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자도 0.5: 반쪽짜리 순종
본문: 사사기 1장
설교자: 이병권
오늘 살펴볼 사사기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잘못된 제자도, 절반의 제자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제자도 0.5”입니다. 온전한 제자도가 아닌 부족한 제자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가 그 땅을 분배받은 후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같은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에”라고 시작하는데, 사사기도 동일하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고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 다른 점은 너무도 치명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문제의 핵심이 됩니다. 그것은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가 있었지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 지도자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모든 땅을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자신을 인도해줄 사람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불안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이끌어줄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께 직접 질문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1) 이 말씀에서 “우리 가운데”라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우리를 위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워야 합니까?’
이 말은 단순히 먼저 싸우고 나중에 싸우는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의 부재에서 느끼는 불안감 속에서 누가 우리를 위해 앞서가며 본을 보여줄 것인지, 가 그 역할을 할 것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2) 하나님은 유다에게 그 임무를 맡기십니다. 여기 유다는 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지파를 말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이 모두 그러합니다. 개인이 아니라 그 자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적에도 야곱의 아들 중에서 유다가 리더 역할을 했었는데, 지금도 동일하게 유다 자손에게 그 역할이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지명하시고, 그에게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내가 승리를 보장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전쟁에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합니까?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3) 우리는 여기서 ‘0.5’ 온전하지 못한 제자도, 반쪽짜리 순종을 봅니다. 유다는 말씀대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함께 갑니다.
혹시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으십니까? ‘이게 왜 반쪽짜리 순종이지? 형제가 힘을 합쳐서 함께 싸우러 나가는데 더 좋은 일 아닌가?‘ 유다의 선택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인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온전한 순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지명하셨고 승리를 약속하시며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나아가기보다 현실적인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쓴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협력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는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그 일을 맡기셨고 할 수 있는 자원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두에 서있는 유다는 온전한 순종보다 상식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상식으로 따지면, 양을 잡아서 자기 문에 피를 바르는 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성을 함락하기 위해서 성 주변을 도는 것이 상식적인 일입니까? 바다가 열리고, 강이 갈라져서 마른 땅으로 건너는 일이 상식으로 따질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의 상식으로 따지면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선입견을 가지고 상식으로 판단하면,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기보다 내 생각대로 적당히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식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상식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합니다.
한편으로 저는 유다를 이해합니다. 저도 같은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다른 교회로부터 말씀 부탁을 받으면 두려워서 그냥 거절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서 고민합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왜 두려워하는 걸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면 하나님이 이길 힘도 주시고 감당하게 하실 텐데 무엇이 두려운 걸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으로 반쪽짜리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온전한 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겁니다.
유다는 시므온과 함께 싸우러 올라갑니다. 유다의 반쪽짜리 순종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주실까요? 이어지는 본문은 유다가 치른 전쟁과 그 결과를 보고합니다.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4) 비록 유다가 반쪽짜리 순종을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유다에게 큰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승리한 유다는 그곳의 왕인 아도니 베섹을 잡아서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그가 행한 악을 그대로 갚아줍니다. 그래서 아도니 베섹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7)
아도니 베섹은 비참한 최후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행한 대로 갚으셨고 그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두 번째 반쪽짜리 순종을 봅니다. 아도니 베섹은 자신이 당한 일이 하나님의 갚으심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다가 한 일이 정당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는 왜 왕을 포로로 잡아서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랐을까요? 하나님이 그것을 명령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유다는 지금 가나안 족속이 하는 일을 따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새 가나안의 영향을 받아서 그들을 흉내 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타락과 그 땅에 가득한 죄악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허락하심과 동시에 가나안의 악을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계속하셨던 명령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을 모두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왕을 사로잡았고 가나안이 하는 일을 따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인식하든지 인식하지 못하든지 관계없이 이렇게 조금씩 가나안의 생활방식, 가나안의 죄악이 이스라엘에게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조금씩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반쪽짜리 순종을 낳은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알게 모르게 내 삶에 들어와 있는 세상의 가치들, 세속적인 것들,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것들, 때로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것이 좋은 줄 알고 따라 합니다.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세상이 매겨놓은 가치 기준에 따라 나도 똑같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나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조금 더 가지기 위해 삶의 우선순위가 무너집니다. 이 땅에서 조금 더 안락하게 살기 위해서 더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합니다. 남들처럼 사느라,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느라, 남들 흉내 내느라 내 인생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놓치고 정신없이 사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아이들이 정말 잘합니다. 그냥 친구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고,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따라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아이들이 따라하는 많은 것들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쁜 것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얼마나 잘 배우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아이들에게 그것이 왜 나쁜지, 왜 잘못된 것인지 알려주고 바른 것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 그럴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을 따라하며 주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고,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 수 없고, 책은 살 수 있지만 지혜는 살 수 없고, 쾌락은 살 수 있지만 행복은 살 수 없고, 동료는 살 수 있지만 친구는 살 수 없고, 안락한 삶은 살 수 있지만 영원한 삶은 살 수 없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가지려고 합니까? 무엇을 추구하고 계십니까? 세상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입니까? 아니면 돈으로 살 수 없는 성경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혹시 돈을 위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가지려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더 중요한 것을 내팽개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 세상의 가치를 집어넣으면 온전한 순종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세상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그것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님 말씀을 기쁨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문화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거짓 속삭임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속아 넘어가서 반쪽짜리 순종을 하고 있진 않으십니까?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쪽이라도 하는 게 어디야? 아예 안하는 것 보다는 낫잖아!’ 반쪽짜리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반쪽짜리는 점점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불순종으로 끝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틈을 보이지 마십시오. 틈을 보이면 불순종의 유혹 앞에 우리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유다는 반쪽짜리 순종을 하지만 승리합니다. 또 승리합니다. 여러 지역을 정복하고 가나안 족속을 쫓아냅니다. 별문제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반쪽짜리 순종은 결국 그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19)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승승장구했습니다. 문제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아니라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골짜기 주민들은 쫓아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철 병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승리는 여기서 멈춥니다. 불순종으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정복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멈춥니다. 더 싸울 수 있는데 더 할 수 있는데 더 뛸 수 있는데 더 헌신할 수 있는데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데 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수준을 낮추고 안주하는 겁니다. 불편하니까 수고스러우니까 힘이 드니까 주저앉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핑계될지 모릅니다. ‘재들에게는 철병거가 있잖아요!’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저들에게는 철병거가 있지만, 너에게는 내가 있지 않느냐?
