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사.랑.하.라

본문 : 마가복음 12장 28~34절

설교자 : 최종혁

거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일반적인 평면거울이 있고 볼록 거울이나 오목 거울도 있다. 오목 거울은 가까이 가면 실제보다 더 크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볼록 거울은 실물보다 작게 보여주는 대신 더 많은 부분을 보여준다. 관광지 같은 곳에 가면 재미 삼아 날씬해 보이는 거울과 뚱뚱해 보이는 거울을 설치해 둔 곳도 있다. 특히 옷 가게 등에 설치된 전신 거울은 더 날씬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노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내 모습을 그대로 보고 싶으면 깨끗한 평면거울이 필요하다. 다른 거울을 써서 얼굴이 더 작아 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그래봐야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찍는 셀카도 그렇다. 필터를 쓰고 보정을 해서 더 예쁘고 귀엽고 멋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의 나는 아니다. 나를 제대로 보고 싶으면 필터 없이 찍어 봐야 한다. 나를 제대로 보려면 제대로 된 거울이 필요하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궁극적인 거울이다. 이 거울은 우리를 가감 없이 비춰준다. 그래서 이 거울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좀 예쁘게 보여주는 거울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정직한 거울이 필요하다. 그래야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예쁘게 보여주는 거울은 기분은 좋게 해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울을 보자.

본문 (막 12:28-34)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이 본문은 한 서기관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가 주를 이룬다. 서기관이 묻고 예수님이 답하고, 그 예수님의 답에 서기관이 응답하고 마지막으로 그 서기관의 말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서기관의 질문은 적절한 질문이었고 예수님의 답은 유일한 정답이었다. 그에 대한 서기관의 응답은 정직했으며 그 서기관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도 정직했다. 말씀을 살펴보자.

1. 적절한 질문(28)

예수님은 성전에 계셨고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계셨다. 그런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은 차례로 예수님을 찾아와 논쟁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뽑힌 사람이 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질문을 했고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는 지혜로운 답을 하셨다.

이어서 사두개인들이 찾아와서 부활에 대해서 물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부활이 있다면, 대를 잇기 위해서 여러 사람과 결혼한 적이 있는 여자는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부활 때에는 아무도 부부 관계에 있지 않으니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음을 그들에게 가르치신다.

이들이 던진 질문이 전혀 의미 없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좀 아쉬운 면은 있다. 만약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만나서 단 하나의 질문을 할 수 있다면 어떤 질문을 하겠는가? 아침에 식사는 하셨는지, 과일은 뭐를 좋아하시는지를 묻겠는가? 그것보다는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질문을 할 것이다. 이 사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얻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다음에 등장하는 서기관은 훨씬 더 중요하고 적절한 질문을 한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28)

서기관은 율법을 연구하는 자들로서 오늘날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서기관은 바리새인이고 그들 중의 대표로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 앞에 나왔다(마 22:34-35). 하지만 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서기관은 단지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예수님께 나온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가서 질문하기를 자원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그는 율법의 전문가로서 그는 율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한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어떤 계명을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에 주셨냐고 물은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는 의미다.

그들의 셈을 따르면 율법에는 613개(십계명의 글자수)의 계명이 있고 그 중 365개(1년)가 부정형이고 248개(인간 몸을 구성하는 각 부분 개수)가 긍정형의 명령이다. 특히 그들은 무거운 계명과 가벼운 계명을 구분했다. 그리고 그 중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토론하곤 했다.

