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비로운 아버지와 무자비한 아들
본문: 누가복음 15장 25~32절
설교자: 조정의
몇 년 전에 한 노파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법정에 들어섰다. 그녀는 70세쯤 되어보였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백인 경찰관 몇 명이 서 있었고 그 중에 한 경찰관, 밴 더 브로크가 노파의 남편과 아들을 죽인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수년 전 밴 더 브로크는 노파의 집에 동료들과 함께 찾아와 노파의 아들을 잡아갔고 총으로 쏘고 소년의 몸을 불에 태워 죽였다. 몇 년 후 그는 다시 노파의 집에 찾아와 그녀의 남편마저 데리고 갔다. 2년 동안 그녀는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어느 날 밴 더 브로크는 노파에게 다시 찾아와 그녀를 강가로 끌고 갔고, 거기서 그녀는 심히 맞은 남편이 장작더미 위에 묶여 있는 것을 봤다. 밴 더 브로크는 노파가 보는 앞에서 남편의 몸에 석유를 잔뜩 부어 불을 붙였고 그녀의 남편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법정에서 판사는 노파에게 물었다. “당신은 밴 더 브로크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어떻게 해야 이 무자비한 죄인에게 정의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까요?”
노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세 가지를 원합니다. 첫째, 타버린 내 남편의 시신이 섞인 흙을 모아 제대로 장래를 치렀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남편과 아들은 나의 유일한 가족입니다. 둘째, 그래서 나는 밴 더 브로크씨가 나의 아들이 되어 주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가 한 달에 두 번 내가 사는 빈민가로 와서 나와 함께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에게서 아직 그가 뺏어가지 못한 남아있는 사랑을 그에게 부어주고 싶습니다. 셋째로 저는 밴 더 브로크씨가 이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에게 용서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이유가 예수님이 용서하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은 나의 남편의 소원이기도 했고 저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누군가 제 옆에 와서 저를 부축하여 저 쪽에 있는 밴 더 브로크씨에게 데려다 주십시오. 제가 그를 제 팔로 부둥켜안고 제가 그를 진정으로 용서했다는 것을 그가 알 수 있게 해주도록 말입니다.”
노파가 법정 안에서 이동하는 동안 법정 안에 있던 가족, 친구, 이웃들이 자연스럽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파가 벤 더 브로크를 안기도 전에 그는 놀라운 은혜에 물리적으로 압도되어 기절했다고 한다(필립 얀시,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 중에서).
우리는 이 사건에서 놀라운 용서와 자비의 힘을 맛본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노파의 용서는 죄인을 향한 놀라운 자비를 보여준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이야기가 놀라운 자비의 이야기였다. 오만 불손하고 완악한 아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한없는 자비로 맞이해주시는, 용서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주는 아버지였다.
모두가 살진 송아지를 먹고 즐기며 기뻐하고 있을 때, 아직 이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맏아들이었다. 그는 동생이 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25-26)
이 시간에 맏아들은 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둘째 아들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었던 맏아들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둘째 아들을 욕하면서 맏아들을 칭찬했을 것이다. 이 날도 늦게까지 일하고 저녁 해가 지고 어둑어둑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는다.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여기서 풍악은 관악기가 주된 연주를 가리킨다(심포니아). 전문 연주가와 가수가 나와서 연주하는 음악이다. 음악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리고 아마도 고기굽는 냄새가 났을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에서 맏아들은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는 종을 통해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27)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었던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맏아들의 정상적인 반응은 반가움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노하였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28) 점점 끓어오르다가 갑자기 넘치는 주전자와 끓는 물과 같은 감정상태이다. 몹시 분하고 노여워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상태이다. 그 분노가 너무 심해서 겉으로 드러나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도 보여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집 밖에 있던 아들은 돌아와서 회복되어 집 안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집 안에 있던 아들은 밖으로 일하러 나갔다가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두 아들 모두 죄 때문에 집 밖에 머물고 있었고, 둘째는 죄를 회개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지만 첫째는 분노에 가득 차서 집으로 들어오기를 거절하고 있다.
오늘 나는 첫째 아들이 밖에서 가지고 있는 분노의 감정 속에서 무자비한 모습을 발견하길 원한다. 죄인을 향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무자비한 반응과 마지막으로는 아버지의 자비로움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한다.
큰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사실에 무관심했다. 죄인의 회심에 무관심했다. 종은 ‘당신의 동생’이라고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받아주었다고 말했다. 가족 안에 일어난 매우 좋은 일이다. 잃어버린 내 동생이 돌아온 것이고 내 아버지가 받아준 일이었다. 종의 표현을 보면 ‘건강한 그’를 맞이했다고 말했다. 병에 걸렸다가 치유된 상태를 말하는데, 종의 관점에서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동생이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그것이 회복된 상태라고 본 것이다. 형은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전혀 반가워하지 않았고 분노했다.
