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을 의지한 왕 히스기야 (2)
본문: 역대하28장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어느 순간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치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 없는 듯이 살다가 자식이 입시할 때가 되거나 남편이 승진 심사나 중요한 거래를 할 때 새벽 기도에 나가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히스기야의 개혁을 통해서 본 것처럼 우리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으로 충분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녀 양육을 궁극적으로 세상의 교육에 의지하는 부모들이 있다. 자녀가 하나님 믿고 좋은 신앙인이 되면 좋겠다고 말은 하면서 실제로는 학원에 잘 다니고 시험을 잘 보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아이의 영적 상태가 어떤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지 성경을 잘 읽고 배우고 있는지 교회에서는 어떤지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부모들도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교회를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는 교회의 인도자들도 많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따르기보다 세상의 성공 위주의 경영 철학을 따른다. 사람들을 더 많이 모으는 것을 목표로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보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을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장사하는 것이다.

가정에 필요한 돈만 가져다주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가장들도 있다. 가정을 돈에 의지하는 것이다. 결혼은 나하고 잘 통하는 성격 좋은 사람하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와 하나님의 관계보다 우선한다면 내 생각을 의지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그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런 삶의 태도는 위기의 순간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히스기야의 삶에서 이런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의지했던 왕으로 평가를 받는데, 평안 중에 있을 때도 그러했고 환난 중에 있을 때도 그러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들 삶에 하나님 외에 다른 이방신을 받아들이며 그들을 의지하던 때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자기 아들을 희생 제사로 드릴 정도로 하나님과 멀어졌던, 그리고 백성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던 왕이었다. 히스기야는 그런 때에 왕이 되어 이런 일들을 했다.

 왕하 18:3-4 [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그들 삶에 들어온 우상 숭배를 제거했다. 특히 여기서는 ‘모세의 놋뱀’이 언급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후에 광야 길을 가게 되었는데, 에돔 땅을 우회해서 가다가 길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괜히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며 여기는 먹을 것, 마실 것도 없고 그저 만나만 먹어야 한다고 원망했다. 그들은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하며 경멸했다. 이에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서 그 백성들을 심판하신다. 이 때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하시고 그것을 보는 백성들은 살 것이라고 하셨다.

이 놋뱀을 이 시대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신처럼 섬기고 있었다. 아마 처음에는 그들의 잘못과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그들을 구원한 신처럼 되었던 것이다.

이방신은 물론이고 하나님과 관련 되어 있고 비슷하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히스기야는 그 모든 하나님의 자리에 앉혀져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들을 제거했다. 그런 그와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형통하게 하셨다(왕하 18:7). 믿는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의 끝이 여기까지이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조금은 더 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듯 히스기야의 삶도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그가 환난 중에 있을 때

상황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여 중요 요새들을 점령한 것이다.

 왕하 18:13 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앗수르는 당대에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사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이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가 그에게 물려준 정치적 유산이다. 아하스 때에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남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다. 하지만 요새인 예루살렘을 쉽게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아하스가 그들을 물리칠 힘도 없었다. 그래서 아하스는 앗수르에 도움을 청한다.

 왕하 16:7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기꺼이 신하의 나라가 되겠다고 서약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성전과 왕궁에 있는 보물들을 조공으로 바친다. 그렇게 아하스는 앗수르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역대기의 저자는 결국 그것이 아하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대하 28:20). 아하스는 환난 때에 더욱 하나님께 범죄한다(대하 28:22). 아하스는 평안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위기의 순간)나 한결같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해서 살아갔던 사람이었다.

히스기야가 아하스에게 물려 받은 상황이 이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 아하스와 달랐고, 평안할 때나 환난 중에서나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래서 그는 앗수르와의 관계를 끊는다.

 왕하 18:7-8 [7]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8] 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단순히 조공 바치는 일만 그만 둔 것이 아니다. 그는 앗수르가 점령한 블레셋 땅을 공격하여 차지한다. 열왕기하의 저자는 여기서 북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을 상기시킨다(9-11절). 바로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멸망시킨 일이다.

