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인자의 날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본문: 누가복음 17장 23~30절
설교자: 조정의
우리는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인자의 날”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인자의 날은 어느 때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봤습니다. “인자의 날”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천 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실 때를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인자의 날”은 유대인이 기다리는 날이고, 교회는 “휴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중에서 우리를 부르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인자의 날에는 주님과 지상에 함께 내려와 다스릴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이 기다리는 예수님의 (지상)재림이나 교회가 기다리는 예수님의 (공중)재림이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두 사건이 나타나는 모습이 매우 유사합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주 오심을 기다리든지, 사람들은 각자 기대를 가지고 그 날을 기다립니다. 날짜를 정해놓고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 교주를 재림예수라고 믿고 신봉하는 무리도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나 별자리를 계산하여 휴거나 재림을 계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종류든 주 오심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 날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사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 운석이 떨어질 것은 염려해도 예수님이 오실 것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에 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갖거나 지나치게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더 속해 있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이 “인자의 날”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 제대로 알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반응을 기대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교회에게도 그와 같은 반응을 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 오심”을 제대로 알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 반드시 오늘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주 오심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눅 17:23-30]
23.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1. 어떻게 임하는가?(24-25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24절에 한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번개..같이”. 예수님은 번개 같이 오실 것입니다. “번개같이 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설명을 더 살펴봐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자의 날이 어떻게 임하는지 두 가지 특징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 신속하게 임한다
먼저 번개의 특징은 빠르다는 것입니다. 번개는 아주 빠른 속도로 하늘 아래 이 쪽에서 저쪽까지 비춥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번개처럼 빠른 차”, “번개같은 스틸”, 속담 중에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겠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행동이 매우 민첩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신속하게 오실 것입니다. 주 오심을 설명하는 성경의 표현은 “속히”, “즉시”, “홀연히”, “순식간에”입니다. 하나 같이 빠르게 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번개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예상치 못할 때 친다는 것입니다. 알지 못할 때 번개가 치는 것처럼 주 오심 역시 “알지 못할 때” 임합니다. 예수님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40). 인자의 날은 속히 그리고 갑자기 나타납니다. 휴거의 날에도 주님은 “속히”, “갑자기” 오실 것입니다.
(2) 모두 알 수 있게 임한다
두 번째로 번개의 특징은 모두가 알 수 있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 이쪽에서 저쪽까지 비추어 확연히 드러납니다. 번개가 치는 방향을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 번개가 쳤는지 안 쳤는지 잘 모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던 시대에는 전기가 없었던 시대였고 불빛이 드물었기 때문에 캄캄한 밤중에 번개가 이쪽에서 저쪽까지 빛을 비추면 근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마치 한밤중에 이 홀에 LED등을 켰다 끈 것처럼 모두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인자의 날이 그렇게 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혹시 오늘이 인자의 날인가? 이미 지난 것 아닌가? 인자의 날이 거의 다 온 것 아닌가? 이런 추측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 날이 참으로 왔다면 모두가 다 알도록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임할 때 해, 달, 별에 징조가 있을 것이고,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가 있을 것이며,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며 기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고, 큰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1:25-27).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부분이 휴거와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이 공중재림하실 때에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는 못하나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모두 그것을 알고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인자의 날은 속히, 갑자기, 그리고 모두가 알도록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인자이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인자의 날을 기다리는 태도를 바꿔줍니다. 기다리는 자로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인자의 날을 기다리는 두 가지 잘못된 반응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생각지 않은 때 모두가 알도록 속히 오실 인자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주시는지 알아보겠습니다.
2. 잘못된 반응1: 잘못된 관심(23절)
23“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3절에 기록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면서 그 징조들을 찾기 위해 애씁니다.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라고 말하면서 여기저기서 인자의 징조를 추측하고 알아맞히려 합니다. 예수님은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이 인자의 날에 대해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다”(행 1:7). 인자가 오실 날, 그 징조를 아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고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의 날을 맞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이유는 다양한데, 어떤 사람은 남을 속이고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이런 시도를 합니다.
1992년 교주 이장림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는 이름의 “다미선교회”를 세우고 8천명이 넘는 신도들에게 10월 28일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방송에 생중계 된 이 사건을 통해 결국 “인자의 날”이 세상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교주 이장림은 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면서 정작 자기는 93년에 만기되는 환매조건부채권을 구입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모든 성도의 헌금이 25억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장림은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거짓으로 주 오심을 추측하고 사람들을 속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주장합니다. 그를 신봉하는 이들이 “보라 여기 있다”라고 말합니다. 한국에 재림 예수가 약 50명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익숙한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교주는 국내와 해외를 합쳐 약 250만명의 추종자들에 의해 “재림 예수”라고 불립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안상홍님이 재림 예수인 이유”라는 영상도 있었습니다. “보라 여기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날이 모두가 다 알도록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안상홍이 재림 하는 것을 아셨습니까? 250만명의 추종자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는 이미 1985년에 죽어 경상남도 공동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징조를 알지도 못했는데 이미 죽었다는 말입니다.
