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
본문: 요한계시록 15장
설교자: 조정의
‘자기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세상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종말에 그들을 영원히 심판하시는 것일까?’ 29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시애틀에 마스힐처치를 개척하여 6년 만에 출석 교인 1만 명의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롭 벨 목사는 오랜 고민 끝에 2011년 <사랑이 이긴다>라는 저서로 결론을 냈다: ‘하나님의 사랑이 결국 이긴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지옥도 영원한 심판도 없다.’
롭 벨은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성경에 권위를 두고 현대 지식, 과학, 윤리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지식, 과학, 윤리에 권위를 두고 성경을 해석한다. 성경으로 인간의 이성, 감정, 경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 감정, 경험으로 성경을 판단한다. 롭 벨은 ‘17세 소년이 짧은 삶 동안 지은 죄 때문에 수억만 년, 수십억 만 년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것이 정말 공의롭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한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위태롭게 만들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우리의 이성과 감정과 경험을 강력하게 압박하여 성경에 의문을 갖게 하고 결국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거부하고 우리를 만족시킬 만한 의미로 성경을 뜯어고친다.
롭 벨은 이런 말도 했다: “지옥이 없다고 해서 십자가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사라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아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인간적인 생각과 감정, 경험을 따른다면, 나는 롭 벨의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교회 출석 중인 누군가의 아빠, 엄마, 아들, 딸이 복음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살더라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모래처럼 불안정하고 항상 변하는 사람에게 권위를 두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반석처럼 견고하고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권위를 두고 사는 삶이 안전하고 지혜로운 삶이다(마 7장).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의와 사랑을 온전하게 나타내시는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일관성 있게 증언한다. 마지막 일곱 재앙의 서곡이 담긴 본문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지, 그 권위 있는 가르침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서론
요한은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표적)을 봤다. 땅에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었고, 어린양 예수님께서 그 봉인을 해제하고 하나하나 아버지의 계획대로 심판을 집행하시는 환상을 지금껏 요한은 보고 기록했다(6-19장, 일곱 인-일곱 나팔-일곱 대접). 이제 마지막 재앙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칠 것이다(16-17장). 금 대접 일곱에 담은(7절) 마지막 일곱 재앙을 예수님 명령대로 수행하기 위해 일곱 천사가 준비됐다(1절).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는 장면은 16장에 기록되어 있다(계 16:1). 그 심판을 준비하는 과정이 기록된 15장에서 우리는 3-4절에 기록된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 노래는 하늘 성전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 가에 서서(계 4:6)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노랫소리다. 그들은 하나님의 두 가지 의, 심판하시는 의와 구원하시는 의를 노래한다.
1. 주의 심판은 의롭고 참되십니다
심판의 기본 개념은 옳고 참된 것을 행하는 것이다. 옳지 않은 것, 거짓된 것을 바로잡는 것, 망가진 질서를 회복하고 원래 역할을 찾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모두 바르고 옳은 것을 사랑한다. 심판의 부재가 아니라 공정한 심판을 갈망한다. 무정부 아래 공황을 바라기보다 선한 정부 아래 질서와 평안을 원한다. 합당한 심판을 행하지 않는 권세자를 우리는 무시하고 경멸한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온전한 정의는 이 땅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첫째, 모든 사람이 연약한 인간, 부패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의를 온 땅에 실현할 만큼 권세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3절).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정의를 온전히 실현하실 수 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바르게 판단하신다(잠 15:3).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4절).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신다(시 37:28). 거짓이 조금도 없으시고, 어그러진 판단이나 부조리한 판결이 전혀 없으시다는 점에서 타인과 영원히 구별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 인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3절).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속성을 풍성하게 반영한다. 이는 일곱 재앙의 준비 과정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났다. ① 거룩하심, 전능하심: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늘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찼다(8절). ② 영원하심: 바로 그 성전에서 네 생물 중의 하나가(높은 계열의 천사)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일곱 천사에게 주었다(7절). 심지어 심판을 수행할 일곱 천사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나올 때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옷 입었다: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6절). 하나님의 영광, 거룩, 권능을 입고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기준에 따라 어느 정도 정의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 자체는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에 하나님의 속성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분은 너무 거룩하신 기준을 가지고 계신다: 간디처럼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고 선한 삶을 산 사람도 형벌 대상이다. 영원하신 형벌은 너무 심하다: 17세 소년에게 영원한 형벌이 내려진다. 죄가 조금도 없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좋은 아빠, 좋은 아내, 좋은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내가 너무 엄격한 하나님 심판을 영원히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의, 구원에 나타난 의를 함께 이해할 때 온전히 해결된다.
