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인생의 축복을 만날 때
본문: 창세기 14장
설교자: 이병권
우리가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그 사람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람을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 별명이 생각나십니까? 그를 표현하는 말로 ‘믿음의 조상’, ‘하나님의 벗’, ‘끈질긴 중보자’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잘 몰랐던 아브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쟁을 지휘하는 용사로 아브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전쟁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네 왕과 요단 지역의 다섯 왕이 서로 싸우기 위해 모인 것으로 시작합니다. 1절에 열거 되어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네 왕(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2절에 열거 되어 있는 요단 지역의 다섯 왕(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소알 왕 벨라)이 싯딤 골짜기, 지금의 사해 지역에 모여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싸우는 이유는 4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요단 지역의 다섯 왕이 12년 동안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13년째 되는 해에 일제히 조공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들의 배신에 대해서 그돌라오멜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왕들과 함께 연합군을 만들어서 원정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은 5절에서 7절에 묘사된 것처럼 요단으로 오는 길에 여러 지역을 정복합니다. 이것은 이들의 군사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막강한 연합군은 마침내 요단의 다섯 왕이 있는 싯딤 골짜기로 왔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진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했을 것입니다. 전쟁은 그돌라오멜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고, 소돔과 고모라 군대는 패배하여 도망갑니다.
10절을 보면,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먼저 여기서 전쟁에 패해서 도망간 사람은 두 왕이 전부일까요? 말씀에는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럼 이 두 왕만 도망갔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것이 두 명이라면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갔다”는 표현이 말이 안 됩니다.
여기서 왕이라는 말은 그 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1절에서부터 기록된 것처럼, 왕들이 싸웠다는 것은 왕만 나와서 왕들끼리 5대 4로 싸웠다는 말이 아니고, 그 왕에게 속한 군대가 함께 싸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났다는 것은 그 왕에게 속한 군대가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역청 구덩이에 빠졌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마치 함정에 빠진 것처럼 그들이 도망가다가 구덩이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을 말하는 걸까요? 여기서 ‘빠졌다’고 번역했기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데 ‘숨었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이 많았는데, 그 역청을 캐고 나면 구덩이가 생깁니다. 그래서 패배한 군대가 몸을 피하기 위해, 일부는 역청 구덩이에 숨었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도망가다가 역청 구덩이에 빠져서 도망에 실패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렇게 승리한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은 소돔과 고모라의 재물과 식량을 약탈했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소돔에 살고 있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붙잡아 갔습니다.
12절에 기록된 것처럼, 롯은 소돔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롯이 처음부터 소돔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롯은 점점 그 장막을 옮겨 소돔에까지 이르렀고, 이제는 아예 소돔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세속적으로 살겠다고 작정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매력 때문에 조금씩 이동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더 세속적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결국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롯은 믿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선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식으로 말하면,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 예배에 참석할지는 몰라도, 여전히 세상의 가치를 좇아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보다 죄악 된 세상에 빠져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롯은 전쟁 포로가 되었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을 말하면 전쟁 포로가 되기 전에 그는 세상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아브람은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마므레와 그형제 에스골과 아넬과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 평화적으로 거주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전쟁에서 도망한 어떤 사람을 통해 롯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서 아브람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그가 맞서야 할 상대는 너무 컸습니다. 그냥 동네 깡패들과 싸워야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상대는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도시국가들의 연합군입니다. 아브람이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고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오히려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롯을 위해 뭔가 하지 않는다 해도 아브람을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롯은 자기 욕심 때문에 소돔까지 내려가서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에 대한 결과를 거두고 있는 것 아닐까요?
아브람이 뭔가를 하기 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고 상황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달려갑니다. 아브람은 롯을 위해 개인적인 안전을 잠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훈련한 318명의 장정들을 데리고 전쟁에 나섭니다. 15절에 아브람이 동원한 사람들을 일컬어 “가신”이라고 말하는데, 군사적인 역할을 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사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병사들을 지휘해서 북쪽의 ‘단’까지 쫓아갑니다. 그리고 병사들을 나누어 밤에 공격하는 전술을 펼칩니다.
자세한 상황을 알 순 없지만, 밤중에 거행된 이 기습 공격은 일순간 적들을 혼란과 두려움에 빠지게 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큰 승리를 거두었고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포로들을 되찾아옵니다. 이것은 믿기 어려운 놀라운 승리입니다. 일개 족장이 이끄는 무리가 강력한 연합군과 싸워서 이긴 것입니다.
물론, 이 전쟁에는 아브람의 병사들만 참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24절에서 아브람이 말하는 것처럼, 아브람과 동맹관계에 있었던 아모리 족속 마므레와 그의 형제들의 병사들이 전쟁에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함께 하셨기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모든 것을 되찾은 아브람이 귀환합니다. 17절에, 소돔 왕은 왕의 골짜기라는 곳까지 와서 아브람을 영접합니다. 왕이 직접 아브람을 맞으러 나왔다는 것은 아브람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영접하기 위해 나온 소돔 왕은 그 이름이 “베라”라는 것 외에 특별한 정보가 없습니다. 다만, 소돔 왕과 그의 백성들이 큰 죄악 가운데 있었고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가 어떠한 자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8절에는 소돔 왕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왕이 아브람을 맞이하는데, 그는 소돔 왕과 대조되는 살렘 왕 멜기세덱입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이고,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문자적으로 ‘의의 왕’ 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됩니다. 예루살렘의 왕인 멜기세덱은 의로운 왕이었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신약에 히브리서 7장을 보면 멜기세덱이 다시 나오는데, 이 멜기세덱을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로 제시합니다. 멜기세덱은 예수님처럼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또 우리는 그가 어떻게 아브람의 소식을 들었는지, 어떻게 이 골짜기로 오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람이 거둔 승리에 대한 소식을 누군가로부터 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꿈이나 다른 형태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맞으러 왔습니다. 특별히 그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는데, 멜기세덱이 주님을 예표하는 인물이고, 또 여기서 떡과 포도주가 나오니까 이것을 주의 만찬과 연결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우리 위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성경의 원래 독자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떡과 포도주는 전쟁을 하느라 지친 병사를 위한 음식으로만 보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주의 만찬을 집어넣으면 곤란합니다.
