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유를 자유롭게 하라
본문: 갈라디아서 5장 1~6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모르고 있다가 잃어버리고 나서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잊고 지내는 겁니다. 가장 쉬운 예로 말할 수 있는 것이 건강일 것입니다. 건강할 때는 모르다가 건강이 안 좋을 때 그 소중함을 절실히 알게 됩니다. 또 다른 예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습니다. 있을 때는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낭비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가족이 그럴 수 있습니다. 가까이 있어서 익숙하기에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가족인 교회가 그럴 수 있고 심지어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이 그럴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하다가 어려울 때만 찾는 겁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고 익숙하고 편하면 그 소중함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있을 때 잘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놓치는 걸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 가치를 모르고 있거나 그 가치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희 아이들이 어려서 돈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 일입니다. 세뱃돈을 받았는데 만 원짜리가 여러 장 생겼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있는 만 원짜리보다 자신에게 없는 천 원짜리가 더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만 원짜리하고 천 원짜리하고 서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에 대해서 그러했습니다. 바울이 전해준 복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 가치를 잊어버리고, 그들은 다른 복음을 따릅니다. 믿음으로 값없이 주어지는 의로움보다 자신의 행위로,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 의로움이 더 좋아 보인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빼앗으려는 거짓 형제들이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들의 자유를 빼앗으려 합니다. 복음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위협을 받습니다. 그 상황을 바울은 이미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2:4)
거짓 형제들은 자유를 빼앗으려고 거짓을 전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자유를 빼앗길 수 있는 상황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거짓 형제들의 속임에 빠져서 자유를 버리려고 합니다. 다시 종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서 급하게 편지를 썼고, 오늘 본문에서 이 편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중대한 선언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우리는 여기서 자유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자유가 왜 주어진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유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자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냥 들으면 중복되는 말 같고 너무 당연한 말장난 같기도 합니다.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자유가 우리 삶의 목적이면서 또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자유를 통해서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를 주셨고 자유롭게 모든 것을 누리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자유를 범죄 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인류는 자유를 빼앗긴 채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다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목적대로 자유롭게 살도록 하려고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두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굳건하게 서라는 명령과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굳건하게 서라‘는 말은 군사용어입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해서 경계를 하며 굳세게 방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자유를 받은 자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 우리를 옭아매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었으니 그 자유를 기억하고 자유를 지키며 합당하게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합니다. 종의 멍에란 동물에게 사용했던 멍에와 비슷하게 노예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잡아두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입니다. 노예를 강제로 복종시켜서 정해진 범위 안에서 일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지금 종의 멍에를 다시 메려고 합니다. 다른 복음에 빠져서 자유를 빼앗길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이전에 예수님을 모를 때로 우상을 따르면서 느꼈던 불안과 죄책감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내가 어느 정도 이루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속박되어 있습니다. 하는 모든 일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내가 뭔가 잘못해서 받는 징벌과 같고 내가 뭔가 더 하지 않아서 생긴 결과 같습니다. 어떻게 더 안전할 수 있을지 어떻게 더 평안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늘 부족함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자유 할 수 없고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굳건하게 서서 이런 공격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벗어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속박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자유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갈라디아 교회는 이 자유를 반납하려고 합니다. 자유를 포기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어떻겠습니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 아닐까요?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다시 종의 멍에를 짊어진다면 그들이 율법의 행위를 따른다면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지를 경고합니다.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전에 바울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2)바울이 특별히 강조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1:1) ‘주목하십시오. 나 바울이 분명하게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사도로 부르셨고 사도의 직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권위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그가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서 그 권위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이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권위로서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너희가 주님이 주신 자유를 버리고 율법의 행위를 따르면,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바울은 그 결과에 대해서 세 가지로 언급합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아무 유익이 없게 됩니다.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 그들이 할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이 자신을 구원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내가 뭔가를 추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이렇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할례를 받는 것은 그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신 일이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께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등지고 율법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를 받는 결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사람에게 있어서 둘 중 하나가 될 뿐입니다. 모든 것이 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무엇이 되십니까? 모든 것이 되십니까?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닙니까?
