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왕이신 예수님의 입성
본문: 누가복음 19장 28절 ~40절
설교자: 조정의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했습니다. 국민이 양도한 권리를 받아 국민의 대표와 지도자로서 국가를 다스리는 장소인 청와대에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입성”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텔레비젼 방송에서 대통령의 입성을 생중계하고 수많은 기자들이 사진을 찍습니다. 국민에게 있어서 이 날은 기대가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뭔가 나라를 획기적으로 좋게 바꿔줄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자기들이 겪는 어려움에서 건져낼 것이라 기대합니다.

대통령에게 있어서도 이 날은 상징적으로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믿음직하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안착하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왕이 자기 나라 백성의 환호를 받으며 궁궐에 입성해왔고, 오늘날에도 셀수 없이 많은 지도자가 입성을 합니다. 그때마다 백성의 기대에 찬 환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만날 왕, 예수 그리스도만큼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왕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입성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전지한 왕, 예수님이 입성을 준비하셨다(28~36)

‘전지(全知)하다’는 말은 ‘모든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왕이었습니다(욥 12:13). 모든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신 예수님이 왕으로서 예루살렘 입성을 어떻게 준비하셨는지 살펴봅시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큰 무리 앞에서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앞서 가다 – 아버지, 정한 시간에 맞추기 위함)

예수님은 누군가에 떠밀려 가거나, 어쩌다보니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신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때”에 맞춰 앞서서 움직이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초월적인 지식을 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때”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반드시 이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셔서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선지자 다니엘을 통해 이 때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다…”(단 9: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530년 전에 쓰여진 기록입니다. 69이레는 연수로 계산하면 483년입니다. 예루살렘 중건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곧 주전 444년에 이루어졌고, 그후로 예순아홉이레인 483년 후는 예수님이 앞서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신 바로 이 때입니다. 메시야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 때는 반드시 이 때,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 어린양이 죽임 당하는 금요일 저녁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앞서서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지하심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 탈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나귀 새끼였는데, 29절을 보면 제자 중 둘을 보내어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심부름을 시킨 장소는 감람원 부근 벳바게와 베다니 부근입니다.

여리고에서 감람원까지 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낮은 지대로 해면 아래 350m에 위치하였고, 예루살렘은 해발 700m정도가 되는 고지대입니다. 차이가 1,000미터가량 됩니다. 광야길로 먼지가 풀풀나는 거친 오르막길을 대여섯 시간 걸어가면 싱싱한 푸릇빛이 도는 숲과 동네가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감람나무가 많이 심긴 동산, 감람원입니다. 

이 감람산을 넘기 전에는 예루살렘이 보이지 않습니다. 언덕 꼭대기에 오르면 눈 앞에 예루살렘 성이 아름답게 보이고 언덕을 내려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동편 문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입성하기 위해 탈 것인 나귀를 준비하셨습니다.

감람원을 오르기전 만나는 동네가 벳바게와 베다니인데, 각 도시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3km정도였습니다. 벳바게는 ‘설익은 무화과의 집’이란 뜻을 가졌고, 베다니의 뜻은 ‘가난한 자의 집’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서로 맞은 편에 있었는데, 마지막 일주일 동안 예수님은 베다니(나사로, 알-아자리아-“나사로의 장소”)로 들어가셔서 밤을 지내시고,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해야 할 임무를 주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예수님의 이 설명은 언뜻 보면 두루뭉술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구체적이다못해 사람이 알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는 설명이었습니다. 길을 모를 때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 본 적이 있나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하나도 못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아는 사람도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을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TV 화면으로 지켜보면서 말해주듯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모두 보고 계셨습니다. 

마을에 들어가서 잘 살펴보면 나귀 있는 곳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마을로 들어가면 “곧” 나귀를 볼 것이라고 하였고 특별히 마태는 더 구체적으로 “매여 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가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그 나귀를 지켜본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짐작과 추측으로 알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전지하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예수님은 누군가가 그들에게 물을 것을 아셨습니다. “어찌하여 푸느냐?”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도둑질하다가 딱 걸린것 아닙니까?

