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여

본문: 시편 91편

설교자: 최종혁

살면서 믿는 구석,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 ‘구석’, 그 ‘언덕’이 정말 신뢰할 만한지는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가장 최후까지 믿을 수 있는 그것이 사실은 그럴만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허탈감이나 배신감을 넘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6일 모멘트 규모 7.8의 강력한 지진이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했다. 그 후 수천회 이상의 여진이 계속되었고 지금까지 사상자가 17만명 이상이고 그 중 사망자가 5만여명이다. 이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중 ‘르네상스 레지던스’라는 아파트가 있었다. 수 많은 건물 중 이 아파트가 뉴스에 등장한 이유는 알려진 축구 선수인 크리스티안 아츠가 그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결국 그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 비해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축구 선수가 왜 그런 곳에 살고 있었을까? 당연히 그곳이 튀르키예의 최고급 아파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2013년에 지어진 해당 아파트는 ‘천국의 건물’, ‘낙원의 한 조각’으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연히 수영장, 운동장, 카페 등이 잘 구비되어 있었고 지역의 어떤 건물보다 비싼 가격에 그 가격을 감당할 만한 재물을 가진 부유한 자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방진 설계가 잘 되어 있어 안전하다고도 광고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 건물은 무너졌고, 실제로는 값싼 자재들만 사용되었고 당국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눈감아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콘크리트에는 철근도 제대로 들어있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 오히려 그 주변의 건물들은 지진을 잘 견뎠지만, 가장 비싸고 안전하다고 자랑했던 아파트만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지진 전에 해당 아파트에 살았던 한 사람은 사건 후에 “천국이라던 이곳이 지옥이 됐다”고 인터뷰했다.

저 축구 선수만 안타깝거나 어리석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진 피해를 입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집은 믿을 구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비도 잘 막아주고 추위도 잘 막아주었을지 모른다.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규모 7.8 정도의 지진을 이겨낼 수 없었을 뿐이다. 어떤 집은 아예 거짓 정보로 사람들을 속였고, 어떤 집은 속이지는 않았지만 지진을 이겨낼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그들의 믿음은 보상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하고 믿음의 대상이 중요하다. 믿음을 점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대상을 점검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말 믿을 만한 것을 제대로 믿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삶에 있어 중요한 문제일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어디에 살지, 어디에 돈을 맡길지, 어디서 일을 할지 등이 그런 문제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영혼의 문제다. 내 영혼이 어디에서 정말 쉼을 누리고 안전하게 거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내 속사람, 내 마음이 무엇으로 평안한지, 무엇을 의지하고 기대어 사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무너질만한 것이면 그것이 무너질 때 나도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이 무너져도 견뎌낼 수가 있다. 그곳이 최후의 믿는 구석, 비빌 언덕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시편이 바로 그 믿음에 대한 시편이다. 다른 많은 시편처럼 믿음을 고백하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 시편 91편은 믿음을 주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영혼의 믿을 구석, 비빌 언덕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시편 자체의 표현을 따르자면 하나님을 영혼의 피난처와 요새로 삼으라고 말한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라고 말한다.

일차적으로는 믿는 자에게 믿음을 더하는 시편, 계속해서 믿음을 지켜가라고 격려하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아직 하나님의 그늘 아래 살지 않는 자들,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고 다른 곳에 믿음과 희망을 두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유일하고 참된 영혼의 안식처이시니, 그 하나님의 그늘 아래 살라고 말하는 시편이다. 물론, 이 시편은 그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고 그에 따른 책임도 우리의 몫이다. 우리 모두가 이 시편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그늘 아래로 모여들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시편을 읽어보면 화자가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절은 “나”가 여호와께 말을 하고, 3-13절은 다른 누군가가 “너”라고 하며 나에게 말한다. 그리고 14-16절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다. 내용을 통해서 유추해 보자면, 전쟁터에 나가는 왕이나 군사를 격려하는 상황이 배경일 수 있지만, 일반적인 모든 상황이 배경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에게 축복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1-2절이 고백, 3-13절이 축복, 그리고 14-16절이 약속이다.

믿음의 고백 (1-2절)

먼저 1절은 일반적인 진리의 선언으로 시작된다.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개역개정은 “-자여”라고 부르는 말로 번역을 했지만, 아마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산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은밀한 곳”은 구체적으로 성전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여기 문맥에서는 보다 일반적으로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늘 아래”라는 표현은 ‘보호’를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다. 즉, 이 말씀은 누구든 어떤 상황에 있든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표현되었느냐다. 1절에서 중요한 하나님의 이름이 두가지 언급되어 있고 2절에서도 또 다른 이름들이 언급되어 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 1-2절에 언급된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다.

