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인생의 기다림을 만날 때
본문 : 창세기 16장
설교자 : 이병권
저는 오늘 창세기 16장 본문을 가지고 “인생의 기다림을 만날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빠른 것은 당연히 좋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모든 것은 즉각적입니다. 초고속 인터넷과 총알배송, 고속철도와 디지털 카메라,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사진을 찍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는데, 지금은 찍고 나서 바로 화면을 보며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느린 것보다 빠른 것이 시간을 절약하기 때문에 좋습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이런 생각이 우리의 신앙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느린 것은 불편함이 되었고 기다리는 것은 괴로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다리지 못하는 겁니다. 마음이 조급하여 성급하게 결정합니다. 오늘 기도한 내용을 내일 현실에서 보기를 원하고, 지금 무언가 수고한 것에 대해서 그 열매를 바로 얻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실제로 그런 일들은 바로바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힘들어하고 기다림을 견디지를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의 가정도 이런 기다림의 문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다림에 대해서 올바로 대처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저는 오늘 이 아브람 가정의 어려움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기다림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인생 가운데 기다림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기다림을 만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럼 ‘기다림’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약속에 대한 기다림과 그에 따른 갈등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그의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6장은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시작됩니다. (창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는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1절 말씀은 이미 11장 30절에서 나왔던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며 사래의 상태가 어떠한지 강조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갈을 소개합니다.
이 가정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사래의 입장에서,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지금 사래는 75세입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은 하셨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자신은 임신을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이해되지 않는 겁니다. 이미 10년을 기다렸습니다. 10일도 아니고 10주도 아니고 1년, 2년도 아닙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약속하고 1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계속 신뢰하며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사래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막연히 기다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두 손 놓고 계시니, 나라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래는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냅니다. 1절에 기록된 것처럼 사래에게는 여종이 있습니다. 그 여종은 애굽 사람이고 이름은 하갈입니다. 아마도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애굽에 갔을 때 얻은 종일 것입니다. 사래는 자신의 여종을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려 합니다. (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자녀를 낳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사래의 해결방법은 그 당시 사회적 관습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자기 여종을 통해 아들을 낳아서 상속자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상태,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기다림은 그녀에게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인간적인 계산으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생각했고, 아브람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특별히 아브람은 마치 아담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담이 하와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그냥 받아먹은 것처럼, 아브람은 자기 아내의 계획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보다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아브람을 불러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하셨지만, 그 땅에서 아브람이 만난 것은 심각한 기근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상속자, 아들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을 들었지만, 지금 자신의 아내는 자녀를 낳지 못합니다. 심한 기근이 아브람의 믿음을 시험했던 것처럼 지금의 상황도 그러합니다.
아브람은 이때에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봤어야 했습니다. 자기 아내의 제안이 옳은 일인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아내의 말을 그냥 들었습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 누구의 제안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아브람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는 옛날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아내의 그릇된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자기 아내의 여종 하갈과 동침합니다.
본문에서 아브람과 사래가 느끼는 어려움은 충분히 이해할만합니다. 사래가 오죽했으면 자기 여종을 아브람에게 줄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브람도 아내의 제안을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종을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야 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모든 것을 아시고, 고통의 외침을 들으시는 하나님께 자기의 문제를 가져가야 했습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때를 기다리며, 인도하심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서둘렀고 계산했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를 앞당기려 했습니다. 의심스러운 세상의 방법을 가지고 계획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다리지 못한 조급한 믿음은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사래가 생각한 해결책은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곁길로 벗어나고 맙니다. 사래의 계획대로 하갈은 임신합니다. 그리고 동화의 이야기처럼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고 끝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사래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4절에 의하면 하갈은 자기가 임신함을 알게 된 후, 그 여주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기 주인을 무시하며 업신여기는 겁니다.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래는 이에 대한 불만을 아브람에게 토로합니다. (창 16: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래는 지금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니까 아브람에게 탓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은 이러합니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6절)
사래는 아브람의 허락 아래 하갈을 학대합니다. 학대를 통해 하갈에게 자신이 여주인임을 일깨워줍니다. 결국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망갑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래가 생각한 해결책은 약속을 성취하는 합당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할 때, 믿음의 방법은 거절되고 인간적인 계산이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런 것들이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에 특별히 더 조심해야 합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부터 하갈의 교만과 사래의 학대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믿음의 방법을 포기하고 인간적인 계산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의 방법을 가져오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더 어려운 문제를 낳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잦은 실수와 계속되는 실패 속에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갈은 그런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갈이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했을 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는데, 여기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자는 천사보다는 하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인 것을 전제하고 하갈에게 약속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 여호와의 사자를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님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의 핵심이 이 대화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묻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8절)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하갈은 첫 번째 질문은 대답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질문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는 대답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는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말합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9절) 하갈은 사래를 피해서 도망 나왔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다시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갈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하갈이 낳을 아들의 이름은 “이스마엘”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라는 뜻입니다.
하갈에게 상황이 바뀔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갈이 있어야 할 곳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약속과 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그의 자손이 무수히 많게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다시 주인에게로, 어려운 관계 속으로 돌려보내십니다. 그녀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다시 보내십니다. 하지만 그냥 빈손으로 보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약속의 메시지와 소망을 품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하갈은 ‘자신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샘을 브엘라해로이 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나를 보시는 살아 계신 분의 샘’이라는 말입니다. 이 샘은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를 살피신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살피심은 그분이 살아 계신 분이라는 증거였습니다. 하갈은 그분의 살아계심을 경험했기에 이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은 이스마엘의 출생과 이름 짓는 일로 마무리됩니다.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아들을 이스마엘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이는 하갈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람에게 전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아들에게 이스마엘 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그 자체로 아브람과 사래에게 교훈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고통과 아픔을 보시고, 도움을 구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이스마엘 이라는 이름이 이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아이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이 사실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은 우리의 어려움이 다 해결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이루어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 많은 믿음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많은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한 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본문 이야기에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사래는 여전히 아이를 낳지 못했고, 하갈과의 관계는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참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아시고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의 음성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는 아주 작은 목소리조차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우리 마음의 목소리까지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분의 뜻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고, 자기 걱정에 빠져있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배워하는 교훈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기다림을 만나셨습니까? 그러면 기다리십시오. 조급해 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을 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를 돌아보십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뭔가를 바꾸려하고 기다림을 없애려고 애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관습과 편법을 사용하는 것은 당장에는 괜찮고 좋아 보일 수 있지만,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십니다. 어려움과 아픔과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 가지고 가십시오. 그분이 아십니다. 그분이 들으십니다. 그분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적인 노력을 그치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리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디게 느껴지십니까? 당장 무언가가 되어져야 하는데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는 것 같습니까? 기도하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까? 누군가의 마음은 여전히 닫혀있고, 틀어진 관계는 잘 회복되지 않습니까? 경제적인 필요가 잘 채워지지 않아 어려움이 있습니까? 나름 열심히 일하고 섬기는데 그만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미리 앞서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잔머리를 너무 굴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계산하지 마십시오. 계산기를 두드려봤자 어차피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내 뜻대로 앞당기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가만히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말씀을 따르도록 합시다. 조금 더 기다리며, 더 무릎을 꿇는 가운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합시다. 그분을 신뢰하는 가운데 옳은 일을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하나님께 아뢸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분의 음성을 구하며 그 말씀을 듣도록 해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계속 기억하며, 그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때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기다림을 허락하셨다면, 내가 임의로 합당치 않은 것들로 그 기다림을 제거하도록 노력하기보다 잠잠히 그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얻기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얻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조용히 기다리며 기도하며 주님의 함께 하심에 나의 인생을 맡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