처럼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해봅시다(행 17:11).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예수님은 이방인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 침 뱉음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 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고난은 4가지 수동태로 기록되었는데 모두 외부로부터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당함”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이방인에게 넘겨짐을 당함, 희롱 당함, 능욕 당함, 침 뱉음을 당함). 이것은 그리스도가 당하실 희롱, 조롱, 능욕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능욕과 조롱, 특히 침 뱉음과 채찍질처럼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구약성경이 말하고 있을까요? 시편 22편에 메시아가 받을 능욕과 조롱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 22:6-8)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가 받을 침 뱉음과 채찍질을 기록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특히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자세한 예언이 담겨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고(3), 사람들에게 버림 받으며(3), 찔리고(5), 상하고(5), 징계를 받고(5), 채찍에 맞으며(5),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8),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지고(8), 부자의 무덤에 묻히며(9),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으나(12)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해 기도할 것(12) 메시아의 죽음, 그것도 백성의 허물과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받기 위해 죽임 당할 것을 선지자 이사야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최초로 창세기 3장부터 등장합니다. 인류가 뱀으로 인해 죄의 저주 아래 놓였을 때, 장차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5). 그러나 동시에 그는 발꿈치의 상함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도 메시아의 고난에 관한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성경은 일관성 있게 메시아가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님은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이 메시아의 부활을 예언하고 있을까요? 시편 16편 1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8~10절)

바울은 이 시편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기록한 예언대로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합니다(행 13:33-34).

이처럼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구약 선지자들을 감동하여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을 담당하실 계획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이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어떤 사람은 제자들이 미련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어부였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었으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 대부분이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시에 아주 유명한 학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쓴 베드로전후서는 그가 미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도 남습니다. 특히 베드로전서는 너무 훌륭한 문장으로 기록되어 지금도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쓴 것이 맞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입니다. 그만큼 베드로는 뛰어난 실력을 갖췄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인 교육을 생각해보면, 제자들은 적어도 구약성경 전체를 이해하고 심지어 많은 부분을 암기할 정도로 구약성경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34절)

그들이 깨닫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가 그들에게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감취었다”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도록 감추셨다’는 말이고(눅 9:45),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선입견과 기대가 너무 강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가 감취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두 가지 해석 모두 합당하다고 생각하지만 두 번째가 여기서 조금 더 강조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 마음에 밝히 조명해주셔야만 우리는 그 말씀의 참 의미를 이해합니다.

영적으로 죽어서 진리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십니다(고후 4:6). 그 때야 비로소 그는 영광의 주를 보게 됩니다. 그 비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 관리에게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눅 18:27)고 하시고, 오늘 이 대화 이후에 여리고 가까이에서 만난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만지셔야만 보게 됩니다.

동시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제자들 측면에서 바라볼 때,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극적으로 귀환하여 자기 민족을 이루며 살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리스와 로마에게 차례로 점령되어 오랜 식민지 생활을 했습니다(약 600년). 그 안에서 회당이 발전하고 거기서 구약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것으로 민족주의가 강력하게 생성되었는데, 이를 통해 기대된 메시아는 국가를 이방인들로부터 보호하고 적국을 심판할 강력한 국가적,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 메시아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런 군사적 지도자로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타락한 종교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는 더러운 이방인들을 모두 제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반겼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전에서 상행했던 부조리한 일을 꾸짖고 채찍으로 그들을 책망하실 때 제자들이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는데, 이는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그의 삶을 본받자’가 아니라 ‘전쟁을 지휘할 대장을 따라 싸우러 가자’는 단호한 결의였습니다(요 11:16).

나중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이 그대로 일어났을 때,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그때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오늘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5-6)

예루살렘에 열한 제자와 다른 무리가 모여 있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나타나 서서 못 박힌 자기 손과 발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7)

이것이 메시아가 하실 일이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와 시편을 통해 예언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 뜻대로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제 삼일에 살아나셨으며, 이로 인해 예수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듣고 보기 원합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대럴 벅은 이 본문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갖고 있는 기대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는데 느려터진 존재들인가를 보여준다’(대럴 벅, NIVAC, 629)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각각 예수님께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를 쉽게 떠났습니다.

먹는 것을 주는 예수, 평안을 주는 예수, 지위와 권력을 주는 예수,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예수, 병을 고치는 예수, 기적과 놀라운 일을 행하는 예수, 날카롭고 카리스마 넘치는 가르침을 주는 예수,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예수, 권세 있는 자들을 호되게 꾸짖는 예수… 그들은 그런 예수에게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죄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예수는 생각지도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으며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 통치자에게서 자기를 구원해줄 것을 기대했는데, 이방인에게 넘겨지는 메시아, 유대인을 구속하고 괴롭힌 이방인을 실컷 모욕하고 조롱할 왕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조롱과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받는 메시아,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이를 모두 죽일 장군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그들의 손에 죽임당하는 메시아…

그런 메시아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미련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고,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부끄럽고 하찮은 존재로 여겨진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그토록 받아들이기 힘든 그리고 부끄럽고 미련하게 여긴 그 십자가가 사실은 그들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영원히 해방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18).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기대를 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까?

마음의 위로를 얻기 원하십니까? 삶에 어려움을 제거하고 좋은 일을 가져다줄 것을 기대하십니까?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좋은 내세를 보장받고 싶으십니까? 좋은 가르침과 아름다운 섬김을 받고 싶으십니까?

이런 모든 기대는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언제든 예수를 떠나게 만듭니다. 이보다 더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기대는 예수께서 하나님이 창세전에 세우신 계획대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진정한 위로가 옵니다. 거기서 삶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소망이 주어집니다. 바로 거기서 이 땅뿐만 아니라 내세에 받을 영생의 기쁨이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셨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기록을 멈추었지만, 마태와 마가는 그 다음에 제자들이 한 행동을 기록했습니다(마 20:20-28; 막 10:35-45).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고난 받고 죽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의 반응은 정말 황당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 어머니를 동원하여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 원하느냐고 주님이 말씀하시자 그들이 구합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옆에서 어머니도 말합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지금 예루살렘에 가서 이룩할 당신의 나라에서 한 자리 차지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무엇 때문에 가는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나머지 열 제자가 듣고 두 형제에 대해 분히 여깁니다. 자기들이 차지할 자리를 먼저 선점하려고 했으니까요.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때로 우리가 이 제자들과 같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주는 가장 낮고 천한 곳에 오셔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를 내어주고 섬기러 오셨지만, 우리는 주님께 섬김 받고 높임 받고 인정받는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지.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조롱과 모욕과 능욕, 침 뱉음과 채찍으로 맞으심, 죽고 부활하신 그 놀라운 은혜에 겸손한 마음과 섬기는 삶으로 반응하고 있는지,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 하는 것은 주님처럼 섬기는 자로 살게 하소서, 주님처럼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게 해달라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