 왕하 18:9-11 [9] 히스기야 왕 제사년 곧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칠년에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에워쌌더라 [10] 삼 년 후에 그 성읍이 함락되니 곧 히스기야 왕의 제육년이요 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제구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되매 [11]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앗수르에 이르러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두었으니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정복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좀 더 앞에 기록되어 있다.

 왕하 17:3-6 [3]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드리더니 [4]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5] 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6]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었던 호세아는 앗수르의 속국이었다. 앗수르의 문서에 따르면 호세아가 왕으로 임명된 것이 앗수르 왕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것이 좀 과장되었다고 해도 최소한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에 큰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신하 국가로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조공을 내다가 배반하고 애굽을 택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앗수르가 더 강력한 나라였기 때문에 애굽은 호세아를 돕지 못하고 결국 호세아는 옥에 감금되고 최후의 요새인 사마리아도 3년 만에 정복당했다. 앗수르는 피정복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이 있었는데,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 앗수르의 기록에 따르면 2만 7천 290명의 사람들을 이주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반대로 여러 곳에서 사람을 데려다가 사마리아의 여러 지역에 거주시킨다(왕하 17:24). 그렇게 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하고 단합된 힘으로 반역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앗수르의 정책이었다.

북 이스라엘이 이렇게 멸망한 이유는 표면적으로 보면 호세아가 정세를 잘못 판단해서 앗수르 대신 애굽을 택해서인 것 같다. 하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왕하 18:12 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

 결국 그들이 멸망당한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지금 상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앗수르를 섬기다가 배반한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그들이 선택한, 다른 말로 그들이 의지하려고 했던 애굽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언약을 어긴 것에 대한 심판을 받은 것이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비슷한 상황에서 앗수르에 항복하고 신하가 되기를 자처하고 조공을 보냄으로서 생존에는 성공했다.

히스기야는 그 앗수르를 배반하고(아버지와 다른 길을 택했다) 식민지를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다. 호세아와 다른 것이 있다면, 히스기야는 애굽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해서 이런 선택을 하고 있다. 지금 그의 선택이 심판대에 올려졌다. 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해 오고 있는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 하나님을 의지한 왕, 히스기야는 어떻게 이 상황에 대처할까? 지금이라도 아버지처럼 항복할까? 아니면 호세아처럼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릴까?

 

히스기야의 대처

 왕하 18:14-16 [14]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 현재 앗수르는 남 유다의 서쪽으로 내려와서 라기스라는 중요한 도시를 공격하고 있었다. 라기스 다음이 예루살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라기스로 사람을 보낸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 히스기야는 자신이 ‘범죄했다’ 즉 앗수르를 배반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그냥 돌아가면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말한다.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15]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16]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 앗수르 왕은 많은 은과 금을 요구했고 히스기야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성전과 왕궁에 있는 것들을 긁어모은다.

 지금까지 히스기야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14절부터 기록된 히스기야의 대처는 의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가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하며 했었던 일을 지금 히스기야가 하고 있다. 이제 히스기야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포기한 것일까? 이 환난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든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같다고 해서 동기가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히스기야가 정말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앗수르에 항복하려는 의도였다면 이어지는 말씀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렇게 했던 것은, 혹 그렇게 해서 앗수르가 돌아가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전쟁에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역대하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대하 32:2-5 [2]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3] 그의 방백들과 용사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의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하매 그들이 돕더라 → 히스기야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성 밖에 있는 물의 근원을 막았다. 물이 있으면 성을 오랫동안 포위하고 공격하기 용이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4] 이에 백성이 많이 모여 모든 물 근원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이르되 어찌 앗수르 왕들이 와서 많은 물을 얻게 하리요 하고 [5] 히스기야가 힘을 내어 무너진 모든 성벽을 보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 성의 밀로를 견고하게 하고 무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고 → 그리고 성벽을 튼튼하게 보수하고 망대도 높이 쌓는다. 성벽을 두 겹으로 하고 무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어 둔다.

 전쟁 준비를 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도우실 것을 알고 자신이 할 일을 한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일관적으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의 태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히스기야의 말을 보라.