또 한 사람 유명한 재림 예수가 있으니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입니다. 2016년 그를 “재림 예수”로 신봉하는 사람이 16만 1691명으로 그들이 구원받는 수로 제한한 14만 4천명을 넘었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이만희를 재림 예수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1984년 3월 14일 예수께서 이만희 속에 들어가셔서 재림하셨다고 주장합니다. “보라 저기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칭 재림 예수가 탈세, 여자 문제, 사기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1984년 그가 임했다고 말하는 인자의 날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속여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재림 예수인척 하거나 종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더러운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인자의 날을 추측하고 알아내고 싶어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 오심의 징조”가 나오는데, 민족이 민족을 ,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전과 전투가 많은 지금이 바로 세상의 끝, 종말의 때라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전쟁은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인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라”를 보고 지진을 연구합니다. 과거에 비해 지진이 월등히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과거에 비해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바로바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요?
요즘엔 베리칩이라는 것이 개발되어 사람을 식별하는 칩으로 인체에 삽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이것이 666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 오심이 코앞에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유언비어에 속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진실로 거듭난 사람이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몰래 베리칩을 손등에 심으면 그는 그 즉시 지옥에 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제 3성전을 이야기합니다. 주가 오시면 성전 제사가 다시 시작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지금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성전에 필요한 모든 재료가 준비되었고 제사장까지 DNA를 조사하여 레위지파로 다 준비되었다는 내용입니다. 한국에는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성전은 재건될 수 있고 그러면 몇 달, 몇 년 안에 완성된 성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영적으로 돌이켜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성전을 세운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해 주 오심을 계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재료가 다 준비 되었으니 앞으로 몇 년 안에는 오신다는 추측과 선동의 문제입니다. 주 오심을 순수하게 기다리는 사람 중에도 이러한 선동에 휩쓸려 미혹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날과 그 때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홀연히, 생각지 못할 때, 도적같이 임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알도록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추측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되 인자의 날을 계산하고 맞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린 모릅니다. 우리가 알 바가 아닙니다. 감춰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신 29:29).
3. 잘못된 반응2: 무관심(26-30절)
26“노아의 때에 된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두 번째로 잘못된 반응은 무관심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예시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는 노아의 때, 또 하나는 롯의 때입니다. 둘 다 무서운 심판이 있었던 때입니다. 노아 시대에는 노아 가족 8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홍수로 심판을 받았고, 롯의 때는 롯과 그 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비처럼 내리는 불과 유황에 멸망당했습니다.
인자의 때도 그럴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것처럼 그리고 롯이 소돔에서 나간 것처럼 우리도 심판이 쏟아질 이 땅에서 구원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이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평온한 삶을 삽니다. 심판의 날이 그렇게 갑자기 모두에게 한꺼번에 임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습니다. 보통 사람이 하는 일상적인 일들입니다. 노아는 120년간 배를 만들며 사람들에게 심판을 경고했고, 롯도 소돔에서 재판관으로 일하면서 영향을 끼쳤으나 사람들은 그 날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자기네 삶을 살았습니다. 다가올 심판에 대해 무관심한 것입니다. 노아 때는 비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홍수가 난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비웃었고, 롯의 사위들은 롯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어느 날 생각하지도 못한 때 모두에게 그 심판의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날이 갑자기 모두에게 임할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노아와 롯처럼 인자의 날을 진지하게 기다리며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자의 날에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노아 때 사람들이나 롯의 사위처럼 그 날을 농담처럼 여기고 태연히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 모습에 더 가깝습니까?
만일 인자의 날을 진지하게 기다리는 자세로 산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죄와 더 치열하게 싸울 것입니다. 경찰에 곧 잡힐 것을 아는 사람은 범죄를 더하지 않습니다. 주일 아침 교회 예배하러 오면서 마음과 생각을 돌아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죄를 가까이 하기 힘듭니다. 죄를 범하고 넘어져도 곧 만나 뵐 주님을 기억하면 회개하고 돌이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용서하지 않고 이를 갈며 살아갑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죄를 계속해서 짓고 멈출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심판의 날이 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 오심을 소망으로 품는다면 주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요일 3:3)
둘째,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애타는 마음과 열정을 회복할 것입니다. 아이가 길을 건널 때 저편에서 대형 트럭이 오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소리를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영원한 멸망에 던져질 이들을 불쌍히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물에 빠져 죽어간 불쌍한 아이들 때문에 가슴이 이렇게 아픈데, 영원히 불 속에 빠져 들어갈 영혼을 생각하며 태연하게 먹고 마시고 심고 팔며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인자의 날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그 날을 준비하지 못한 이들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될 것입니다(마 24:14).