예수님도 율법의 계명 중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들을 하셨다. – “누구든지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막 5:1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 23:23).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동일하시기에 율법의 하나를 어기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서기관들이 이 질문을 선택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지 모른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계명을 고르면 그럼 이거는 어겨도 괜찮다는 거냐는 식으로 반문을 하려고 생각했을 수 있는 것이다. 혹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연히 자신들이 그동안 전해 온 율법과는 다른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흠을 잡으려고 했을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 서기관을 통해 가장 적절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예수님께 던졌을 것이다. 이 질문은 또한 다른 측면에서도 매우 적절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가장 원하시는지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많은 말씀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지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렇다. 천지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모든 사람이 반드시 따라야할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인가? 누구에게 그것을 묻겠는가!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누구의 답이 맞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가장 정확한 답은 하나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서기관은 지금 바로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 서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필요하고 가장 적절한 질문이다. 답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 이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유일한 정답(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29~30)

예수님은 주저함 없이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신중하게 고른 함정 질문이었겠지만, 모든 지혜의 예수님 입장에서는 어려울 것 없는 질문이다. 예수님은 ‘쉐마’라고 불리는 신명기 6장 4~5절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셨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더 이상 친숙한 말씀이 없을 정도로 친숙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아침, 저녁의 예배 때마다 암송하여 반복해서 드리는 신앙 고백의 일부였고, 그들의 팔과 이마에 차는 경문이라 불리는 상자에 넣는 말씀 중 하나로서 그들의 신앙을 대변했다. 이 친숙한 말씀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계명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계명의 핵심은 ‘사랑하라’다.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사랑의 대상을 아끼고 귀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사랑이고 그에 합당한 태도와 행동을 하는 것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예) 애장품, 애견(반려견), 애인 등

이런 사랑에는 어떤 식으로든 어느 정도의 헌신과 희생이 동반된다. 나의 시간, 물질, 에너지, 감정을 소비한다. 어떤 경우는 그 자체가 ‘사랑스러워서’ 그렇게 한다. 특히 물건 같은 경우 내가 좋아할 만한 부분이 있어야 우리는 그 물건을 애장한다. 어떤 경우는 그런 것과 관계없이 호의를 베풀고 귀하게 대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랑에서 진실성을 느낀다. 특히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그렇다. 그래서 사랑은 대상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그 구체적인 의미와 표현 방식이 달라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가장 중요한 계명, ‘사랑하라’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이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사랑은 크게 두 개의 특징을 가진다. 이 사랑은 배타적인 사랑이고 또한 이 사랑은 전적인 사랑이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배타적인 사랑이다. 즉, 다른 무엇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이 사랑에는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를 사랑하지만, 내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지는 않는다. 부부 간의 사랑은 배타적인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계명이다.

이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인한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고 너의 하나님이시다. 여기 라고 번역된 부분은 본래 “여호와”로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과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셨다. 구약 성경에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와 유사한 표현이 20번 이상 기록되어 있다. 배타적인 관계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대해서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라고 고백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의미도 될 수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우리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모세가 이 말을 할 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신이 있다고 믿는 문화 속에서 오랫동안 많은 영향을 받아 온 상태였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것은 크게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많은 신을 알고 있고 또한 섬기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또 다른 신 하나를 더 섬기는 정도의 일이다. 모세를 이은 다음 지도자 여호수아도 고별 설교에서 다른 신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신신당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함께 섬겼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신과 함께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만이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도 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을 거절하진 않지만, 다른 많은 신중에 하나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욕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시다. 온 피조물의 유일한 창조주시고 유일한 왕이시고 유일한 구원자시고 유일한 아버지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길 명하신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배타적이다.

두번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특징은 전적인 사랑이라는 점이다. 사실 앞의 특징과도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는데 부분적으로만 사랑할 수는 없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30)

마음, 목숨, 뜻, 힘이 사랑의 근원이다. 이 단어들은 각각 더 강조하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의미상 겹치는 부분들도 많다.

  • 마음 – 우리 생각, 판단, 결정의 중심
  • 목숨 – 혼, 사람의 내면 자체, 감정의 중심
  • 뜻 – 의지의 중심
  • 힘 – 능력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다”에 있지, “마음, 목숨, 뜻, 힘”의 구분에 있지 않다. 강조는 ‘다’, 즉 ‘모두’에 있다.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 능력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나와야 한다. 단지 지식적인 사랑, 단지 감정적인 사랑, 단지 의지적인 사랑, 혹은 단지 겉으로만 보이는 사랑은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감정과는 무관하고 의지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즉,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자는 의지적으로 순종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반대로 다른 것을 배제하고 감정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올바른 것은 아니다. 즉,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내가 뭘 하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식이 없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다. 속으로만 하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다. 우리 가진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드러나야 한다. 우리의 모든 것에서 사랑이 흘러 나와야 한다.