다행히 예수님은 해명할 말을 일러주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고 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주님이 필요로 하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대답은 그리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닙니다. 여러분 밖에 나가서 한 번 실험해보십시오. 다른 사람 자동차를 가져가면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 ‘주님이 필요로 하십니다’라고 말하면 그냥 빌려 줄까요?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인의 마음에서 일어날 일도 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은 그저 추측이나 바람이 아닙니다. 두 제자가 마을에 들어갔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실제로 아시고 보시는 전지한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2-34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가보니 곧 나귀와 나귀 새끼가 묶여 있는 것을 봤고, 나귀 새끼를 풀 때, 임자들(부부)이 나와서 예수님이 미리 알려주신 질문을 합니다.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예수님이 알려주신 모범 정답이 있죠? “주가 쓰시겠다”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막 11:6)라고 기록했습니다. 주인은 그 말을 듣고 허락한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예수님과 나귀 주인과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나귀를 건네주는 암호가 “주가 쓰시겠다”였다는 것이죠. 하지만 절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벳바게라는 이름 없는 동네에 나귀의 임자들을 아시고, 그들이 키우는 나귀들을 아셨으며, 그들이 주님이 원하신다면 자기의 나귀를 내어드리고 싶어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왕이었습니다. 그분은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아시고, 들풀을 입히시며, 우리 머리칼도 다 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의 생각, 소원, 필요를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때에 아버지가 원하는 곳에 와서 아버지가 예비하신 짐승을 내어줄 준비된 부부를 찾아 그들의 나귀를 타고 입성하기 위해 준비하신 것입니다.

왜 하필 나귀일까요? 지금까지 내내 걸어다니셨으면서 말이죠. 구약이 다윗이나 솔로몬이 나귀를 탄 경우가 있었습니다(왕상 1:28-53). 다윗의 혈통을 따라 왕이 되신 예수님도 나귀를 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지 그 이유로 나귀 새끼를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시기 500년 전 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시온의 딸아(이스라엘 백성)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정확히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딸, 시온의 딸 앞에 임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왕으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정확한 때를 아시고 앞서 행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예비하신 나귀 새끼를 준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나귀를 타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많은 백성에게 자기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대로 금요일 밤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계획이었습니다.

2.겸손의 왕, 예수님이 입성하셨다(35~38)

두 번째로 우리는 겸손의 왕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보내심을 받은 두 제자가 예수님께 나귀 새끼를 끌고 왔고,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았습니다. 한 번도 사람이 탄적이 없기 때문에 안장 역할을 할 수 있는 물건으로 두꺼운 겉 옷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왕은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곧 그분의 겸손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나귀를 탄 것이 왜 겸손의 표현일까요?

어떤 사람은 말처럼 크고 위엄있는 짐승이 아니라 나귀처럼 작고 초라한 것을 탔으니 예수님이 겸손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마태는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를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말합니다. 논밭을 가는 데 사용하는 멍에를 메는 짐승에 온 세상의 임금이 타신 것이 얼마나 겸손한 모습입니까? 한국 대통령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검소하고 서민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겸손의 왕이신 이유는 말을 타셔야 하는데, 나귀를 선택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나귀는 천한 짐승이 아니라 고귀한 짐승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시 왕들도 전쟁때는 말을 탔지만 평화로울 때는 나귀를 탔습니다. 예수님이 겸손의 왕이신것은 나귀가 상징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는 자기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반역한 모든 죄인을 처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입성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를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입성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계시록 19장 11절을 보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입성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죠.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만국을 심판하기 위해 오십니다. 모든 반역자를 맹렬한 진노로 밟으실 것입니다. 그때 무엇을 타고 오실까요? “흰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탄 짐승은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 새끼입니다. 구약 율법에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짐승을 거룩한 용도로 구별하였는데(민 19:2; 신 21:3; 삼상 6:7),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를 타고 예수님은 거룩한 사명을 이루러 입성하고 계십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일, 더러운 죄인을 위해 대속물로 자기 자신을 내어줌으로 그들을 의롭다 선포하는 일.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이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왕의 입성을 축하하고 기뻐했습니다.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레드 카펫을 깔고 귀빈을 모시듯, 왕이 입성하는 길에 자기의 옷을 펴서 깔았습니다(왕하 9:13, 예후).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사람들의 기대가 점점 고조에 올랐습니다. 드디어 우리가 기다린 왕이 입성하신다! 이분이 바로 그분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다!

감람산 꼭대기에 오르자 드디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보였습니다. 정오에 금으로 장식한 성전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대는 정점에 다다랐습니다. 왕이 내리막길에 들어서자 온 무리가 기뻐하며 큰소리로 외칩니다.