‘그래, 그동안 뭐하고 있었데? 혹시 병이 들진 않았나? 흉년이 든 나라도 있다던데 제대로 먹기나 했데? 어디 상한 곳은 없데? 너무 고생 많이 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형의 마음에는 전혀 없었다.
아버지가 나와 맏아들에게 들어가자고 했을 때 그는 동생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그리고 동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30절) 형이 바라보는 동생의 모습이다. 여기서 두 가지 살펴볼 게 있다. 둘째 아들이 창녀들과 돈을 탕진했다는 말씀은 없다. 큰아들은 동생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들어보지 않고 알 수 없는 사실을 덧붙여 말하고 있다. 또한 “이 아들”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당신 아들”이라는 말이다. 형에게 있어서 탕자는 당신 아들이다. 내 동생이 아니다. 형의 입장에서 동생이 미울 수는 있다.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간 동생이 미울 수 있다. 그러나 생사를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회복되어 돌아온 동생에 대해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이것이 형이 가지고 있던 무자비함이다. 예수님은 탕자가 돌아와 안아주고 잔치를 벌이고 끝날 수 있었던 이 이야기에 왜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셨을까? 왜 비유의 처음부터 두 아들이 있는 아버지라고 이야기를 시작하셨을까? 왜 맏아들 얘기를 하시는 걸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당신은 죄인, 세리, 창녀들과 어울리고 용납할 수 있느냐, 그런 것을 봤을 때 당신은 선지자가 아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한 죄인이 회개할 때 하늘의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아야 한다, 왜 너희는 친 형제 자매가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에 대해 왜 이렇게 무심하냐고 묻고 계신다. 우리 역시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나는 명절에 처가에 방문할 때 휴게소에 들어갈 때가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가는 곳마다 미어터질 것 같을 때 나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면 다 지옥에 가는 것입니까’라고 하나님께 물을 때가 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들의 회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 가족들, 친척들, 직장 동료들을 생각해 보라. 내일 주님이 오시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그들이 영원히 거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만약 당신의 자녀들 중에 한 사람만 지옥에 보낸다면 누구를 보낼 것인가? 당신의 부모 중에 한 사람만 지옥에 보내야한다면 누구를 보낼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왜 그들이 향할 종착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을까? 왜 경고하지 않을까? 그들의 영혼에 왜 관심을 보내지 않을까? 그들이 간절히 도와 달라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영원한 지옥에 가고 있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이 있는데 왜 우리는 그들을 이 비유의 형처럼 대할까? 우리는 이 큰아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또 이 땅을 떠나실 때 ‘내가 이제 여기에 없으니 너희가 가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우리가 교회생활, 직장생활, 가정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명하신 영혼의 구원에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무자비한 사람일 것이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둘째아들을 용서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직접 연 잔치에 불참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큰아들은 의지적으로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먼저 나와 큰아들을 설득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 큰아들의 논리는 이렇다. 나는 성실한 아들이다, 그런데 당신의 아들은 방탕한 아들이다. 나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한 아들이다, 그런데 당신의 아들은 불순종한 아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대가는 어떠한가. 동생의 친구들은 창녀들인데, 나의 친구들은 품위 있는 친구들이다. 나와 내 친구들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았고 동생에게는 살진 송아지를 주었다. 정말 불공평한 것 아닌가.
큰아들의 ‘아버지를 위해 섬겼다’는 말은 노예처럼 일했다는 것이다.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이것이냐고 말하고 있다. 나에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동생에게는 국물도 주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찰스 스윈돌은 형의 심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탕자는 아무리 못해도 재판을 받고, 선고를 받고, 파문을 당해야 마땅했다. 율법은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다(신 21:21). 상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성실한 형이었다”
형의 생각에도 굉장히 큰 잘못이 있다.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밖에서 항의하는 모습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은혜로 물려주는 재산에 대해서도 당연히 받아야 할 재산이라고 생각하므로 형도 삐뚤어진 죄인이었다. 그래도 그는 동생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길 원했다. ‘왜 너희는 너희도 자비를 입었으면서 죄인과 세리들에게는 자비가 가당치 않다고 판단하고 있느냐’고 물으신다. 우리는 어떠한가?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은가? ‘저 사람은 절대 구원받아서는 안 돼. 지옥에 가야만 해. 저 사람이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의로움에 문제가 있어. 저런 사람이 이 교회에 나오면 난 이 교회에 안 나올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는 구원 받기 전, 전직 포르노 배우였던 사람, 심각하게 부패한 정치지도자, 사형수, 매국노(친일파)였던 사람, 성격이 나랑 잘 맞지 않는 사람, 인격이 별로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 ‘어떻게 저런 죄인이 있나, 저 사람을 절대 용서받아서는 안 돼, 그 사람도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지만 차마 저 사람을 위해서 기도는 못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몸을 팔던 여인들이 눈물로 발을 씻기며 회개할 때 받아주셨고, 사람을 죽인 악한 강도가 회개할 때 낙원에 함께 있을 것이라 약속하셨다. 부패한 정치지도층의 한 사람, 바리새인이 찾아왔을 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은혜로운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는 형처럼 우리도 죄인이고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적어도 저 죄인에 비해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저 죄인이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은 불의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품으시는 죄인을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도 큰아들과 같이 우리가 종교생활, 믿음생활을 열심히 한 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정말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에 대해서는 합당치 않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한다. 형은 동생이 돌아온 사실에 무관심했고 동생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비로운 분이셨다.
