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입다, 그는 누구인가?
본문: 사사기 11장 1절 ~ 28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입다를 생각하면 무엇이 먼저 생각나십니까? 아마도 자신의 딸을 번제로 드린 사람, 상상하기 어려운 정말 끔찍한 일을 행한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대표적인 두 사건이 있는데,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것과 입다가 딸을 바치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뿐인 자녀를 바칩니다. 하지만 이 둘은 너무도 다릅니다. 아브라함의 번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왔지만, 입다의 번제는 입다로부터 시작되었고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실 입다의 이 사건이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에 입다의 다른 면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TV 뉴스에 보면 종종 이런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충격적인 실수나 범죄가 밝혀지면 그 사람 인생은 그 일을 중심으로 해석됩니다. 그 일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뒤덮어버립니다. 그가 했던 좋은 일들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마치 불랙홀과 같습니다. 다른 것들을 모두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입다에게 있어서는 번제를 드린 일이 그와 같습니다. 그에게서 주목할 만한 다른 모습들을 없애버리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공부하면서 ‘입다의 재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입다의 모습을 보고 다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입다가 어떤 사람인지 세 가지로 살펴보고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입다를 살펴보기 전에 입다가 등장하는 배경, 주인공이 등장하는 무대가 어떠한지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또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며 악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넘겨주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구원해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시지만 거듭되는 그들의 부르짖음과 돌이킴으로 인해 근심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뭔가를 하실 거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때 마침,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위해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 온 것입니다. 이에 맞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미스바에 진을 치고 전쟁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10:18) 지금 이스라엘은 그 어느 때보다 구원자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앞둔 이 상황에서 그들을 이끌어줄 지도자가 없습니다. 암몬을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 백성들이 모였는데, 싸움을 지시할 수 있는 리더가 없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용감하게 먼저 나가서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을 머리로 세우겠다고, 지도자로 세우겠다고 말합니다.
이건 마치 전쟁에 상품을 걸어둔 것 같습니다. ‘먼저 나가서 싸우는 용기 있는 분에게 리더의 자리를 선물로 드립니다. 서두르세요. 선착순 단 한 명입니다.’ 이 상품을 받으려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의 머리가 될 사람, 암몬과 싸우기 위해 용감히 앞장서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입다가 등장하기 바로 전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 입다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입다의 출생배경이 나오고 다음으로 입다와 길르앗 장로들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다와 암몬 왕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이렇게 세 단락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입다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고 입다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의 질문입니다. 입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입다는 큰 용사입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1)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입니다. 큰 용사, 전쟁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요?
여기 큰 용사라는 말은 기드온을 생각나게 합니다. 기드온에게 쓰였던 큰 용사라는 표현이 동일하게 입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삼백 명으로 수많은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큰 용사 기드온처럼, 큰 용사 입다에게서도 그러한 승리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입다에 대해서 큰 용사라 부를만한 특징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골리앗처럼 신체적인 우월함을 가지고 있어서 큰 용사라고 하는 걸까요? 아니면 전쟁에서 꼭 필요한 싸움의 기술이나 특별한 재능이 있는 걸까요?
성경은 입다를 큰 용사라고 말하고 나서 입다의 출생배경을 언급합니다. 입다에게는 인생의 그림자라 할 수 있는 어두운 배경이 있습니다. 그의 배경은 어떠합니까?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1)입니다.
“기생”이라는 말은 우리 성경에서 순화되어 표현된 것인데 그 의미대로 하면 몸을 파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입다는 ‘길르앗’에 사는 ‘길르앗’이라는 사람이 창녀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 길르앗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지역의 이름이기도 하고 또 사람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는 여기 뒤에 나오는 길르앗을 사람 이름이 아니라 똑같이 지역 이름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입다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틀린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이어지는 내용에서 좀 부자연스러운 면들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먼저 나오는 길르앗은 지역 이름으로, 그리고 뒤에 나오는 길르앗은 사람 이름으로 봅니다.