2. 주의 구원이 크고 놀라우십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말할 때, 크고 놀라운 희생적인 사랑에 감동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나를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데 싫어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조화롭게 이해하지 못한다. 취사선택한다. 그러니까 롭 벨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없어도 십자가의 의미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둘을 조화롭게 다룬다. 본문에 기록된 성도의 노랫소리는 분명히 불이 섞인 유리 바다에서 불려진(2절) 노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찬양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노래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출 15장; 신 32장), “어린 양의 노래”였다(3절).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노래했다는 것이다(계 1:6, 5:9-10). 둘은 불협화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대립하지 않고 화합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3장에서 설명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 앞에 모든 사람은 영원히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의를 은혜로 값 없이 주셨다.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두 가지 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곳이다.
만일 십자가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배제된다면, 십자가는 그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외아들을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우며 억울한 사형 틀에 달리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심판 없이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은 십자가를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만든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 대신 받으셨다. 그래서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입히셨다.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값 없이, 이렇게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포되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이 확증되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작은 죄’에 영원한 형벌을 내리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거절한 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를 맛본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를 우리 대신 이루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는다.
예수님은 이것을 포도원 농부 비유로 말씀해주셨다(마 21:33-46). 주인은 포도원을 정성껏 가꿔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 추수 때 약속된 소출을 받기 위해 종들을 농부에게 보냈는데, 보내는 종들마다 심히 때리고 돌로 쳤다. 더 많은 종들을 보냈더니 똑같이 대했다. 여기서 주인의 공의는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아들을 보냈다. 누구든지 아들을 존대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는 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하지만 농부들은 아들을 죽였다. 그러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고 기한이 없다.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 사랑을 거절하는 자에게 남는 건 심판 뿐이다.
3. 적용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조화롭게 이해하는 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하나님의 심판에 나타난 의와 구원에 나타난 의를 모두 기쁨으로 찬양하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3-4절에 기록된 찬양을 부른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 자들이다. 그들은 대환난 기간에 적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예수님께 충성하기 위해 목숨을 잃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2절). 비록 육신은 죽임을 당했지만, 영혼은 구원을 얻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원한 사랑을 받는 이유다. 우리가 그 많은 죄와 허물을 가졌음에도 심판을 받지 않고 용서를 받는 이유다. 끝내 믿음의 결국 영혼 구원을 얻는 이유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 의를 내세우지 마라.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라. 어떤 세상의 위협이나 유혹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대체하지 마라.
둘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화롭게 해야 한다. 4절에서 성도가 부르는 찬양 소리를 들어보라: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고백이다. 만국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기쁨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다. 종말에 예수님을 거절한 자들은 강제로 무릎이 꿇리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영원한 심판을 자초한 자들은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이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아라.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3:9).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사랑을 받는 자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범사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경외). 매일의 삶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지 생각하라. 집에서든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당신의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라. 기뻐 받으실 영적 예물로 당신을 바치라.
마지막으로, 자유주의를 경계하고 배척하라. 하나님의 공의를 경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하는 가르침을 멀리하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기보다 사람의 이성과 감정에 호소하고 경험에 무게를 두는 모든 교사를 당신 삶에서 쫓아내라. 그들은 친절해 보이지만 당신이 실족했을 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격려하며, 그 결과는 상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를 드높이고,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는 가르침을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