우리 모든 것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흘러나와야 한다. 생각의 일부, 감정의 일부, 의지의 일부, 능력의 일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 가장 큰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생각, 감정, 의지, 능력의 전부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흘러 나와야 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하나님 사랑한 것 같고, 이제 다른 것을 좀 즐기자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창조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 가장 원하시는 것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다. 지금 시점에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반응은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일단 다음 말씀으로 넘어가자.

예수님은 여기서 말씀을 끝내실 수도 있었는데, 거기에 덧붙여서 “둘째”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둘을 합하여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 둘째 계명은 이것이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31)

둘째 계명도 마찬가지로 사랑하라가 핵심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상이 다르다. 하나님이 아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가장 유사한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이다.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여기서의 이웃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율법에서도 그렇게 제한되지 않는다.

19:33-34 [33]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그들 중에 거하는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자기 같이 사랑하라”고 동일하게 명령한다. 특별히 이 ‘이웃’의 개념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다. 누구든 하나님께서 내 곁에 둔 그 사람이 내 이웃이다. 따라서 이 둘째 명령은 단지 옆 집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내 곁의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고 하신다.

네 자신과 같이

이 말씀 때문에 자기를 먼저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의도는 전혀 없다.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다. 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해보라. 먹이고 입히고 제우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으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해주려고 한다. 뭐든 이해하려고 한다. 객관적으로 봐서 잘못한 일이 있어도 그래도 이해하고 보듬어 준다. 그럴만한 이유를 집요할 정도로 찾아낸다. 다른 사람의 비난과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 가끔 자신에게 혹독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다. 자기가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사랑한다. 그런 사랑의 대상에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두라는 것이 둘째 계명이다. 예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6: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네 자신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방법이 어렵지는 않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렇게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하면 된다. 예수님은 가장 확실한 비유로 그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또 보여주셨다.

사마리아인의 비유 – 강도 만나서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지만 한 사마리아인은 가진 것으로 그를 치료해주고 그를 주막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회복할 수 있게 하면서 드는 비용은 자신이 다 감당하겠다고 말한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 강도만난 사람이 만약 ‘나’라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겠는가. 사마리아인은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남에게 그렇게 했다.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이다.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은 이것이다. 우리 모든 것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것들보다”. 예수님은 첫째, 둘째라고 하셨지만 이 둘을 독립적인 것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앞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의 모든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 안에 포함된 사랑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실제로 보이는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난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정리했다.

요일 4:20-22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에 포함된다면, 이웃 사랑은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예수님께서 둘을 함께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와 유사하다. 믿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믿음이 있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행함을 보면 그 믿음이 실제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는 하나님 사랑해’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웃 사랑’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실제인지를 알 수 있다. 이웃만 사랑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 사랑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당시의 유대인들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가장 큰 계명을 암송하고 묵상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두 계명은 사실 한 계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큰 계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그래서 명하시는 계명이다.

3. 정직한 반응(32~34)

A. 서기관의 정직한 반응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32)

처음 예수님께 나올 때 그는 예수님이 잘 대답하신다는 것을 알고 나왔는데, 역시나 그의 생각이 맞았다.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반박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옳다고 한다. 번역하기에 따라서는 “정말 잘 말씀하셨습니다” 혹은 “정말 멋진 대답입니다”라고도 할 수 있다. 단지 지적인 동의가 아닌 것이다. 아마 그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공감이 되었기에 이렇게 반응했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서기관이 예수님께 대해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태도로 말한 부분이다. 34절에서 예수님께서 서기관에게 하신 말씀도 복음서에서 유일한 서기관에 대한 칭찬이다.