아브람을 맞으러 온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 알고 그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 놀라운 승리가 자신의 용기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달려 있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개인적으로 산꼭대기에 있는 듯, 고조된 감정 상태에 있을 때 멜기세덱의 축복은 아브람이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브람이 하나님을 더 신뢰할 수 있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럼 멜기세덱의 이 축복에 대해서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브람은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십분의 일을 준 것을 가지고 십일조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것은 아브람이 멜기세덱을 자신의 상급자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이 아주 불쾌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자가 와서 자신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하나님과 더 친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겸손히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시점이 엄청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후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브람의 겸손이 더 주목할 만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만 일하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하는 교회이며 영적으로 괜찮다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교회들은 세속에 물들어 있고,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더 낫다, 우리는 특별하고 우리가 최고라는 생각은 정말 무서운 교만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본다면 절대로 교만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기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멜기세덱의 축복에 이어서 소돔 왕은 아브람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합니다. 21절에 ‘사람들은 나에게 돌려보내고 물건은 그대가 가지시오.’ 그는 아브람에게 엄청난 부를 주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되찾은 사람만 보내주고 다른 모든 전리품은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승리를 주시더니 이제 이런 축복도 주시는구나!’ 자신의 공로를 생각하며, 이 정도는 충분히 가질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제안은 아브람에게 있어서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마치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아브람은 이 전쟁을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했습니다. 지금 자신이 거둔 큰 승리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이 만큼 고생을 했는데,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그에 따른 보상이 있어야죠. 거기다 아브람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소돔 왕이 자기 발로 찾아와서 큰 선물을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 제안은 충분히 받아들일만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짜 축복 앞에서 고민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돈 많은 부자가 우리 교회에 찾아와서 건물을 하나 크게 지어준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부자는 그동안 여러 나쁜 일들을 하면서 돈을 모았는데, 이제 좋은 일도 좀 하고 싶다며 거금을 기부하겠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고 받으면 될까요?
그런데 아브람은 이 제안을 아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소돔 왕의 매력적인 제안 속에 있는 위험요소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람이 소돔 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전쟁에 참가한 아브람의 순수한 동기를 오해받을 수 있고, 이후에 자신이 소돔 왕에게 매이게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소돔 왕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내가 도와줘서 부자가 되었어, 내 덕에 잘 살고 있는 거야!’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자칫 잘못하면 그 영광이 소돔 왕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그의 삶을 주장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소돔 왕이 그 분의 자리에 끼어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소돔 왕이 그 분의 영광을 가로챌 수 있는 빌미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아브람은 소돔 왕의 동기가 바르지 못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 소돔 왕이 자신의 인생에서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단호히 그를 제외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축복을 만날 때, 이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인지 조심해야 합니다. 이게 당장은 축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축복 비슷하게 보이는 것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가짜 축복을 제시합니다. 진짜와 비슷한 모조품, 짝퉁을 내미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 축복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만약 그것이 성경의 원리에 반하는 방법으로 얻는 것이라면, 내 신앙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그것은 가짜 축복입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나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일이라면, 그것은 가짜 축복입니다. 만약 그것이 나와 내 가족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가짜 축복입니다. 만약 그것이 내 인생의 목적을 망각하게 만들고 이기적인 활동에 빠져들게 한다면, 그것은 가짜 축복입니다.
우리는 이런 가짜 축복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축복을 만날 때 분별력을 가지고 그것이 나와 내 가족에게, 교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영향을 줄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거절할 것은 과감히 거절하고, 절제할 것은 절제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이 주는 가짜 축복과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축복을 분별하는 것이 항상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을 더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으며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상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가 서로에게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귀한 진리들을 공유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멜기세덱이 되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별력을 잃고 세상이 주는 가짜 축복에 현혹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개인적인 절정의 순간, 한편으로 아주 방심할 수 있는 순간에 소돔 왕으로부터 매력적인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소돔왕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아브람의 고백처럼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짜 축복의 제안을 거절하고 더 나은 하나님의 진짜 축복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진짜 축복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괜찮은 제안을 할 때, 세상이 어떤 좋은 것을 제공할 때, 혹은 여러분이 무언가를 선택함에 있어서 먼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에게 올무가 되지는 않을지, 그것이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며 살 수 있는 자유를 제한시키지는 않을지,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영광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지,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는 않을지, 그것이 나를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는 않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짜 축복에 현혹되지 말고 가짜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가짜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들과의 교제와 서로를 위한 영적 권면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진짜 축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가짜 축복의 한계와 그 위험성을 알고, 더 낫고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