 대하 32:6-8 [6] 군대 지휘관들을 세워 백성을 거느리게 하고 성문 광장에서 자기 앞에 무리를 모으고 말로 위로하여 이르되 [7]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 성경에서 우리가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명령이 이것이다. 두려워 말라. 아마 우리가 잘 두려워해서 그럴 것이다. 우리는 왜 두려워하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을 때 두려워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날 때 두려워한다. 그것을 히스기야도 알고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군대는 강한 군대였다.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격려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저 자기 암시나 자기를 과신을 해서가 아니다. 의미 없는 허풍이나 그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8]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 → 그의 편에 가장 크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정확한 사실에 기초한 명령이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히스기야는 누가 자기 편에 있는지를 알았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 자신의 편에 계심을 히스기야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확신 가운데 말했다. 이 군대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이것이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했던 모습이다. 전쟁의 위기에서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신지 알았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의지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준비했다. 앗수르 왕과 협상할 것을 준비하고 그것이 잘 이뤄지지 않았을 때 하게 될 전쟁을 준비한다. 이 준비의 핵심은 ‘믿음’이다. 산헤립도 이 ‘믿음’을 공격한다.

 

랍사게의 심리전

결국 앗수르 왕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평화 제안(전국 각지에서 은금을 모았지만)을 거절하고 자신의 수하를 보낸다(왕하 18:17). ‘다르단’, ‘랍사리스’, ‘랍사게’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그들의 직함이다. 군대를 이끄는 자는 다르단과 랍사리스였는데, 본문에는 랍사게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랍사게는 술 관원장인데, 아마도 그가 유다 말에 능통했기 때문에 함께 갔을 것이다.

이어지는 랍사게의 말은 마치 치밀하게 준비할 설교문이나 연설문 같다. 이 설교 혹은 연설의 제목은 이것이다. – ‘당신은 무엇을 의지하는가’ 혹은 ‘너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왕하 18:19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네가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

 하나님을 의지했던 왕 히스기야에게 앗수르 왕이 “너는 무엇을 의지하느냐”고 묻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의지할 만한 것 세 가지를 언급한다.

 

자신 – 히스기야

 왕하 18:20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게 그저 허황된 말 뿐이라는 것은 너도 알지 않느냐?”라는 말이다. 아마 히스기야도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사실 제대로 앗수르 대군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히스기야에게는 앗수르를 이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없었다.

다른 나라 – 애굽

 왕하 18:20-21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또 다른 강대국인 애굽을 의지할 수도 있다. 호세아가 그렇게 했다. 하지만 당시의 애굽은 앗수르에 비하면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랍사게는 애굽을 “상한 갈대 지팡이”라고 표현한다. 비꼬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결국 애굽을 지팡이로 삼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약한 갈대에 의지하다가 갈대에 손만 찔려서 다칠 뿐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애굽을 의지하지 말 것에 대해서 경고했다.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했다. 이제 랍사게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한다. 랍사게는 유다의 말을 할 수 있고 그들의 상황이나 종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던 것 같다.

– 여호와

 왕하 18:22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그들의 산당들과 제단을 제거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령하기를 예루살렘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했던 일을 언급하며 그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신을 향한 예배는 많이 드릴수록 좋은 것인데, 히스기야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산당을 다 제거하고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만 예배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는데 그의 신이 그를 돕겠냐는 것이 그의 논리다. 참 교묘하고 치밀한 말이다. 차라리 ‘여호와는 없어’라거나 ‘여호와는 약해’라고 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고 더 하나님을 의지할 수도 있는데, 랍사게는 히스기야 왕 때문에 너희 신이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랍사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산헤립의 말을 전했다면 이제 자신의 말을 덧붙인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히스기야와 백성들을 비웃는다. 다시 의지할 것들로 돌아가서 묻는다.

 왕하 18:23 [23] 청하건대 이제 너는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네가 만일 말을 탈 사람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네게 말 이천 마리를 주리라 → 너 자신을 믿는냐? 너희 중에 우리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내가 말 이천 마리라도 주겠다. 그럴 수 있느냐?

 [24] 네가 어찌 내 주의 신하 중 지극히 작은 지휘관 한 사람인들 물리치며 애굽을 의뢰하고 그 병거와 기병을 얻을 듯하냐 → 애굽을 믿느냐? 나 같이 작은 지휘관 하나도 말 이천 마리를 줄 수 있는데 우리 왕은 어떻겠느냐? 애굽에게 병거와 기병을 얻어봐야 소용없다.