사실 이 서기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참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그것이 사실임을 정직하게 인정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지금 그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찾아온 상황이다. 다른 바리새인들과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는 그 상황이었다. 그의 동료들은 예수님이 귀신에 들렸다고 하고(막 3:22), 예수님을 죽이려고 논하고 있었다(막 11:18). 지금 이 상황도 사실 예수님을 시험하고 말로서 책잡으려고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하고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말을 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자신의 말로 바꾸어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32)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33)

하나님이 유일하시기 때문에 그 분을 내 모든 것을 다해서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다른 어떤 의식적인 것, 그것의 절정인 제사보다도 우선이라고 말한다.

번제물은 모두 태워 드리는 제사를 말하고 기타 제물은 그 외에 일부를 태워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이가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돌아가는 제사를 말한다. 따라서 서기관은 당시 모든 형태의 제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정말로 용기 있는 발언이다. 그런 것들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일의 성지인 성전에서 그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서기관은 구약의 이 말씀들이 생각났을 것이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장 많은 책망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종교의 지도자들이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서기관 등이다. 그들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십일조를 덜 하거나, 제사를 빼먹거나, 기도를 게을리 해서가 아니었다. 성경을 잘 안 봐서도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그런 일에 최선을 다했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많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가장 큰 계명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명기 6장의 말씀을 날마다 외웠지만, 그 말씀에 따라 살지 않았다.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를 사랑했다. 사회적 약자인 과부를 돌봐야 할 그들은 오히려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자들이 되었다(막 12:40). 이웃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막는 자들이 되었다(마 23:13). 이웃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행동, 하나님의 명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행동은 그들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들은 예수님은 강하게 책망하시고 경고하셨다.

여기 이 서기관은 그런 면에서 조금은 달라 보인다. 그는 정직하게 그런 외식적인 순종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에서 나오는 순종,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훨씬 중요하다고 고백한다. 어떤 종교적인 행위도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대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도 정직하게 반응하신다.

B. 예수님의 정직한 반응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34)

예수님은 정말로 정직하게 말씀하셨다. 이 서기관의 현재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은 상태였다.

이 말씀은 분명한 칭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경고다. 이 서기관은 여러모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자였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하고 정직한 그의 태도는 그가 하나님 나라에 매우 가까이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그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있었지 그 안에 있지는 않았다는 말도 된다. 그는 지금 아주 가까이 와있다. 하지만 가까운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거기서 멈춘다면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천국 문 앞까지 가서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없다. 아마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임을 알았다면 거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한다. 바로 그 계명에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다. 그리고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그렇게 사랑할 수 없는 가장 큰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이 서기관이 그렇게 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가 그렇게 했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다. 우리는 이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도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아’라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사실 그렇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없다. 평생을 들어 단 한순간도 내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없고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럼, 이 말씀은 우리를 그저 부끄럽게 하고 부담스럽게 하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거울을 보여주고 계시다. 우리 모두 지금 이 거울 앞에 서 있다. 무엇이 보이는가? 거울 자체를 보려고 하지 말라. 거울에 깨진 곳은 없는지 흠은 없는지 더러운 것이 묻지는 않았는지 고민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주신 이 거울은 완벽하다. 가감 없이 우리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 거울이 무엇을 비춰주는지를 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나의 부족함이 보일 것이다. 나의 연약함이 보일 것이다. 죄인인 내가 보일 것이다. 거기서 시작하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더욱 사랑하기 원하는 자들이다. 거울이 우리를 비춰주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 말씀이 우리를 비춘다. 우리의 잘못된 것을 보여준다. 바로 잡으라고 한다.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거울을 보지 않겠는가? 거울을 깨겠는가? 아니면 거울을 보며 나를 바꿔가겠는가? 하나님은 바꿔가라고 하신다. 바꿀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하신다. 그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 더 사랑할 수 있다.

혹, 아직 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이 자리에 있다면 예수님께서 이 서기관에게 하신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것에 동의하면서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는 가지만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최선을 다해서 가까이 가도 결국 들어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하나님의 거울에 나를 비추고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죄인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겸손히 나오라. 그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