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적응과 타협 사이
본문: 디모데전서 2장 9-15절
설교자 : 이병권
이따금씩 옛날 사진을 보면서 추억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사진 속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 지금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때는 저런 모습이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전혀 어색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적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항상 이렇게 잘 적응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변화에 적응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이나 최신전자기기, 그와 관련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만큼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외적인 것들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문화가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사람이 옳고 그름을 생각하는 방식도 변합니다. 옛날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옛날에는 금지되었던 것들이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허용이 되고 문제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변화에 올바른 기준을 가지지 않으면 혼란스럽고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지 몰라서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특별히 더 그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여성의 역할입니다.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시대의 변화를 더 크게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변화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옛날에 가정에서 우리 어머니의 모습,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여자가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 역할을 감당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과 많이 달랐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집안에서 여자는 가장 낮은 자리였습니다. 늘 자신을 희생해야했습니다. 자신의 삶은 없었습니다. 그냥 누구의 아내였고 누구의 엄마였습니다. 만약 지금 젊은 사람들이 옛날에 했던 것처럼 따라하면 남자는 집에서 쫓겨날 거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시대가 달라졌고 많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어떨까요? 성차별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많이 다릅니다. 옛날처럼 여자에게 함부로 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달라졌고 여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얼마 전에는 여군으로서 최초로 투 스타 장군이 나왔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여자가 대통령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여자의 지위가 높아진 시대에서 그런 변화에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교회에 많은 도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도 사장이 되고 여자도 대통령이나 장관이 되는 시대인데 여자가 교회의 리더가 되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고 여자가 교회 인도자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옛날에는 여자를 차별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똑같이 대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논쟁을 말합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와 사람들의 견해 차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그 모습으로 교회를 세워가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우리의 유일한 권위이며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원리에 따라 시대의 변화를 바람직하게 적응해 갈 것이지만 타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응과 타협은 분명히 다르기에 우리는 그 선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그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자에게 주어진 두 가지의 명령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명령이 두 개라는 말이 아니라 구분이 되는 두 종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9절과 10절에 나오는 명령이고 두 번째는 11절과 12절에 나오는 명령입니다. 그럼 두 명령을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명령입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9~10)
9절은 “또 이와 같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로 앞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8)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남자에게 했던 기도에 대한 명령에 대응해서 여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자들이 자기를 단장하기를 원하노라’
여자는 자신을 단장하며 꾸미는 일을 합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은 여자가 그렇게 자신을 단장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꾸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단장함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할 질문은 ‘무엇으로 자신을 꾸며야 하는가?’입니다.
무엇으로 단장해야 합니까? 먼저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합니다. 이 표현들을 쉽게 이해하게 옷을 상황에 맞게 잘 맞춰 입고 도발적이거나 성적으로 유혹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꾸미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 명령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땋은 머리를 하면 안 되는 건가요? 금이나 진주로 장신구를 달면 안 될까요? 이 말씀대로 하면 지금 가지고 있는 장신구를 다 빼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바른 해석은 이 말씀에서 가르치는 원리를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피해야 하는 옷이나 머리 모양, 장식구 등은 문화에 따라 다릅니다. 우리는 옷이나 자신을 단장하는 방법에 대한 말씀의 원리를 따르지만 지금 우리가 순종하는 내용은 문화적인 변화에 따라 달라집니다. 말씀에서 금이나 진주와 함께 땋은 머리는 문화적 표현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른 예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3:14-15). 우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르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에 담긴 본질적인 원리를 찾아 우리에게 맞게 적용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사랑으로 섬기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발을 직접 씻기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맞는 다양한 방법으로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라는 것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어울리지 않는 허영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숙한 의상, 머리 모양, 장식으로 자신을 꾸며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은 따로 있습니다. 단장에 있어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여자가 단장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선행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꾸미는 것은 외모를 넘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아무리 멋진 옷을 입고 자신을 아름답게 꾸민다 하더라도 더러운 말과 악한 행실을 품고 있다면 자신을 단장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면 그들의 화려한 모습과 뛰어난 외모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외모에 많은 돈을 투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화려한 외모를 가진 사람의 삶에 죄가 가득하다면 어떨까요? 정말 멋지게 차려입었는데 그 입에서는 계속 욕이 나온다면 어떨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단장은 선행으로 나타나는 경건한 성품입니다. 겉으로 더 예뻐지려고 시간과 돈을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은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입니다. 육체적인 아름다움보다 성품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그 사람을 더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자로서 외적인 단장에 마음을 쓰고 투자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마음을 쓰고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말과 행실이 어떠한지를 살피고 그것을 가꾸는데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진짜 중요한 아름다움을 가꾸는 미용실입니다. 머리를 만져주고 얼굴에 화장을 하며 외모를 가꾸는 미용실이 아니라 더 중요하고 사람을 더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내면을 다듬어가는 미용실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속사람을 아름답게 다듬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통해 가꾸어진 우리는 세상에서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그 매력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명령을 살펴보겠습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11~12)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여자는 교사가 되어 가르치면 안 될까요? 남자에 대해서 어떤 권위를 가져서도 안 되고 말을 해서도 안 될까요? 그럼 여자에게 최선은 그냥 조용하게 가만히 있는 걸까요?