 [25]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는지라 → 하나님을 믿느냐? 근데, 사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서 너희를 심판하는 거다. 너희 왕 히스기야가 그런 일을 했는데, 너희 신이 가만히 있겠느냐?

 정말 완벽한 논리다.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다. 백성들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대사들은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유다 말이 아닌 아람 말로 말해달라고 한다(26절). 하지만 랍사게는 결국 피해를 입을 사람들은 백성들이니 그들도 들어야 한다며 계속해서 유다 말로 말한다(27절).

 왕하 18:28-35 [28]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말로 크게 소리 질러 불러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29]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30]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31]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32] 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 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33]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34]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35] 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결론은 이것이다. 히스기야와 하스기야가 의지한다고 말하는 여호와를 믿지 말고, 앗수르 왕의 말을 믿으라는 것이다. 앗수르 왕이 오히려 너희를 평안히 거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회유한다. 여기서 랍사게가 말하는 앗수르 왕이 그들에게 줄 복은,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누리게 될 ‘복’과 아주 유사하다. 너희가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기만 하면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주겠다고 하는 것들도 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산헤립이 지금 자신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 측면에서 경고한다. 그 어떤 민족의 신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희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경고다.

상식적, 합리적, 객관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랍사게의 말은 굉장한 설득력이 있다. 유다의 군사력은 형편없고 애굽도 도울 힘이 없다. 하나님도 지금 히스기야에게 분노하고 있다. 앗수르 왕은 항복하면 평안한 삶을 약속하고 있다. 지금 예루살렘 성에 갖혀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항복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다른 민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힘겹게 싸워서 죽느니 항복하는 것이 낫겠다’

 

히스기야의 반응

랍사게의 말에 히스기야의 신복들은 비통의 의미로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돌아가서 말을 전한다(18:37). 그 말을 들은 히스기야도 옷을 찢고 베를 두르고 성전에 들어가고 선지자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낸다(19:1-2). 히스기야는 현재의 상황이 절망적인 상황임을 알고 있다. 모욕적인 상황이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이 비방의 말을 들으셨다면 그에 합당하게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에게 자신들을 위한 기도를 요청한다(19:4). 이사야는 그런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왕하 19:6-7 [6]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7]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가 어떤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 곳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히스기야가 격렬한 전쟁 끝에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왕이 돌아갈 것이라는 약속이다. 히스기야는 이 약속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할까?

잠시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의 상황을 다시 보자.

아람과 북 이스라엘에게 협공을 당했을 때도 이사야 선지자가 있었다. 그는 당시 아하스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다(사 7:2)고 표현한다. 심히 불안해 하고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사 7:4-9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 히스기야에게 하셨던 동일한 명령

 [5]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 그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굳게 믿으면 굳게 설 것

 이 약속의 말씀을 들은 아하스가 선택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는 앗수르를 의지했다. 히스기야는 무엇을 선택할까?

랍사게는 앗수르 왕인 산헤립에게 돌아가 상황을 전하고 산헤립은 이번에는 히스기야에게 서신을 보낸다. 편지의 핵심 내용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말라. 지금까지 어떤 민족의 신도 앗수르보다 강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항복하라’(왕하 19:10-13). 이전에 랍사게가 했던 말과는 약간 다르다. 랍사게는 하나님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모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산헤립은 분명하게 말한다. ‘히스기야여, 네가 믿는 신 여호와에게 속지 말라.

최후통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어떻게 했을까? 여기서 그의 믿음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왕하 19:14-19 [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 참 아름답고 한편으로 결연함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영화에 나오는 대국에 맞서 싸워야 하는 속국의 마지막 왕의 모습과도 같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그 편지를 하나님의 성전에 가지고 올라가 하나님 앞에 보시라고 펴 놓고 기도한다.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 이 기도는 탄식이나 불평, 원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히스기야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원망할 만하지 않은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말씀대로 하나님만 섬기고 백성들도 그렇게 하도록 지금까지 그렇게 애써왔는데, 그 결과가 이것이라니. 탄식할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이 기도를 시작한다.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 한 분 만이 이 온 우주에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16]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 히스기야는 그 증거가 되는 편지를 지금 가져온 상태다.