셋째, 이 땅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바로 잡아줍니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니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하면 싸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좌파가 옳다고 말합니다. 평등을 강조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우파가 옳다고 말합니다. 자유를 강조하고 일한 만큼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두 진영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치와 미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 진영 모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허용하기도 합니다. 좌파는 동성애처럼 성경이 금하는 죄에 대해서 죄라고 말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낙태 같은 죄는 허용합니다. 우파는 탐욕과 비리를 눈감아 줍니다.
좌파든 우파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롬 13:4). 그것이 이 땅을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바른 시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간과하는 사람은 양쪽 극단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둘 중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치 내가 지지하는 진영이 승리하면 이 땅에 유토피아가 완성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인자의 날을 진지하게 기다린다면 우리는 이 땅에 대한 기대의 수준을 성경에 맞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은 이 땅에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 이 땅으로 임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로서 살게 될 것입니다(히 11:16).
넷째,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것입니다(히 10:25).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서로에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게임에 중독된 고교생 자녀를 둔 부모는 계속해서 대학과 취업을 위해 지금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준비했는지에 대해 결산할 날이 곧 올 것이고 경고합니다. 인자의 날을 기다리는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자 앞에서 우리의 삶을 결산할 날을 진실로 기다린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을 권면할 것입니다. 서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자고 권면할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취하고 풍조에 휩쓸리는 성도가 있다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함께 인자의 날을 기다리며 살자고 돌아볼 것입니다. 땅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자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일에 얽매이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자고 격려할 것입니다(마 6:20).
다섯째, 진정한 위로를 주고받을 것입니다. 모세의 말처럼 우리 인생은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시 90:10). 우리는 야곱처럼 모두 험악한 삶을 삽니다(창 47:9). 어떤 가정 하나 그늘이 없는 가정 없고, 어떤 성도의 삶 하나 사연 없는 삶이 없습니다. 모두 각자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제가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 놀라는 것은 너무 힘들고 아픈 그 일이 성도의 삶에도 크고 작은 모양으로 다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땅이 전부라면 무엇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가 될까요? 억울하게 당한 일, 참고 견딘 일, 악을 선으로 갚고, 죄와 싸우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 왕으로 다스리는 그 날이 오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을 위해 모이고, 재물과 삶을 드리고, 그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이 땅에서 흘리는 모든 눈물을 닦아줄 주님이 없다면, 우리는 어디서 진정한 위로와 쉼을 누릴 수 있을까요?
주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보상하실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죽어도 무덤에서 그 이름을 부르실 이가 계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배부르게 하실 분,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실 이,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천국을 주실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수고와 슬픔 가득한 이 세상에 진정한 위로를 얻습니다. 이 말로 서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가 만일 인자의 날을 관심 있게 기다린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구도자를 불쌍히 여기며, 이 땅에 대한 바른 기대를 갖고,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하며, 진정한 위로를 주고받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주의 날을 기다리는 자는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커질 것이고, 세상의 유혹을 더 쉽게 물리칠 것입니다. 모이는 일에 더 힘쓸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더 자라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묻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세상을 바꿀 힘을 잃어버린 것은 천국의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내용을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봅시다. 만일 우리가 인자의 날에 무관심하다면, 천국의 소망을 잃어버렸다면 어떤 삶이 주어질까요?
죄와 싸울 힘이 줄어들 것입니다. 구령의 열정이 식을 것입니다. 이 땅에 대해 왜곡된 기대를 가질 것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데 중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가 아닌 헛된 위로를 주고받을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더 쉽게 넘어지고, 형식적으로 모이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분의 오심을 반기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 설교자 제임스 알렉산더는 무관심은 이단이며, 교회를 세속화한다고 경고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속히 오실 것이며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확실히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날에 대한 잘못된 관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날과 그때를 계산하고 알려는 노력을 당장 그치고 우리가 해야 할 바에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날과 그 때는 너희의 알바가 아니라”고 하시고는 곧 이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 날과 그 때를 알려고 하지 말고, 주의 증인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무관심에서 멀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사느라 인자의 날을 준비하지 않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무관심한 자의 삶은 미지근하고 세속적입니다. 기다리는 자의 삶은 뜨겁고 살아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무관심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가 인자를 만날 그날에 “보소서, 우리가 이렇게 당신을 기다렸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