입다는 출생으로 따지면 아비멜렉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첩의 아들로 태어났던 아비멜렉처럼 입다도 사생아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길르앗의 아내가 아들들을 낳았고, 그 아들들이 입다를 쫓아냅니다. 이복형제들이 아버지의 기업을 잇지 못하게 하려고 입다를 내쫓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입다가 큰 용사가 되는 과정이 됩니다.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3)
입다는 집을 떠나 ‘돕’이라는 곳에 거주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잡류’들이 그에게 모입니다. 불량배나 건달 정도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입다에게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렇게 모인 불량배들은 입다를 따랐고, 입다는 그들의 두목이 되었습니다. ‘출입했다’는 표현이 있는데, 출입한다는 것은 단순히 돌아다녔다는 것이 아니라 무리가 되어서 군사적 일을 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입다에게는 소외된 사람들을 끄는 매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환난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모였고 다윗이 그들의 머리가 된 것과 비슷한 장면입니다(삼상 22:2) 비록 모인 사람들이 잡류라고 할 수 있는 불량배였지만, 그들은 입다를 리더로 따랐으며 입다는 그들의 리더가 되어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입다의 군사적인 능력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길르앗의 장로들은 입다의 배경에 대한 거리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더의 자리에 입다를 초빙하기 위해 입다를 찾아갑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본문은 입다와 길르앗 장로들과의 대화인데, 여기서 우리는 입다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입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둘째로 입다는 협상가입니다.
입다에게 길르앗 장로들이 찾아와 말합니다.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6) 장로들은 입다에게 와서 장관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장로들의 말에서 생각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장관’이라는 말입니다. 암몬과 싸우러 나가는 자에게 상품으로 말한 것은 ‘머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장로들은 입다에게 장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머리’에서 ‘장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냥 우리말 어감으로는 머리보다 장관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장로들이 말하는 장관이라는 것은 군사적인 지도자를 말하는 것이고 그 통치에 있어서 제한적인 위치입니다. 반면에 처음에 말했던 머리라는 것은 일반적인 지도자, 책임자를 말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지금 장로들은 입다에게 왕의 자리가 아니라 군사령관 정도의 자리로 낮추어서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입다가 지도자로서 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출신과 배경을 생각했을 때 받아들일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다른 사람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입다를 지도자로 세워야 되니까 최대한 양보해서 머리가 아니라 장관으로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제안에 대해서 입다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7) 입다는 장로들의 지난 잘못을 언급하며 그로인해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합니다. 아마도 이복형제들이 아버지 집에서 입다를 쫓아낼 때 장로들도 이에 연류 되어서 이복형제들의 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입다는 자신에게 장관의 자리를 제안하는 장로들을 책망하며 그들의 이기적인 행태를 지적합니다.
장로들은 이에 대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것을 다 줄 수밖에 없습니다. 장로들은 입다에게 길르앗 모든 백성들의 머리가 될 것을 제안합니다. 지도자의 자리를 제안 받은 입다는 이에 대해서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재확인하며 이 약속을 분명히 합니다. 그들의 제안을 다시 확인하고 이 일에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그리하여 입다는 암몬과 싸우기 위해 미스바로 왔고 백성들이 그를 머리와 장관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11)
장로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입다의 재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협상가로서 그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장로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긴급함과 절박함을 알고 입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리함을 사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책임을 재차 확인하며 약속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러한 협상가로서 입다의 재능은 암몬 왕과 대화할 때에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입다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입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셋째로 입다는 지도자입니다.
백성들의 머리와 장관이 된 입다는 지도자로서 일을 시작합니다. 그가 먼저 한 일은 암몬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 전쟁을 앞 둔 지금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는 암몬 왕에게 말합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하니”(12)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가 된 입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입다는 암몬 왕과 동일한 위치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어 암몬 왕과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무슨 까닭으로 내 땅에 들어와 있느냐?’ 입다의 질문에 암몬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암몬의 땅을 점령했는데 이제 그 땅을 되돌려 달라고 합니다. ‘너희가 살고 있는 그 땅은 사실 내 땅이야!’라는 말입니다. 암몬은 지금 황당하면서도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이웃나라 이야기 같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입다는 어떻게 했을까요? 지도자로서 입다는 사자를 다시 보내서 암몬 왕에게 이 요구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자세히 논증합니다. 암몬이 요구하는 땅이 이스라엘 것이라는 이유과 근거를 밝힙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이것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15~27절까지 입다가 전하는 말을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입다는 암몬 왕의 말을 네 가지로 논박합니다.