먼저 하나님은 “지존자”와 “전능자”로 불려진다. 지존자는 ‘엘리온’, 전능자는 ‘샤다이’다. 엘리온은 지존자로 번역된 것처럼 하나님의 ‘높으심’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 위에 높으시며 모든 권세를 지니신 ‘주권자’이심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샤다이는 전능자로 번역된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신 ‘전능자’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능력과 주권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우리는 능력은 있는데 권리가 없어서 어떤 일을 못하기도 한다. 반대로 권리는 있는데 능력이 없어서 어떤 일을 못하기도 한다. 무언가를 보호하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역사를 보면 왕이 힘이 없어서 쫓겨나는 경우들이 많다. 반대로 자기 힘은 있었지만 권력이 약해서 모함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는 항상 그런 사람들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운명은 결국 그들이 믿는 그 대상이 어느 정도의 능력과 권력을 가졌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은 지존자이며 전능자시다. 즉,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능히 보호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성경은 반복해서 “누가 주와 같으리”라고 묻고 “주 같은 분이 없다”고 답한다. 하나님처럼 높은 분이 없으시고 하나님처럼 강한 분이 없으시다. 하나님이 ‘으뜸’이라면 바로 아래라고 할 수 있는 ‘버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존재조차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비교할만한 존재 자체가 없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무한히 강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보호 아래 있는 것이다. 어떤 걱정이나 근심을 할 이유가 없다. 잘 모르는 아이들은 엄마 아빠만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게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몰라서가 아니라 잘 알수록 정말 세상에 무서울게 없다. 어떤 상황도 하나님보다 높지 않고 하나님보다 강하지 않다. 어떤 존재가 되었든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하나님의 그늘 아래는 언제나 안전한 것이다. 그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느냐 없느냐가 된다. 즉,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내가 거주하고 있느냐,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론적으로는 예/아니오가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다양하다. 아예 하나님을 부인하며 그 그늘 같은 것도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 그늘 아래 계속해서 거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그늘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도 많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그늘 언저리에 있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늘 언저리에 있는 사람도 있다. 구분이 쉽지 않다. 그늘 밖에서 살다가 한번씩 그늘 안으로 오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주로 그늘 안에 있는 것 같은데 중요한 때는 그늘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시편에서 말하는 사람, 하나님의 온전한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2절을 보라.

91: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여호와”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능력과 주권의 하나님이 나와 관계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을 사용한다. 피난처와 요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확실히 한다.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 사람이 계속해서 반복하는 말이 있다. 바로 “나”다.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나’를 강조하면 좋지 않은 의미일 때가 많은데 여기서는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자신의 개인적인 친밀함을 1인칭의 소유격을 통해서 강조하기 때문이다.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그리고 ‘나의’(우리말 번역에서는 생략) 하나님이다.

이는 마치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는 믿지 못했다가 예수님을 만나자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했던 것과 같다.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그냥 하나님이 피난처이시며 요새라고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이 바로 나의 피난처이시고 나의 요새시고 내가 의뢰하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고백의 의미를 시편 기자는 9절에서 설명한다.

91: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하나님을 거처로 삼은 사람의 말(고백)인 것이다. 시편 90:1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고백했었는데, 그 고백은 이스라엘 민족의 측면에서의 고백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거처가 되어주셨다고 해서 모든 각 개인의 거처이셨던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멸망한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노하심에 소멸되어 간 사람들이 많았다. 전능자의 그늘 언저리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지만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지 않았다.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지 않았다.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으로 삼지 않았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계셨던 것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화였다.