갈라디아 교회가 할례를 받으면 어떤 결과를 얻게 됩니까?
둘째,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3) 할례를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 전체를 지키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은 내 입맛대로 임의로 선택해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택하는 것은 곧 전체를 택하는 것입니다. 의에 이르는데 할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율법에 대해서 똑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례를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율법을 따라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이렇게 언급했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3:10) 복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정말로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는 것은 율법 전체를 받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할례를 받으면 어떤 결과를 얻게 됩니까?
셋째,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4) 할례를 받는 것은 우리의 구주이시자 주님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갈라디아 성도들이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건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 안에서 말씀을 해석할 때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절대로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여기 말씀은 율법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는 서로 반대되는 원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로 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으로 의를 얻겠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이고 은혜에서 떨어져 자신의 행위로 멸망에 이르겠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나의 노력으로, 내가 뭔가를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뭔가를 해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뭔가를 해서 나의 구원을 무효로 만들 수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그 후로도 계속 은혜로 자신의 믿음을 지켜갑니다. 반대로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은 진정으로 믿은 적이 없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할례를 받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경고하고 있는데, 이미 할례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예외 없이 할례를 받으면 정말 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겁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자신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행16:3). 할례에 대해서 이렇게 강해서 경고하는 바울이 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겁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아닐까요?
바울이 여기서 할례를 경고하고 있는 것은 지금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할례에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따랐던 율법의 행위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할례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지 단지 할례만을 특별한 의미를 두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할례, 그 자체를 두고 문제를 삼는 것도 아닙니다. 할례가 문제였다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회에게 할례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4). 그것이 문제입니다.
또 다른 질문입니다. 그럼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나쁜 걸까요? 다시 말해, 복음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반대하는 걸까요? 종의 멍에를 벗어 버리는 것,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행위를 버리는 것, 결국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그것이 자유일까요?
그래서 바울은 오해하지 않도록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말해서 믿는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
여기서 반복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5절에서는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이 말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 ‘믿음으로 주어진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성령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쉽게 말하면, 믿음이 역사하면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중요한 것은 믿음의 결과로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주님이 허락하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첫째로 믿음으로 소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의롭게 되는 그 날을 기다립니다. 이미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에 완전하게 의롭게 될 것입니다. 확정적으로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그날이 되어서 온전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될지도 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어! 잘은 몰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이런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기다립니다. 전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100%입니다. 0.01%의 틀림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게 될 완벽한 의로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모습으로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존재로 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모습으로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그 모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의로움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립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이 허락하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둘째로 믿음으로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안 받고 내가 뭔가를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도 무할례도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나타나는 사랑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믿는 자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믿음으로 소망을 기다리게 하시고, 믿음으로 사랑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자유로 자유롭게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나를 위한 자유이면서 동시에 주님을 위한 자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위해서 그 목적으로 자유로운 것입니다.
자유를 얻은 자로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서 이제는 의의 종으로, 마귀에 종에서 해방되어서 이제는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합니다. 종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유로 주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가지고 있는 걸 그냥 우리에게 주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그 값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유의 가치는 주님의 피 값이자 주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으로 우리가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자유를 귀한 것으로 알고 자유를 내 욕심을 위해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통해 주님을 섬기며 자유롭게 주님을 예배하며 자유롭게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자유롭게 주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치르신 희생의 가치를 생각하고 나에게 주어진 자유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기억하며 주님을 위해 자유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유, 이 땅에 속한 거짓 신들과 헛된 우상들에게 메이지 않고 참된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는 자유, 세상의 미신과 종교적 관습들 그 모든 것들을 벗어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유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소망을 기다리고 믿음으로 사랑을 나타내십시오. 그렇게 자유를 통해 주님 만을 높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