우선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은 이 말씀은 교회의 공적인 모임이라는 상황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정말 다양한 견해 차이가 있는데, 이견이 없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이 말씀이 교회에 공적인 예배 가운데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여자는 남자를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면 안 되고 직장에서 상관이 되어 남자를 주관하면 안 되고 이런 식의 적용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적용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에 대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말씀은 많은 연구와 토론의 주제가 되었고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서신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말씀에 대한 공격이 많고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이 말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 에베소 교회에만 적용이 되는 말씀이라고 분별합니다. 지금처럼 여자의 지위가 향상되어 있고 남녀가 평등하다고 믿는 시대에는 맞지 않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앞뒤가 꽉 막힌 고리타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반대쪽에서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침묵을 지킵니다. 여자의 역할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는 점점 찾기 힘듭니다. 사라지는 겁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적응과 타협 사이”, 어떻게 하는 것이 타협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바르게 적응하는 걸까요?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하는 방법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서 그 원리를 우리에게 바르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이 구절이 성경의 전체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기에 어떤 말씀과도 서로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전체의 가르침 안에서 이 말씀을 생각할 때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일관성 있게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 전체의 문맥 안에서 해석하며 자연스러운 조화를 찾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을 다루는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이 남자와 여자에게 차별 없이 평등하게 주어졌고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차이도 없습니다. 성별에 따른 더 큰 지위나 우월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말씀이 전제가 됩니다. 차별이 없다는 말씀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 본문에서의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역할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녀차별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시 문화 속에서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과 전혀 다른 불편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에는 여자에게 배움이란 없었던 때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자에게 조용히 배우라고 하면 차별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당시의 여자는 배울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한 예로, 유대교의 한 분파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토라를 여자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불사르는 것이 낫다’ 토라는 율법을 말하는 겁니다. 율법을 여자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그 율법 책을 불에 태우는 것이 더 낫다는 말입니다. 당시 문화가 그러했습니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여자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 남자만, 그리고 유대교로 개종한 남자만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무너뜨리고 예배의 자리에 여자가 초대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이 이러한 변화가 얼마나 파격적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논쟁이 되는 부분이 당시는 전혀 다른 관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며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역할에 있어서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릅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다르듯이 교회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다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일관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창조에서부터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담과 하와를 언급하며 이것이 창조에서부터 시작된 변하지 않는 원리임을 알려줍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13-14)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태어난 장자에게 더 큰 권한이 주어지는 것처럼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더 큰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권한은 더 큰 책임이 따라옵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졌지만, 하나님은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으십니까?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머리로 세우시고 그에게 권위를 주셨기 때문에 그에 따른 책임이 아담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따라 남자에게 다스리는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남자에게 더 큰 책임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여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자가 말씀에 따라 순종할 때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15)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뭐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여자가 구원 받은 자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은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고 그날에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여자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해산을 말하는 것은 해산이 남녀 역할에 있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입니다. 남자는 아무리 아내를 사랑하고 아무리 자녀를 사랑한다 해도 아이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남자가 할 수 없는 여자의 역할입니다.
또한 해산은 창조의 질서에 뿌리는 둔 것으로 문화와 시대를 초월합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는 여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해산하는 것, 다시 말해 여자의 역할에 충성하는 것은 구원의 증거이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화의 삶입니다. 구원의 완전함을 얻을 때까지 이 땅에서 계속되는 구원의 과정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변함없이 순종해야 하는 원리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원리를 타협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의 개인적인 의견이지 명령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자가 아니라 가정에서 아내에게만 적용이 된다고 합니다. 모든 여자가 아니라 당시 에베소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문제를 일으켰던 여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것은 지금은 여자가 공적인 예배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를 인도하는 직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자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잘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여자로서 가지는 장점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능력이 부족해서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를 차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은 말씀에 따라 그 원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습으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고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그 역할에 있어서 차이를 두시고 그렇게 정하셨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따라야 합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대의 변화에 거스르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고 우리가 변화에 대해서 바르게 적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고 말씀을 지키며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별에 관계없이 남자든 여자든 차별 없이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여자들이 차별받던 그 옛날에도 여자들을 귀하게 대하셨습니다. 여자들을 가르치셨고 인격적으로 대하셨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도 좋은 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도로서 남자들을 택하셨고 교회의 인도자로서 남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원리에 따라 교회에서 남자로서의 역할, 여자로서의 역할을 각자가 충성스럽게 감당해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