여러분의 자녀가 서로 싸우고 있고 둘 다에게 잘못이 있을 때 부모인 당신은 뭐라고 말하나? 형에게 ‘네가 형인데 어떻게 그렇게 하니’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비유 속의 아버지는 형에게 이렇게 말한다. 큰 소리 치지 않고 ‘얘’라고 다정하게 부른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29). 처음부터 재산의 2/3는 큰아들의 재산이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다 큰아들의 재산이 된다. 원한다면 큰아들은 살진 송아지를 잡을 수 있었다. 첫째로 아버지는 동생이 왔다고 해서 네 것에 지장은 없다고 말한다. 또한 내 재산은 네가 노예처럼 일해서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인데 자비로 너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사회에서 아버지가 없다면 아들은 빌어먹어야 하는 처지에 빠진다. 외부의 공격이나 장애물로부터 보호하고 공급해주는 존재가 아버지기이기에 아들은 아버지가 있음으로서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것이 아들의 것이 된 것은 아버지가 은혜로 물려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은혜로만 설 수 있는 빚진 자들이고, 아무리 훌륭한 자라도 자랑할 것이 전혀 없으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결코 탕자의 형처럼 말하지 않을 것이다”(J. C. 라일)
진실로 구원받은 자는 내가 받은 은혜는 당연하고 다른 이의 은혜는 불공평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형에게 ‘네 동생’이라고 표현하며 우리가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친동생, 내 아들,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으니 우리가 이렇게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며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씀해주고 계시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보면 큰아들은 무자비했다. 동생이 돌아온 사실에 무관심했고 그가 용서받은 사실에 분노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없이 자비로웠다. 아버지는 무자비한 큰아들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교훈하셨다. 그를 안심시키고 그가 받은 은혜를 기억나게 하시고, 죽었다가 산 우리 식구가 살았을 때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다. 네가 가지고 있던 것은 내가 은혜로 준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함께 그 기쁨을 누리자고 권하였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이 비유를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으로서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우리도 기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까? 오늘의 비유는 여기서 끝나기에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장면을 보면 그들은 이 교훈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이런 열린 결말은 듣고 있는 청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묻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죄인에게 관심을 두고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겠는가?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타락하고 추악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겠는가? 가족, 친척, 동료들의 회개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우리가 아버지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밴 더 브로크의 이야기는 불완전하다. 죄에 대한 대가가 법정에서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인을 용서한 노파의 사랑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살인과 방화에 대한 형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끔찍하게 불의하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은 완전하다. 탕자와 탕자의 형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보여준 용서와 자비의 이야기는 완벽하다. 단지 아버지가 보여준 자비와 은혜뿐 아니라 정의와 공의에 있어서도 완벽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죄인을 받으실 때 죄인대신 자기 독생자를 내어주셨고 모든 죗값을 치르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죄인이 다시 긴 옷을 입게 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벗김을 당했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죄인이 다시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발에 신을 신게 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손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이 씌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죄인이 아버지에게 돌아왔을 때 매를 맞지 않고 돌에 맞지 않은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침 뱉음을 당하고 따귀를 맞으며 채찍질 당했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죄인이 살진 송아지를 먹게 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먹을 것 없고 헐벗고 머리 둘 곳 없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죄인이 아버지에게로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다시 아들로 받아들여진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성경은 말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아들이 바로 우리였다. 회개하여 돌이킨 죄인 하나, 그가 바로 나였다. 아버지는 나를 무한한 자비로 용서하고 받아주신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다. 그런 우리가 형처럼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볼 때가 있다. 그들이 구원받는 것, 잃어버린 자가 돌아오는 것에 대해 무관심할 때가 있다. 그들은 가까운 가족이고 내 자식이고 부모임에도 우리는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하고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때가 있다. 또 우리는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분노할 때가 있다. 그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저런 사람은 안 된다고 말한다. 그 사람을 구원해주심에 대해 분노하고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비의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면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신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밖에서 서성이며 돌아온 아들에게 관심 없고 그가 돌아온 사실에 분노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를 갖추길 바란다. 죄인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