37-38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엄청난 기대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수많은 기적을 봤습니다. 여리고에서 올라오는 길에도 두 맹인이 눈을 떴고, 죄인 중 괴수인 세리장이 변화되는 것을 봤습니다. 몇 주전에는 베다니에서 죽은지 나흘 된 썩은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살아 나오는 것을 봤습니다. 그들이 이 무리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분이야 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 로마를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탈환할 왕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군중들도 동문 밖으로 쏟아져 나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8편에 기록된 여호와의 구원의 날에 관해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복된 왕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마태와 마가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기록합니다. 호산나-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왕이여! 라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되찾아 드디어 자기들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도 평화를 가져오고,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을 지금 이 때 이루지 않으실 것입니다. 로마를 뒤집어 엎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분의 능력은 로마 군사에게 매맞는 동안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를 처형하고 예루살렘 왕으로 등극할 것이라 기대했던 그분은 오히려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받아 성 밖으로 끌려나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엄청난 기대감에 가득차 환호하고 찬양하고 소리질렀던 이 군중이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예수를 죽여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진정한 왕이시지만, 그들을 대신하여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겸손의 왕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3.심판의 왕, 예수님이 반대하는 자를 책망하셨다(39-40)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기대로 사람들이 환호했지만 예수님은 그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던 사람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39이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선생”이라는 호칭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을 하찮게 여겼고, 자기들에게 집중되어야 할 관심과 찬양을 빼앗아가는 경쟁상대, 제거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교만에 눈이 먼것입니다.

메시야만 받을 수 있는 호칭으로 당신께 구원을 요구하니, 이건 신성모독이오. 당신이 나서서 뭐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오? 이런 의미로 비난조로 책망합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하시니라

일차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찬양하지 않으면, 여기 있는 돌들이라도 나를 찬양할 것이다. 예수님은 찬양받기 합당하신 왕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만드신 피조물 중에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유일한 피조물은 사람입니다. 하늘과 땅, 그 안에 만드신 만물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면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싫어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교만의 대명사 바리새인, 하나님의 계명을 가장 가까이 했던 그들이 애석하게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 자기가 택하신 백성들이 거하는 수도, 왕의 자리에 입성하시는데도 그들은 직접 찬양하기도 거부하고, 다른 이의 찬양도 거슬려 합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의 더 깊은 의미는 41-44절까지 이어지는 심판의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의 입성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왕, 예수님이 아버지의 때에 아버지가 정한 뜻대로 나귀를 찾아 입성을 준비하셨습니다. 

겸손의 왕 예수님은 심판자로 입성하지 않으시고 모든 죄인에게 평화에 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영원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향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계십니까? 군중들처럼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환호하다가 기대가 꺾이면 분노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처음부터 왕으로 영접하기를 거부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죄의 저주 아래 고통받는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그분이 겸손히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며 진정으로 찬양드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계십니까?

대통령이 11-1번 버스를 타고 유평 마을에 내렸습니다. 평범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터벅터벅 유평교회를 향해 걸어옵니다. 제가 그 모습을 봤다면 급히 내려가 “어떤 일로 친히 여기까지 오셨어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의 검소하고 겸손한 행차에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유평교회에 신장 이식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하죠? 제가 그 사람 생명이 끊기는 것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내 신장을 주려고 왔습니다. 여러분 아마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혹시 기자들이나 수행원들이 있었다면 다들 만류할 것입니다. 그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있었다면 강력하게 반대했을 것입니다. 이러려고 우리가 당신을 뽑은 것이 아닙니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해달라고 당신을 뽑은 것입니다. 당신처럼 위대하고 강한 능력을 갖고 국가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그런 일에 삶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지지자들은 아마 강력하게 분노하며 대통령을 미워할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신장을 받아 목숨을 건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요? 어떻게 그분이, 그 높으신 분이 나를 알았을까? 나의 처지를 어떻게 다 알았을까? 내가 아프고 위독하다는 것에 어떻게 관심을 가졌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그 위대한 분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신 그분이 자기 신장을 나에게 내줄 수 있을까? 나에게 생명을 주려고 친히 이 시골 동네까지 찾아와 나를 만나줄 수 있을까? 깊이 감사하며 눈물흘리지 않겠습니까?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왕께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왕은 친히 이 땅에 찾아 오셔서 오직 죽음밖에는 기대할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겸손의 왕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