첫째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입다는 출애굽 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스라엘은 땅을 빼앗으려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스라엘은 암몬과 싸워 땅을 취한 적이 없고 따라서 땅을 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둘째는 신학적 논리입니다. 암몬 왕이 문제 삼는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누리며 만족하는 것처럼, 암몬도 그들의 신이 주는 땅으로 만족하고 괜히 억지를 쓰며 남의 땅을 넘보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만약 땅에 대해서 답답한 것이 있으면 너희가 섬기는 신에게 가서 그 신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신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거짓 신입니다.
셋째는 모압과의 비교입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모압은 암몬과 같은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암몬만 지금의 상황을 문제로 생각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훨씬 더 능력이 있었던 모압 왕 발락도 이스라엘의 땅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암몬이 이 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그동안의 침묵입니다. 암몬이 문제 삼고 있는 땅에서 이스라엘은 300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시비를 거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암몬이 이 땅에 대해서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전에 벌써 문제를 제기했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제 와서 땅을 내놓으라는 것은 억지이고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입다의 결론입니다. 암몬이 이 시점에서 시비를 거는 유일한 이유는 암몬이 이스라엘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으로 땅을 빼앗으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입다는 마지막으로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자신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말하면서 자신의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였으나”(27)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이 모든 일에 대한 판결을 맡깁니다. 지도자로서 입다는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입다의 배경은 어떠했습니까? 편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었고, 불량배 무리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이끌었던 자였습니다. 어쩌면 우리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런 선입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문제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의 모습을 보니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알고 있고, 협상가로서의 뛰어난 언변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실력과 필요한 지식들을 두루 갖춘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입다의 인생에서 굴곡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면, 입다가 편안함과 안락함 속에서 자랐다면 지금의 입다가 있을 수 있을까요?
비록 당시 그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겠지만, 그에게 큰 상처가 되었겠지만, 거절당한 아픔과 쫓겨난 서러움, 출생에 대해서 저주하며 비통한 마음으로 괴로워했겠지만, 그의 삶의 어려움은, 그러한 경험들은 그를 단단하게 했습니다. 그의 삶이 그를 준비되게 했습니다. 두려움 없는 큰 용사로, 영리한 협상가로, 탁월한 지도자로 그를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종류의 어려움들을 만납니다. 여러분이 겪은 과거의 경험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좌절하기도 하고 정말 부끄러운 실패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괴로움도 있고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처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아닐까요?
어려움들이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어려움들이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게 했으며, 어려움들이 주님을 더 의지하도록 했고, 어려움들이 다른 사람의 형편을 헤아리고 더 이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움을 만날 때, 어려움을 어려움으로만 보지 않고 어려움을 통해 우리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조금 더 자랐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가 조금 더 주님을 닮아가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과거입니다. 과거의 어려움 때문에 아직까지 그 상처가 남아있다면 이제 그만 떨쳐버리십시오. 과거의 아픔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지금 나의 부족한 모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난 과거에 이런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런 모습이야!’ 핑계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바꾸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상처를 치유하시며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하십니다.
다음으로 현재입니다. 현재, 어려움을 겪고 계시다면 이 어려움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기억하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뜻을 가지시고 나를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나를 더 성숙하게 하시고 나를 더 주님 닮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려고 준비되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있지만, 그럴 때에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신실하심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늘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입니다. 훗날 우리는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십시오. 온전한 모습으로 그 앞에 서게 될 그날의 기쁨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미래에 경험하게 될 온전한 나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비록 지금은 넘어지지만 그날에는 완전합니다. 그러니 지금의 모습으로 좌절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넘어짐이 내일의 도약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실수가 내일을 위한 예방 주사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뜻에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빚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입다의 삶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의 삶에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을 아시고 함께 하시며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