더 말씀을 진행하기 전에, 우리 교회 안에 이런 위치에 있는 분들께 정말 간절히 부탁드리는 것은, 제발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전능자의 그늘 가까이에 와서 있어도 그 아래로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얘기를 하고 아무리 교회 다니는 것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본인도 교회 잘 나오고 해도, 결국 그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 요새, 하나님’이 아니시면 아무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사실 가장 불쌍한 삶이 되는 것이다. 교회 잘 나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걸로 된 것이 아니다. 특별히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란 학생들은 이 말씀을 통해 경고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정말 ‘나의’ 하나님이신지, 내가 그렇게 하나님을 고백하고 남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길 원하는지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그늘 아래로 나아와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자의 특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9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하나님의 그늘 아래 사는 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사랑하다”는 같은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가 아니다. 구약 성경에서 딱 11번만 나오는 단어로서 목적이 되는 대상을 강하게 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연하다”로 번역된 부분이 있는데, 우리말로는 가장 적절한 번역일 것이다.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열망이 포함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그늘 아래 사는 자는 하나님께 연연한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고 열정이 있다. 물론 언제나 사람이 이렇게 뜨거울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전혀 없고 또한 그렇게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연히 순종으로 드러나고 증명되지만, 그 전에 마음 속에 원함이 있어야 한다. 사랑과 순종은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순종이고 순종이 사랑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사랑의 결과인 순종보다 사랑이라는 마음 자체를 말씀하고 계신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눈과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저리’에 있는 경우 구분이 쉽지 않다고 말했었는데, 스스로 자신을 볼 때 내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면 된다. 그늘 아래 있는 것 같아도 밖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혹은 반대로 밖에 있는 것 같아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각자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 더 가까이 가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울보다 다윗이 더 큰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위해 회개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누렸던 복을 회복하는 것을 더 원한다. 전자가 다윗이고 후자가 사울이었다. 나에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지,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인지를 돌아보라. 하나님께 연연하고 집착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가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고도 말씀하셨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그는 하나님을 지존자로 안다. 전능자로 안다. 여호와로 안다. 피난처로 알고 요새로 안다. 하나님으로 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친밀하게 안다. 나의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산다.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하심 아래있다.

시편 기자는 이제 이런 사람을 축복한다. 이는 예언의 말씀이 아니다. 즉, 무조건 이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말을 해주는 것이다. 믿음의 축복이다.

믿음의 축복 (3-13절)

믿음의 축복의 내용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여러 종류의 위험과 재앙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에서 신자를 보호하실 것을 말한다. 3-13절에서 저자는 계속해서 “너”라고 독자를 지칭하여서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모든 사람, 즉 이 시편이 기록될 당시의 대상이든 지금 이 시편을 읽고 있는 우리든, 누구든 “너”가 되어 이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너희’라고도 말하지 않아서, 누구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의뢰하는 자라면 이 말씀은 바로 그를 위한 말씀이다.

91: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새 사냥꾼의 올무에 사람이 잡힐 일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가 있음을 전제로 두고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두 종류의 위험을 말한다. 올무는 갑작스러운 위험이고 주로 사람이 계략을 꾸며서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미지로 시편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여기서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심한 전염병은 코로나19를 말하는게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뒤에서도 계속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 저자는 일반적인 재난, 재앙의 상황보다는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한 심판의 상황을 더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런 질병은 신명기에서 순종의 복과 불순종의 저주가 기록된 본문에서 불순종의 저주로서 언급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저자는 그런 약속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에게는 순종의 복이 임할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과 진리로 돌보시기 때문이다.

91: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이제서야 ‘그늘 아래’라는 비유적인 표현의 전체 비유가 나온다. 전능자의 그늘은 나무 아래 생긴 그늘이 아니고 날개 아래 생긴 그늘이다. 즉, 저자는 하나님을 어미새로 그 아래 있는 자를 아기새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기계적인 보호하심이 아니라 인격적인 보호하심이다. 사랑의 돌봄이다.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괜찮다. 어미새의 날개 아래 있으면 된다. 아기새가 어미새의 날개 아래서 가장 따뜻하고 평온함을 느끼며 안전한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과 함께 할 때 가장 안전하다. 그곳이 어디든 그런 것이다.

또한 그런 하나님의 보호하심에는 진실함 혹은 진리가 함께 한다. 변하지 않는 약속의 말씀이 방패와 손 방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한다.

91:5–8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8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여기서는 확실히 전쟁의 이미지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표현을 보면 어려움이나 재앙 자체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 언급된 것들이 실제로 위협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재앙이 해할 것은 내가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결국 보게 될 것은 의인의 멸망이 아니라 악인의 멸망이다. 시편 저자는 다시 왜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확인시켜 준다.

91:9–13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10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3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사자, 독사, 젊은 사자, 뱀이 여기서 왜 나올까 싶을 수 있다. 창세기 3장의 뱀의 머리를 여자의 후손이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날 수도 있다. 사자를 죽였던 삼손이 생각날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연결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시편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사자와 독사와 같이 가장 위험한 세력에게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확실히 승리한다는 것이다.