 [17] 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18]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실제로 앗수르는 그렇게 했다. 산헤립의 말이 그저 허황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멸망한 자들과 히스기야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 멸망당한 자들이 믿고 의지했던 신은 사실 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불에 태워질 수 있는 재료로 사람이 만든 우상들을 의지했기 때문에 멸망했다. 하지만 히스기야와 이스라엘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라 사람을 만든 신이시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이렇게 구한다.

 [19]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 히스기야가 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온 세상에 알리소서.

 이것이 히스기야의 믿음이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계속해서 의지한 이유이다. 사실과 약속에 기초한 믿음이다. 그에게 많은 의지할 것들은 필요하지 않았다. 가장 크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많은 신들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셨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제 구해 달라고 구하는 것, 그것이 히스기야의 믿음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런 분을 아는데, 의지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하나님의 응답

왕하 19:32-37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 하나님은 앗수르 왕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할 것이고 넌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행하신다.

 [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되었다. 히스기야는 싸울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싸우셨다. 산헤립은 많은 군사를 잃고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의 신 니스록에게 경배할 때 살해당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예배하여 구원을 얻은 것과 대조되는 사건이다.

 아마 영화 시나리오라면 너무 허무한 절정이고 결말이다. 거대한 전쟁이 벌어질 것만 같았는데, 어쩌면 너무 허무하게 모든 일이 끝났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힘들게 겨우 겨우 되는 일은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하시면 모든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모든 일이 쉬운 일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히스기야와 유다를 구해내신다.

앗수르도 흥미롭다. 그들 역시 그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있다. 니느웨에서 발견된 ‘산헤립의 육각주’에는 산헤립이 자신을 찬양하는 내용을 가득 적어 두었고 당연히 유다를 공격한 내용도 적혀있다. 그는 유다의 여러 성을 정복하고 많은 전리품을 챙긴 것을 자랑한다. 그러면서 히스기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히스기야를 유다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 안에 있는 죄수로 만들었으니 왕궁 안의 그는 마치 새장 속의 새나 다름없었다.’ 이게 끝이다. 유다 왕국을 정복하려면 당연히 수도인 예루살렘을 정복한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포위한 것은 사실인데 정복을 못한 것이다. 거짓말로 적어봐야 금방 들통 날 것이니 교묘하게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기록을 해놓았을 뿐이다.

어떻게 예루살렘이 대군 앗수르를 물리칠 수 있었는가? 그들에게 그 대군보다 큰 하나님이 계셨고, 그 하나님을 의지했던 한 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전

하나님을 의지한 왕 히스기야에 대한 말씀을 마치며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첫 시간에 우리는 의존적인 존재여서 그것이 무엇이든 무언가를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했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도 여전히 의존적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노력한다. 그것들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긴 한다. 이것저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조금씩 대신할 수 있고, 우리는 그런 것들로 안도하려고 한다.

랍사게가 했던 말처럼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에 속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것들을 다른 것들도 나에게 줄 수 있다고 착각하며 그것들을 의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리에 유한한 것을 아무리 많이 채워 넣어도 채울 수 없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변하는 것들이 대신할 수는 없다. 창조주를 피조물이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온전히 의뢰할 수 있는 분이시다. 평안할 때나 고난 중에서나 마찬가지다. 히스기야 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찬양했다.

그저 먼 옛날이야기 같은가? 동화 속 멋진 이야기 같은가? 아니다. 동일하게 절망적인 상황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아하스에게나 히스기야에게나 동일한 명령을 하시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두려워 말라. 낙심하지 말라. 내가 구원하겠다. 나를 믿으라.’

 그 하나님을 믿은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선하심을 경험했다. 그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택한 아하스는 그것을 놓쳤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신다. ‘두려워 말라. 낙심하지 말라. 나를 믿으라.’ 나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 의지하기를 택하고 있는가? 부부관계, 자녀 양육, 직장 생활, 교회 생활, 개인의 삶의 여러 문제, 당장에는 그 문제가 커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들이 해결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은 잘못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해라. 나를 의지하라. 나만 기뻐하라. 나로 만족해라”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분이셔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옳은 길, 바른 길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친히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의지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께 기대자. 그 때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이 세상 가운데 선포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