갈수록 더 악해지고 더 하나님을 대적하고 더 진리에서 멀어지고 있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살면서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고 세상에서 적당히 즐기면서 주일에는 교회 나와서 적당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으로, 반쪽짜리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반쪽짜리로는 안 됩니다. 반쪽짜리로는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유다처럼 결국 곁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불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는 실패합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은 어떨까요? 유다와 다른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좀 다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어지는 말씀에는 지파들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계속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결같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모두가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들이 정말 못한 걸까요? 쫓아낼 수 없어서, 할 수 없어서 그런 걸까요?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2:2)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순종을 안 합니다. 할 수 있는데 안하기로 선택합니다. 그냥 타협합니다. 그냥 편의를 선택합니다. 그냥 상식대로 행동합니다. 그냥 두려움에 포기합니다. 그냥 넘어가버립니다. 그냥 세상을 따라 삽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순종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사기의 제일 마지막, 사사기의 결론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왕이 없었던 이스라엘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기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욕심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정말 왕이 없었을까요? 사실, 이스라엘에는 그 어떤 나라도 가질 수 없는 왕, 모든 왕들의 왕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왕을 왕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왕이 없는 이스라엘은 결국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가 왕이 되어서 점점 더 타락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사사기 말씀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는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합니다. 내가 왕이 되어서, 내가 주인 되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욕심대로 세상의 헛된 것을 좇는 삶, 그런 삶의 끝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가 그와 같은 길을 가야할까요? 반쪽짜리 순종을 버리고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의 안락과 편함과 안전과 유익과 즐거움을 조금만 뒤로 미룰 수 있지 않습니까? 정말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조금 더 참을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갈수록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순종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 유혹에 대해서 우리는 처음부터 불순종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대놓고 불순종할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처음은 반쪽짜리 순종으로, 적당한 순종으로, 손해 보지 않는 순종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계속 노출되다 보니 점점 다른 길로 빠지게 되는 겁니다. 뭔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다시 돌이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타성에 젖어서 그 수준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수많은 이유와 그럴듯한 변명으로 나의 삶을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시금 생각해보십시오.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엄마, 엄마는 무엇을 위해 살아요?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주겠습니까? 혹은 자녀가 ‘아빠, 아빠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면 좋겠어요?’ 묻는다면 뭐라고 말해주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고, 주님을 따르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자녀가 그 대답을 듣고 아빠를 보면서 ‘아! 그렇구나! 나도 아빠처럼 그렇게 살아야겠다!’ 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아빠는 말만 그렇게 하는구나!’ 라고 생각할까요?
내가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는 내 입술이 아니라 내 삶이 말해줍니다. 입술로는 주님이라고 말하고 정답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물질적인 풍요와 눈에 보이는 만족이라면, 주님을 위한 수고와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은 어리석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릅니다. 나라는 우상에게 넘어가지 마십시오. 비록 내가 힘들고 수고스러울 수 있지만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반쪽짜리로 안 됩니다. 불편하더라도, 두려움이 있더라도 멈추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라 가지 말고 말씀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순종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 사람의 고백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주님을 위해 수고했던,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유석경 자매의 고백입니다. 원인모를 두통으로 병원을 찾은 그녀는 이 땅에서 자신의 삶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선택합니다. 남은 삶을 병원에서 보내기보다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로 선택합니다. 그래서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며 안타까워하며 질문합니다. ‘괜찮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냐고’ 그런 질문에 대해서 자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을 신뢰할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하시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나의 주인 되시는 그분을 신뢰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그분을 신뢰함으로 온전한 순종을 선택할 뿐입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힘든 상황들, 무거운 짐들, 힘겨운 삶의 무게, 우리 주님께서 모두 아십니다. 그러니 그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십시오.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했던 자매의 고백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쁘고,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하고,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합니다.“ 이 고백이 매일의 삶에서 순종을 선택하는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