화가 그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이 그의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한다. 마치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의 목숨의 목숨을 빼앗았던 “멸하는 자”는 문 주위에 양의 피가 발라져있던 이스라엘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것과 같다. 시편 저자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또한 관여할 것이라는 놀라운 말도 한다. 히브리서 1:13을 보면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여기 말씀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명하셔서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를 지키실 것을 말한다.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는 말은 그 걸음, 즉 삶에 있어 지속적인 보호와 돌봄이 있을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경에는 이런 실제적인 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은 엘리사와 그의 사환의 예다. 아람의 군대가 그들을 둘러쌓을 때 사환은 두려워했지만,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의 눈을 열어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천사의 군대를 볼 수 있게 하였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엘리사를 보호하고 계셨던 것이다. 옥에 갖혀 있던 베드로가 천사에 이끌려 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좋은 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천사들이 믿는 자들을 보호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확실히 할 것은 천사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우리를 돕고 보호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를 돌보고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강한 세력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그늘 아래로 피한 자들을 보호하시고 더 나아가서 승리하게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서로를 축복할 수 있고 또한 스스로를 격려하고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이는 아무 의미없이 그냥 희망적이고 좋은 말을 해주는 덕담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축복의 말이다. 그 약속의 말씀이 이 시편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기록되어 있다.

믿음의 약속 (14-16절)

9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대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다. 하나님은 그를 건지시고 높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위험에서 구하고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높은 곳에 그를 두시겠다는 의미다. 또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91: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환난’이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환난이 있다. 고난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때에도 함께 하시며 기도를 들으신다. 환난에서 건지신다. 결국 수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롭게 하신다. 그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삶이 어리석지 않았음을 알리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약속의 말씀을 이렇게 마무리하신다.

91:16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매우 일반적인 약속의 말씀이다. ‘장수’는 그저 오래사는 것이 아니라 풍족한 삶을 말한다. 겨우겨우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삶의 의미, 목적에 맞는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실 것이고 당연히 그런 삶에는 만족이 있다. 그 삶에는 지속적인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있을 뿐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하심이 있다. 바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다.

도전

이 말씀은 진짜일까?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할까?

잘 알려진 선교사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의 일기와 편지를 묶어 짐 엘리엇의 삶과 간증을 책으로 냈다. 그 책의 제목이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91:1에서 따온 <전능자의 그늘>이다.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안어울리는 제목이 어디있을까 싶다. 엘리엇은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젊음을 모두 바쳤다. 아우카 족에게 들어간 것도 위험한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확신과 사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28살의 너무나 젊은 나이의 죽음이었다.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도대체 어디 갔을까? 그의 죽음은 그가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까?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이런 순간이 정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가 그 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짐 엘리엇의 죽음을 두고 당시의 시카고 지역 신문은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그들이 봤을 때는 당연히 불필요한 낭비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다르게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고 생의 목표를 달성하고 죽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짐 엘리엇은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았다. 그의 죽음은 더 이상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지 않으시고 그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그가 끝냈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영원한 품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이제 영원한 만족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기쁨을 누리며 영원을 살고 있다.

천국에 가서 짐 엘리엇에게 “당신에게 시편 91편은 진리였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가 아니라고 말할까? 어떻게 28살의 나이에 비참하게 살해당한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까? 그렇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았고 지금도 하늘에서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짐 엘리엇 훨씬 이전에 예수님께서 그런 삶과 죽음을 맞이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로 시편 91편이 사실임을 증명한다. 결국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고난과 역경도 없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상황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가 다르다는 의미가 된다.

예수님이나 짐 엘리엇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자신을 쉽게 상황의 피해자로 만든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 왔는데, 겨우 나에게 돌아온 것이 이거냐고 하나님께 따지기 쉽다. 이런 약속의 말씀들은 격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화를 돋운다. 결국 이렇게 되는거면 이런 약속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광야에서 예수님 앞에 나타난 사탄은 시편 91:11-12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했었다.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거기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증명해 보라며 시편 말씀을 인용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신명기 6:16을 인용하셔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단호하게 답하셨다.

어려움 중에 우리는 쉽게 하나님을 시험한다. 내가 이런 상황에 있는데, 이 약속의 말씀이 진짜라면 하나님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는 것이다. 피해자로서 권리를 하나님께 주장하듯 그렇게 한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지존자이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무너졌어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평안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언제나(어려움 중에 있든 그렇지 않든) 내가 해야할 일은 하나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만약 내가 신실하지 못해서 고난을 겪는 부분이 있다면, 신실함으로 돌아갈 때 고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겪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신실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를 신뢰하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켜가야 한다. 그렇게 계속해서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시편 91편의 축복과 약속을 주신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진리이고 우리에게 유효하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